265화
김은원 선수의 쇼트 프로그램이 끝났다. 그는 현재 주니어 피겨 선수 중에 기본 실력도 출중하고 힘과 기술도 좋은 편이기에 출전하는 대회마다 막강한 우승 후보로 꼽혔다.
그런 그와 막상막하 라이벌이라 불리는 예차프가 이번에 연달은 실수로 고꾸라지면서 1위는 김은원이 따 놓은 당상이었다.
재언의 팀원들은 경기 중에 찍힌 김은원 선수의 사진을 확인하면서 연신 감탄을 내뱉었다.
그 나이대 특유의 생생하고 상큼한 분위기에 자신만만한 표정까지 더해지니 그야말로 화보였다. 귀에 걸린 은귀걸이까지 제법 멋들어져서 모델로 쓰기 잘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예차프는 어디 있어요? 그리고, 그… 원래 제 옆에 계셨던 히어로님은요?”
“그는 볼일이 있어서 잠시 자리를 비웠습니다.”
쭈뼛쭈뼛 물어오는 김은원의 물음에 레헬은 냉랭한 표정을 지우고 예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자신보다 잘생긴 남자가 환하게 웃고 있는 모습에 김은원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 뒤 대기석으로 돌아갔다. 대기석에서 기다리고 있던 코치와 스텝들이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활짝 웃었다.
“이번에도 기록 경신이야. 프리도 실수만 안 하면 이번에도 무난하게 메달권 확보야. 이번 대회만 끝나면 동계 올림픽 금메달을 목표로 해야겠어.”
올림픽 국가대표 선수였던 독일계 미국인인 코치는 선수 시절 3번 참여했던 올림픽에서 아쉽게도 2~3위만을 기록할 뿐 금메달을 한 번도 따지 못했다. 스케이트장에 놀러 온 어린 김은원의 재능을 알아보고 지금까지 키워 온 것도 모두 그의 작품이었다.
코치가 잔뜩 흥분한 어투로 올림픽 금메달을 중얼거리는 걸 무시하며 김은원은 몇 번이고 예차프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신호음만 길게 이어질 뿐 응답은 없었다.
혹시 몰라서 예차프의 대기석에 찾아갔는데도 그는 보이지 않았다. 그의 스텝들은 예차프가 지금 상황이 좋지 않으니 혼자 두는 게 좋을 거라며 김은원의 어깨를 두드렸다.
“네. 아아, 그 지원 요청이요. 정말, 저희 쪽 직원이 사고를 친 모양입니다.”
레헬이 통화를 하는 듯 누군가에게 대답하면서도 느긋하게 문자메시지를 읽었다. 김은원은 문득 눈에 들어온 레헬을 눈동자만 굴려 위아래로 훑었다.
183cm인 자신도 분명히 작은 키는 아니란 자신이 있었는데 레헬은 그보다 훨씬 컸다. 비율은 물론이고 다리도 길었다. 저 다리 길이로 피겨를 했으면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한 선수는 자신이 아니라 저 히어로가 되었을 것이 분명했다.
모델 지인이 많은 자신도 레헬보다 아름답게 생긴 이는 지금까지도 본 적이 없었다. 그의 핸드폰 화면에 얼핏 보이는 메신저 화면에 붉은색 하트가 띄워져 있었다.
‘애인인가?’
레헬은 제법 즐거운 표정으로 애인인 듯 보이는 누군가와 메시지를 주고받으면서 통화를 마무리했다.
“네. 지원 요청은 필요 없습니다. 아, 맞아요. 그대로 모두 철수하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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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언이 핸드폰을 내려놓고 택시 바깥 풍경을 살피다가 기사에게 말을 걸었다.
“여기서 내려 주시면 됩니다.”
그런데 몇 번이고 말해도 택시 기사가 재언의 영어를 알아듣지 못했다. 그러자 예차프가 지갑을 꺼내더니 택시 기사와 대화를 주고받았다.
“여기서 내려 달라고 하면 되는 거죠?”
예차프는 택시 요금까지 지불한 뒤 택시가 멈춰서자 문을 열고 내렸다. 그에 재언도 사샤를 껴안고 조심스레 따라 내렸다.
사샤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잡을 새도 없이 재빠르게 얼른 제 형의 품 안으로 쏙 들어갔다. 핸드폰으로 차민재와 메시지를 주고받던 재언은 저 멀리 보이는 폐공장을 눈으로 살폈다.
“히어로 지원은요?”
“아.”
때마침 도착한 차민재의 메시지를 확인한 뒤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제 애인이 알아서 잘 처리했어요.”
“애인이요?”
재언의 대답에 예차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연애에 관심이 많을 한창 대의 청소년답게 눈동자에 흥미가 가득 담겼지만, 지금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는 주제란 걸 아는지 꾹 참는 듯했다.
“네. 애인이 히어로-거든요.”
“아… 그러면 여기서 히어로들을 기다려야 하는 건가요?”
예차프는 잔뜩 겁에 질려 창백한 안색이면서도 품속으로 파고드는 동생의 어깨를 쓰다듬으며 의젓한 척했다. 그 모습은 영락없이 동생을 아끼는 형의 모습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거면 어떻게 하죠? 전 제 가족들을 위해 열심히 노력해 왔어요. 사람들은 나더러 천재라고 하지만, 사실 천재는 따로 있죠. 진정한 천재는 김(Kim)이에요.”
예차프가 제 품에 있는 동생을 끌어안으며 중얼거렸다.
“그가 점프 연습을 백 번 하면, 저는 천 번 정도 해야 하고, 그가 스핀을 열 번 돌면 저는 백번은 돌아야 했어요. 가족들이 있어서, 그 고된 훈련도 모두 이겨 내 왔던 건데…….”
“가족이 정말 소중한가 봐요.”
그의 얼굴이 지독하게 창백해지면서 눈에 물기가 고이기 시작했다.
“맞아요. 어머니가 사샤를 낳고 돌아가셨어요. 아버지는 우리 셋이서 열심히 살아 보자 하셨죠. 그런데 제가 아버지를 동경해 피겨를 배우고 싶다는 걸 가장 먼저 눈치채셨어요. 어머니 수술비로 집이 파산 직전이었는데 아버지는 선수 생활을 접고 막노동하면서 뒷바라지를 해 주셨어요.”
“아버지가 고생하시는 걸 아니까 더 열심히 훈련해 온 거군요.”
“네… 그렇게 해서 이제 대회 상금도 많이 타 오고 가정 형편에 숨통이 트이고 있는데 아버지가 집 안에서 실종되시다니…….”
폐공장 쪽으로 걸음을 옮기는 세 사람의 앞에 어두운 숲길이 나타났다. 재언을 선두로 숲길을 걸으며 대화가 계속해서 이어졌다.
“연습도 많고 대회도 많이 출전하는 동안 집에 들어갈 시간이 별로 없었겠네요.”
“그렇죠. 사샤에겐 좋은 형이 되지 못했지만… 그래도 셋이서 서로의 버팀목이 되어 주자고 늘 다짐했었는데…….”
점점 가까워지는 폐공장을 바라보며 걷던 재언이 문득 고개를 끄덕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아, 그 부분인가.”
“네?”
“아닙니다. 저기 공장이 보이네요. 히어로들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고, 안에는 무서운 빌런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어떻게 할까요. 계속 기다려 볼까요?”
예차프에게 질문을 던지면서 재언은 사샤를 내려다봤다. 예차프는 바빴고 집에 있는 날이 별로 없었다. 그리고 어린 동생은 보호자가 필요했다.
그는 아버지가 좋은 보호자의 역할에 충실했다고 굳게 믿었고 사샤의 온몸이 엉망진창으로 멍들고 내장까지 상했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사샤는 단란하고 화목하며 행복한 가정을 바라는 형의 바람을 망치고 싶지 않다며 입을 다물었다. 이대로 간다면 사샤에게 남은 길은 두 가지뿐이었다.
아버지의 폭력에 결국 숨이 멎던가, 아니면 아버지가 죽던가.
‘과연 당신이 어떤 선택을 할지 궁금하네요, 예차프. 부디 내가 나서는 일이 벌어지지 않길 잘 선택해 주길 바라요.’
순간 떠오른 생각에 재언은 멈칫했다.
‘이 정도는 아동 폭력범들을 향해 모두가 생각할 수 있는 거겠지?’
재언이 평범한 사람도 아동학대범을 찢어 죽이고 싶을 거라며 빌런같은 생각을 합리화했다. 그때 말없이 생각에 잠겨 있던 예차프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들어가서 확인하고 싶어요. 아버지가 여기에 있는 건 확실할까요?”
“무서운 빌런들이 있을지도 모르는데요?”
“몰래… 들어가서, 아버지만 구하고 나오면 되지 않을까요. 그리고 사샤, 넌…….”
아무리 안쪽이 위험하다고 해도 이런 외진 곳에 혼자 남겨 둔다면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그냥 안전한 곳에 두고 올 걸 잠시 후회하던 예차프는 다짐한 눈빛으로 재언과 눈을 마주했다.
“저랑 사샤는 들어가겠어요.”
그는 이곳에 있는 이가 얼마나 위험한 빌런인지도 모르는 듯했다. 히어로 영화를 너무 많이 봤거나 세상 돌아가는 물정을 잘 모르거나.
‘용감한 건지 아닌지…….’
어떤 쪽이든 마냥 좋지만은 않다고 생각하며 재언은 두 형제와 함께 열린 폐공장 안으로 들어갔다. 어둠이 깊게 깔린 건물 내부는 지금까지 살아 있는 전등이 깜빡거려서 시야가 오히려 더 어지러웠다.
“형… 나 무서워.”
“쉿, 괜찮아… 형이 있잖아.”
사샤가 울먹이며 예차프의 허리춤을 더욱 힘주어 끌어안았다. 재언은 넓은 로비를 지나 더욱 안쪽으로 걸어가는 동안 드는 기운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꼭 폐가 탐험하는 기분이네.’
이곳에 있는 빌런이 무섭지 않은 것과 별개로 담력 시험하는 것처럼 스산함이 짙게 깔린 분위기는 무서웠다.
재언이 달달 떨면서 먼지가 소복하게 쌓인 바닥을 발바닥으로 탁탁 쳤다. 날이 어두워져서 그런지 폐공장 안은 입김이 나올 정도로 추웠다.
“빌런이… 있는 걸까요? 아버지도 여기에?”
예차프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핸드폰을 꺼내 플래시를 켠 재언이 바닥을 비추며 유심히 살폈다. 곧이어 무언가를 발견한 듯 예차프를 불렀다.
“예차프 선수, 이쪽으로 와 보세요.”
“네?”
“여기 바닥에 성에가 꼈는데, 잘 보면 발자국이 있습니다.”
축축하게 젖은 먼지로 인해 발자국이 더욱 선명하게 보였다. 그 위로 다른 먼지가 쌓이지 않은 것으로 보아 누군가가 여기를 지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소리였다.
예차프가 작게 숨을 내쉬자 희미한 입김이 나왔다. 이곳으로 누가 지나간 것이라며 재언은 형제를 이끌고 은밀하게 이동했다.
사실 은밀하게 움직이는 건 빌런에게 들킬까 봐 겁에 질린 예차프와 이 상황이 그저 무서울 뿐인 어린 사샤뿐이었다. 재언은 발자국을 발로 비벼 없애며 움직이느라 걸음이 저절로 느려졌다.
그리고 세 사람은 발자국이 향하는 대로 기나긴 복도를 지나 도착한 어느 방 안에서 이레일을 발견했다.
“이레일!”
미동 없이 쓰러져 있는 이레일의 모습에 재언이 깜짝 놀라 그쪽으로 달려갔다. 혹시 죽은 건가 싶었지만, 다행히도 그는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살아 있었다.
운이 없었으면 동사했을지도 모르겠지만, 이레일이 누워 있던 자리에는 천이 깔려 있었다. 그리고 누군가 입었던 듯한 검은색 재킷이 그의 몸 위에 덮여 있었다.
재언이 추위로 언 그의 얼굴을 약하게 때리자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더니 그가 정신을 차렸다.
“여긴…….”
“아, 이레일 정신이 드십니까?”
“…신 선생님?”
“네네. 걱정했는데 다행히 눈을 뜨셨네요.”
“아.”
몸을 일으키려던 이레일은 어깨에서 떨어지는 재킷을 양손으로 쥐더니, 눈물을 후드득 떨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