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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근하는 빌런-266화 (266/324)

266화

“이레일, 괜찮습니까?”

눈을 뜨자마자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는 이레일의 모습에 재언은 깜짝 놀라 그의 어깨를 마구 흔들었다. 울고 있는 그의 안색이 지나치게 창백했던 것도 걱정스러웠다.

“네… 괜찮습니다. 신 선생님께서는 여기 어떻게…….”

고개를 내저으며 정신을 차리던 이레일은 재언을 바라보다가 그의 뒤로 보이는 두 형제를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시무시한 빌런의 본거지에 겁도 없이 찾아온 일반인들을 본 그의 얼굴이 한층 더 나빠졌다.

“대체 이게 무슨? 신 선생님?”

“아… 아버지가 걱정된다고 막무가내로 따라오려고 해서요.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대로 뒀다간 어디로 가 버릴지 몰라서……. 저도 처음엔 여기까지 들어올 생각은 아니었어요.”

만약 사샤에게 가해진 학대를 모른 채 왔다면 재언은 밖에서 히어로들을 기다리다가 상황을 봐서 체어맨에게 그냥 도망가라고 명령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재언은 아무리 부모라도 자식에게 폭력을 행사하거나 아이의 인생을 마음대로 주무를 권리는 없다고 생각해 왔다. 지금 상황에서 드레고프는 엄연히 가해자이며 사샤는 피해자였다.

그리고 이 문제는 사샤와 그의 또 다른 보호자인 예차프가 선택해야 할 몫이었다. 그랬기에 재언은 차민재에게 부탁해 지원 요청을 취소하게 만들었다.

“…습격을 받고 잠시 정신을 잃었습니다. 부끄럽네요… 여긴 위험하니까 일단 나가서 상황을…….”

“아버지는요? 아버지는 찾았나요? 무사합니까?”

이레일이 정신을 차리는 듯하자 재언의 뒤에서 안절부절못하며 기다리던 예차프는 기다리지 못하고 성급하게 물었다. 그에 이레일은 대답을 머뭇거리다가 침통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네… 드레고프 씨는 찾았습니다. 그런데 제 힘이 모자라 그를 구하지 못했어요. 여기에 있는 빌런은 악명 높은 다크 카오스의 여덟 자식 중 한 명인 체어맨입니다.”

그러니 어서 이곳에서 나가야 한다고 예차프를 설득하기 위해 말을 고르느라 이레일이 잠시 뜸을 들였다. 하지만 아버지를 찾았는데 다시 놓쳤다는 말은 효심 지극한 이를 더욱 자극할 뿐이었다.

예차프는 커다란 눈망울에 눈물이 고이더니 흐르기도 전에 뒤돌아 달려 나갔다. 이레일이 그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깜짝 놀라 잡으려 했지만,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이미 문을 열고 나가서 어두운 복도 속으로 사라져 버린 뒤였다.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난 이레일은 그의 뒤를 쫓아 허겁지겁 달려 나갔다. 그런 두 사람의 뒷모습을 멀뚱히 쳐다보다가 따라 나가려고 하는 사샤의 어깨를 재언이 잡았다.

“형…….”

“얘야. 잠시 기다리렴.”

사샤는 형을 따라가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자신의 어깨를 잡은 손을 털어 내지 못했다.

어둡고 먼지로 가득한 폐공장에서 보호자를 잃고 떨어진 것에 대한 공포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보다도 자신의 뒤에 있는 이가 무척이나 무서운 사람이라는 걸 어린아이의 본능적인 직감이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폐공장 안은 서리가 고드름처럼 얼음이 맺혔다가 물방울로 떨어지는 소리만 울려 퍼졌다.

옛날에 형이 들려주었던 괴담이 떠올랐다.

“어두운 길을 걷다 보면 괴물이 나오는데 그 괴물은 평범한 남자의 모습을 하고 있댔어. 그 남자가 뒤에서 널 불러도 절대로 대답해도, 뒤돌아봐도 안 돼. 쫓아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도 뛰면 안 돼. 그냥 평범하게 지나가야 해. 아니면 그 괴물이 널 잡아갈지도 몰라.”

하키를 좋아하는 용감한 남자아이인 사샤는 형이 들려준 괴담에 괜찮다고 무섭지 않다며 호기롭게 대답했었다. 하지만 괴담을 들은 이후로 며칠 동안 혼자 걷고 있을 때 사람이 지나가면 저도 모르게 걸음이 빨라졌다.

이제 괜찮아졌다고 생각했는데 그 괴담 속 괴물이 뒤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주 기분 나쁜 어둠이 끈적하게 어깨를 타고 흐르는 기분이었다.

“히잉…….”

결국, 사샤는 무서움에 눈물을 글썽거렸다. 거기다가 지금은 한 명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뒤에 서 있는 듯했다.

어린아이의 직감이라는 건 때론 매우 정확했다. 이레일이 예차프를 잡기 위해 따라 나가자마자 재언의 뒤로 체어맨이 모습을 드러내 공손하게 서서 고개를 숙였고 엔레이드맨이 뚱한 표정으로 허공에 둥둥 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폐공장 안으로 재언과 두 형제가 들어온 순간 체어맨은 불청객이 또 찾아왔다며 모습을 드러내려 했었다. 이번에야말로 불청객들을 용서하지 않고 잔뜩 혼쭐을 낼 작정이었다.

하지만 형제들이 폐공장의 분위기에 압도당해 정신이 팔린 사이 고개를 든 재언과 눈이 마주쳤다. 이윽고 재언의 푸른 눈동자와 눈이 마주친 체어맨은 방금까지 보이려고 했던 위엄과 무서운 모습은 내팽개치고 뒤돌아 도망쳤다.

예차프 형제와 이야기를 나누는 입술은 웃고 있었지만, 그의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위대하신 우리의 아버지, 이런 누추한 곳까지…….”

체어맨이 뒤에서 말을 걸었지만, 재언은 어깨가 잡혀 와들와들 떠는 사샤에게 정신이 팔렸다.

“애가 왜 이렇게 겁에 질렸지?”

아이의 훌쩍이는 소리에 재언은 잔뜩 당황해서 뒤에 있는 두 사람에게 물었다.

뛰어나간 두 사람과 사샤를 떨어트리려는 계획이 있었기에 잘됐다 하는 마음으로 어깨를 잡은 건데, 아이는 마치 괴물에게 잡힌 것처럼 굴고 있었다.

체어맨과 엔레이드맨은 서로 눈짓을 주고받다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아무래도… 사방이 어두워서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게다가 위대하신 아버지의 위압감은 어린 꼬마가 감당해 낼 것이 아니죠…….”

재언은 엔레이드맨의 말을 항상 했었던 찬양 정도로 생각하며 손사래를 쳤다.

“내가 한 게 뭐 있다고 위압이니 공포니……. 사샤가 어떻게 그걸로 겁을 먹겠어.”

가볍게 생각한 재언이 사샤를 품에 안고 들어 올렸다. 그러자 아이는 거의 경기를 일으키는 듯 크게 울음을 터트렸다.

더욱 커진 울음소리에 재언은 허둥지둥거리며 안절부절못하는 표정을 지었다.

“여기가 그렇게 무서웠나? 하긴, 일반 성인이 와도 무서울 만하긴 한데……. 형이랑 헤어져서 그래? 곧 만나게 될 거야! 근데 지금 당장은 아니니까 일단 뚝 그치고…….”

“…….”

“…….”

그 광경을 바라보며 체어맨과 엔레이드맨은 아이가 폐공장이 무서워서 우는 게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별다른 말을 하진 않았다.

재언은 우물쭈물하며 사샤의 등을 토닥였다. 그럼에도 아이가 잔뜩 겁에 질려 영 울음을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자 옆으로 다가온 체어맨에게 넘겨주었다.

겉모습만으로 사람을 판단하면 안 된다는 건 알지만, 비정상적인 키와 팔다리의 길이를 가진 체어맨의 모습에 사샤가 더욱 울어 젖히면 어쩌나 걱정스러웠다. 그런데 아이는 울기는커녕 오히려 진정되어 울음을 멈추고 코를 훌쩍였다.

체어맨에게 밀린 기분에 은근히 충격받은 재언이 잠시 비틀거렸다. 그런 아이를 유심히 바라보던 엔레이드맨이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이 아이… 감이 좋군요.”

“그래?”

“죽을 뻔해서 그런지 감이 매우 좋습니다. 어쩌면… 조금만 더 욕망을 강하게 가진다면 능력자로 각성할 수도 있겠군요.”

엔레이드맨은 사샤에게 향한 시선을 떼고 재언을 향해 고개 숙였다.

“그러니 위대하신 아버지께 공포심을 갖는 건 당연한 일. 아버지의 위대한 힘을 눈치채고 겁에 질린 것입니다.”

그에 재언이 질린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됐다니까……. 그런 허풍은 필요 없어.”

재언의 말에는 순순히 따르는 편인 엔레이드맨이 드물게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재언은 고개를 돌려 체어맨에게 물었다.

“이 애. 누군지 기억하지?”

“네. 기억한답니다. 제가 가둔 사냥감의 가련한 자식이군요.”

신사다운 자세로 아이를 달래며 정중하게 대답하는 체어맨의 눈동자에 동정은 보이지 않았다. 사실 그는 자신이 가진 증오의 원흉인 부모와 똑같은 짓을 저지르는 이들을 잡아다 고문하는 것, 그 외에는 별로 흥미가 없었다.

다시 말해 부모가 사라진 뒤 남아 있는 자식을 연민하거나 불쌍하게 여기지 않다는 뜻이다. 그것이 체어맨이 히어로가 아닌 빌런으로 규정된 이유였다.

“맞아. 그리고 방금 튀어 나간 남자가 이 애의 친형이야. 그리고 네가 납치한 아버지를 찾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이곳까지 쳐들어왔지.”

“과연… 그런 자식 앞에서 가죽을 한 꺼풀씩 벗기면… 아비의 얼굴이 얼마나 흉하게 일그러질지… 상상만 해도 오싹하는군요.”

체어맨은 면사포 너머로 잇몸이 드러날 정도로 활짝 웃었다.

“아니…….”

그래도 일단 그의 기분 나쁜 상상은 막고 싶었다.

“이 애는 너무 어리니까 형에게 선택하게 할 거야.”

“오호… 그렇다면 아버지, 만약 저자의 선택이 아버지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제가 말한 대로 처리해도 될지요.”

체어맨이 기다란 팔로 사샤의 몸을 조금 더 힘주어 끌어안았다. 재언은 이레일의 후드에 숨은 조각난 장난감의 눈알을 통해 두 사람의 상태를 확인하면서 대답했다.

“마음대로 해.”

그러자 세상을 공포에 떨게 하는 빌런, 체어맨이 기분 나쁘게 웃었다. 신재언의 시험대에 오른 두 사람이 조각난 장난감의 능력으로 방 안에 비쳤다.

.

.

.

“예차프! 멈추세요!”

식은땀을 흘리며 힘겹게 따라간 이레일은 예차프의 어깨를 잡았다. 그제야 예차프가 강제로 걸음을 멈추었다.

폐공장은 공기가 얼어붙을 정도로 서늘했지만, 두 사람은 주변 기온에는 아랑곳없이 더운 숨을 내뱉었다. 이레일은 지금 이곳에 자신과 예차프 단 둘뿐인 것을 확인하며 연신 뒤를 힐끔거렸다.

“…여긴 위험합니다. 돌아가도록 해요. 다른 두 사람과 너무 멀리 떨어졌어요.”

그제야 이성이 돌아왔는지 동생을 떠올린 예차프가 황급히 돌아가는 이레일의 뒤를 따랐다.

그런데 그들이 계단을 올라 신재언과 사샤가 있었을 곳으로 되돌아가 문을 활짝 열었지만,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분명히 복도에 있다가 문을 열고 들어왔는데 다시 문을 통해 나가니 보이는 건 복도가 아니라 거미줄이 자욱한 홀이었다.

그리고 다른 문을 열어 보자 이번엔 1층의 어느 허름한 다른 방이 나왔다. 기계로 가득하고 먼지가 뽀얗게 쌓여 찌든 기름 냄새가 나는 방이었다.

또 문을 열자 이번엔 6층 높이 건물의 옥상이었다.

겁에 잔뜩 질린 예차프를 뒤로하고 옥상으로 한 걸음 내디딘 이레일이 나직하게 읊조렸다.

“우리는 이미 함정에 빠졌습니다……. 이건 체어맨의 ‘절망의 미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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