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7화
버드맨이 능력을 각성하기 전, 그러니까 귀신들의 성녀가 막내였을 때의 일이었다. 사건의 발단은 어느 호기로운 히어로의 발언 때문이었다.
A급 방어 계열 히어로인 그는 그 당시에 가장 능력 있고 인기가 많았다. 사무실을 따로 차리지 않은 그에게 히어로 협회를 비롯한 다른 히어로 관련 업종에서 수많은 러브콜을 보낼 정도였다.
특히 대한민국의 능력자 대부분이 공격에 특화되어 있고 S급 히어로들마저도 방어보단 공격형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다 보니 방어 계열을 비롯한 버프, 무력화 계열 능력은 S급이 아니더라도 항상 좋은 대우를 받았다.
그중에서도 방어 계열 능력자들은 급이 좀 낮아도 기업에서도 총수의 경호를 위해 거액의 연봉을 제시하고 데려갈 정도였다. 그러니 적은 금액이나 받으며 일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그런 의미에서 A급 히어로인 금성철벽의 방패는 자신을 떠받드는 주변의 반응에 날이 갈수록 성격이 기고만장해졌다.
어린 나이에 얻은 A급 히어로라는 명성이 그에게 독이 된 것일까. 그는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고 뽐내는 걸 좋아했다.
항상 S급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며 기세등등했다. 물론 그가 나이가 들어 연륜이 쌓이고 자신의 힘과 능력에 겸손함을 가졌다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나쁘지 않은 외모 덕분에 TV 프로그램에도 간간이 출연했는데, 불행하게도 어느 한 프로그램에서 입을 잘못 놀린 게 화근이었다.
연예인들이 나와 캠핑을 즐기며 수다 떠는 어느 예능 프로그램에 초대받아 게스트로 참가해 자신의 무용담을 늘어놓을 기회가 생겼다.
수다로 한창 분위기가 무르익어 갈 때쯤 자신을 우러러보는 스텝들과 감탄하는 연예인들의 시선에 취했다. 그리고 어느 하급 빌런을 잡고 온 덕분에 영웅심으로 잔뜩 도취한 그가 입을 열었다.
“다크 카오스의 일곱 자식 중 가장 약한 건 체어맨입니다.”
그의 말을 듣던 패널들이 숨을 들이켜며 눈동자를 굴렸다.
사실 이런 예능에서 S급 히어로를 섭외하는 건 출연료 때문에 힘들었고 A급 히어로 이하의 무용담이라 봤자 그저 그런 빌런들을 제압하고 인질들을 구출해 낸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극적이고 감동적인 내용을 연출할 수 있었기에 별문제는 없었다.
그런데 금성철벽의 방패가 히어로들 사이에서도 금기시되고 있는, ‘불러서는 안 되는 빌런들’을 언급하고 말았다.
“조각난 장난감은 다크 카오스의 눈과 귀가 되어 주니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죠. 하지만 체어맨은 능력이 독특할 뿐, 강한 건 아닙니다. 그는 나 혼자서도 이길 수 있어요.”
캠핑장은 부대찌개 끓이는 소리와 테이블 위, PPL로 보이는 맥주에서 탄산이 터지는 소리만 울렸다.
그 방송이 나간 이후 당연히 체어맨이 나섰다. 어린 히어로가 도발한 것 때문은 아니었다.
“감히 위대하신 아버지의 명예를 깎기 위해 저를 조롱하다니. 그냥 넘어갈 수 없군요.”
체어맨이 기분 나쁜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날 이후 체어맨을 이길 수 있다고 호언장담했던 A급 히어로 금성철벽의 방패는 히어로 계를 은퇴했다. 그때 활약했던 체어맨의 필살기가 바로 ‘절망의 미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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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금성철벽의 방패가 무엇을 보고 무슨 짓을 당했는지는 여전히 의문에 싸여 있습니다. 분명한 건, 이 ‘절망의 미로’에서 아주 끔찍한 걸 봤다는 것입니다.”
말의 내용과는 상관없이 이레일은 겁에 질린 일반 시민을 최대한 진정시키려는 듯 차분하게 설명을 이어 갔다.
그는 멋대로 움직여 자신까지 위험에 빠트린 예차프를 나무라거나 탓하지 않았다. 예차프의 아버지를 눈앞에서 놓친 죄책감으로 최선을 다해 예차프를 챙기는 중이었다.
자신과 나이 차이는 얼마 나지 않지만, 예차프는 아직 미성년자였고 또한 비능력자였다. 그의 섣부른 행동을 비난한다고 해도 상황이 나아지지 않을 테니 일단 여기서 안전하게 탈출한 뒤에 혼내는 게 맞았다.
“체어맨의 ‘절망의 미로’는 알려진 바 없는 능력입니다. 중요한 건 섣불리 움직였다간 미로에서 영원히 빠져나갈 수 없다는 것이죠.”
예차프는 이레일의 설명을 들으며 어둠이 짙게 깔린 복도 끝을 바라보았다.
오싹한 찬 기운과 공포심에 소름이 돋아 연신 팔을 쓸어내렸다. 얼굴은 동생 사샤가 걱정되는 마음까지 뒤섞여 초조한 표정으로 가득했다.
“일단 신 선생님도 계시니까……. 동생분은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그분은 정말 대단한 사람입니다.”
“비능력자잖아요.”
“비능력자는 아닙니다. ‘럭키 가이’시거든요.”
“그렇게 운이 좋아 보이진 않았는데요.”
안 그래도 요즘 재언이 ‘럭키 가이’능력이 퇴화하는 거 같다고 걱정하긴 했다.
“다음에 있을 능력자 적합 검사에 떨어질까 봐 걱정이에요. 능력자 연금을 못 받게 되면 어떡하죠?”
이레일은 쓴웃음을 지으며 주변에 굴러다니는 더러운 천을 주워 왔다. 방수포인지 겉이 매끄럽고 일반 천과는 다르게 빳빳했다.
먼지를 대충 털어 내고 그 위에 앉자 예차프도 눈치를 보며 그의 옆에 조용히 앉았다.
“히어로님, 정말 죄송합니다……. 아버지가 여기 있다는 게 확실해지니까 구하고 싶다는 마음에… 저 때문에 위험해지기까지 하고… 영화에서 그런 캐릭터들을 욕하고 다녔는데 막상 그게 제가 되었네요. 그저 죄송한 마음뿐이에요.”
예차프가 팔로 머리를 감싸 쥐며 고개를 푹 숙였다. 그의 목소리가 자괴감으로 기어들어 갈 듯 작아졌다.
“그만큼 아버지가 소중한가 봐요.”
“네.”
간결하게 대답한 뒤 뜸을 들이던 예차프는 어떻게든 마음을 기댈 곳을 찾아 주절주절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아버지 걱정을 많이 하셨어요. 선수였던 아버지는 집이 너무 가난한 데다 막내여서 꿈을 포기해야만 했거든요. 이쪽은 돈이 많이 들어서… 그래서 아버지는 결혼하고 제가 태어나자마자 꿈을 모두 포기하셨대요.”
말하다 보니 목이 멘 듯 잠깐 말을 멈추고 훌쩍였다.
“그리고 제게 지원을 아끼지 않으셨어요. 막노동으로 몸을 다 상해 가면서… 제 꿈을 응원해 주셨다고요……. 어머니도 아버지를 잘 부탁한다고…….”
급기야 눈물을 줄줄 흘렸다. 그런 예차프의 어깨를 토닥이던 이레일은 갑자기 귓가에 꽂히는 이상한 소리에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원을 넘어선 소리까지 예민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그는 급하게 예차프를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들어온 문의 반대 방향에 있는 문을 열었다.
“무언가 옵니다. 그런데 소리가 심상치 않아요. 일단 저걸 피해서 도망칩시다.”
그런데 옥상에서 문을 열고 나가니 2층 복도가 나왔고, 그곳에서 다시 나오니 4층 화장실이 나왔다.
그렇게 몇 번을 반복하다 지칠 대로 지쳐 잠시 쉬고 있었는데 그런 그들을 채근하듯 또다시 심상치 않은 걸음 소리가 들렸다.
예차프를 데리고 문을 열고 도망가던 이레일은 이 미로 같은 곳에서도 일정한 규칙으로 방을 지나치고 있다는 의심이 들었다.
폐공장의 규모는 제법 크고 무수히 많은 방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들은 1층에서 3층, 5층 복도, 4층 화장실, 옥상, 2층 복도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걸 알아차린 건 이레일이 음파 능력자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게다가 일정한 움직임으로 그들을 향해 다가오는 괴생명체는 마치 이곳 미로의 파수꾼 같은 역할을 하는 듯했다.
이레일은 예차프의 손목을 잡고 이번엔 반대 방향의 문을 열었다. 그러자 보이는 건 방금 지나쳐 왔던 방들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 나왔다.
‘역시 똑같아. 1층과 3층을 지나면 5층 복도이고 4층 화장실을 지나면 옥상. 그런데 방금 우리가 있던 곳이 3층이었는데 반대쪽 문을 여니 옥상이네.’
이레일은 곧바로 ‘절망의 미로’가 가진 규칙을 파악해 냈다. 이곳은 주변의 음파와 진동을 조종하고 느낄 수 있는 이레일을 위한 공간이나 마찬가지였다.
“예차프, 4층 화장실이 나올 때까지 달려요!”
손목을 잡은 그대로 두 사람은 혼신의 힘을 다해 달렸다. 옥상이 지나고 다시 1층이 나왔다. 이번에도 들어왔던 문을 다시 열자 5층 복도가 보였다.
그곳을 지나쳐 반대편 문을 열자 4층 화장실이 나왔다. 어둡고 축축한 데다 냄새까지 심상치 않아 제대로 들어가지도 않고 빠르게 빠져나왔던 곳이었다.
이레일은 양쪽으로 3칸과 4칸이 있는 화장실 안의 총 7칸들을 노려봤다. 그리고 왼쪽 두 번째 칸을 열자 그곳엔 더럽고 낡은 변기가 아닌, 좁은 통로가 있었다.
“대체 어떻게 찾았어요?!”
“간단해요. 1층과 3층은 방이고 5층은 복도였어요. 4층은 화장실, 나머지는 옥상이었잖아요. 반대로 돌면 3층으로 돌아가고요. 진동을 내보냈을 때 우리가 지났던 방향이 꼭 어디를 중점으로 두고 뱅글뱅글 돌아가는 듯했습니다. 그 중심이 바로 여기 4층 화장실 두 번째 칸이에요.”
이레일은 예차프가 이해하기 쉽도록 물기 가득한 화장실 벽에 폐공장 내부를 그려 준 뒤 방과 방을 이어 동그라미를 그렸다.
미세한 방 안의 진동을 통해 알아낸 사실이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절대로 느낄 수 없을 것이다.
두 사람이 좁은 통로를 통해 걸어 나가자 그 끝엔 한 사내가 의자에 느긋하게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마치 이레일이 이곳에 올 것이라고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게다가 그의 발치에 신재언이 쓰러져 있었고 사샤는 기다랗게 생긴 괴인의 팔에 안겨 있었다.
“안녕하세요. 너무 늦어서 슬슬 찾으러 가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거든요.”
이레일은 미국과 전쟁을 치르게 할 뻔한 눈물 보석이 박힌 피에로 가면이라는 걸 바로 알아봤다. 그것만으로도 의자에 앉은 그가 다크 카오스라는 걸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이런 곳에서 다크 카오스가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기에 몸을 잔뜩 굳혔다. 히어로 인생에 세계 최고의 빌런 다크 카오스를 만나는 것이 일평생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재해라고 했는데 자신은 총 두 번이나 마주친 셈이다.
이레일의 뒤에 있던 예차프는 눈앞에 있는 거대 빌런들을 알아보지 못하고 동생을 보자마자 비명을 질렀다.
“사샤!”
“쉿. 거기까지… 더 이상 가까이 오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다크 카오스가 신재언의 어깨를 꾸욱 밟으며 경고했다. 그러자 깜짝 놀란 이레일이 얼른 예차프의 어깨를 끌어당겼다.
기절한 채로 두 팔이 뒤로 묶여 뒷모습밖에 보이지 않는 신재언이 걱정스러웠다.
‘그래! 가까이 오지 말라니까. 하마터면 인형이 가짜라는 게 들킬 뻔했잖아……. 휴… 놀랐네, 정말.’
다크 카오스, 즉 진짜 신재언은 가짜 인형 신재언의 몸이 돌아가는 걸 발로 잡아 막으며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