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근하는 빌런-268화 (268/324)

268화

처음에는 이런 짓까지 해야 하나 싶었는데 사샤를 보여 주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사샤와 함께 있던 재언이 사라진다면 묘하게 눈치가 빠른 이레일이 수상하게 여기거나 그를 찾는다며 일을 더 복잡하게 만들 가능성이 컸다. 그래서 일부러 비슷한 체구의 인형을 들고 와 뒷모습만 신재언처럼 꾸민 뒤 놓아두었다.

그런데 이레일과 예차프의 발소리가 들리자 인형의 몸이 슬금슬금 돌아가는 바람에 재언이 당황해서 발을 쓴 게 문제였다.

인형의 몸이 돌아가지 않도록 고정하려는 생각으로 한 행동인데 이레일의 표정이 장난 아니게 무서웠다. 그렇다고 ‘신재언X’가 들통날까 봐 발을 뗄 수도 없었다.

‘나도 처음 계획대로 두 형제를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키는 게 훨씬 빠르고 편하게 일을 끝낼 수 있어서 좋았단 말이야…….’

하지만 그러기엔 사샤에게 가해진 학대가 너무나도 심각했다. 이건 그들의 아버지만 처리한다고 끝날 문제가 아니었다.

사샤의 임시보호자가 될 형 쪽이 아버지를 무척이나 소중하게 여기고 있다는 점이 가장 신경 쓰였다.

‘나중에 학대 정황이 드러나더라도 아버지가 무고하게 죽었다고 생각하면 어린 동생에게 무슨 짓을 할지 누가 어떻게 알아?’

드레고프는 예차프에겐 한없이 자비롭고 희생하는 아버지지만, 사샤에겐 자신을 화풀이 대상으로 여기는 학대범일 뿐이었다.

형은 아버지를 찾고 싶어 하고 동생은 아버지가 없어서 다행이라고 여긴다. 그런 태도의 간극이 훗날에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아무도 모른다.

‘물론 그럴 사람으로 보이진 않지만… 이 세상에 범죄자처럼 생긴 범죄자는 많지 않아.’

그런 생각 때문에 재언은 결국 일반인은 가급적 휘말리지 않게 하자라는 자신만의 룰을 깼다. 게다가 애인에게 연락해 러시아 히어로 협회에서 나서지 못하도록 막기까지 했다.

‘…피가 이어진 사람과 사는 게 가장 좋은데……. 체어맨이 납치했던 부모들은 대부분 자신이 당하는 폭력에 굴복할 뿐 반성 따위 하지 않았어. 예차프가 훌륭한 사람이라고 굳게 믿는 그의 아버지도… 미안하지만 사샤에게만큼은 갱생의 여지가 없는 사람이야.’

한 가정 내에서 훌륭한 아버지와 폭력적인 아버지가 공존하는 상황이다. 만약 체어맨이 사샤의 아버지를 죽인다면 어떻게 될까.

예차프에게는 멀쩡한 가족을 잃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테니 사실이 드러나도 무척 혼란스러울 것이다. 그래서 재언은 예차프를 시험할 생각이었다.

“도, 동생을 놓아줘……! 아, 아버지도 당신이 납치한 거지?! 이런 짓을 해서 재밌어? 뭐, 뭐가 재밌어서 웃는 거야?!”

체어맨의 품에 안겨 있는 사샤를 본 예차프가 필사적으로 소리쳤다. 참으로 눈물겨운 형제애였다.

누가 봐도 수상해 보이는 빌런에게 잡힌 어린 동생이 다칠까 봐 힘겹게 용기 낸 형의 모습이었다. 비능력자치고는 깡도 있고 용감했다.

다만, 눈앞의 빌런들이 누구인지 아는 이레일은 기절할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사샤와 신재언을 인질로 삼은 빌런 다크 카오스를 자극해서 좋을 게 하나 없었다.

냉기가 흐르는 듯한 눈물 보석이 박힌 가면은 미국의 능력 있는 세공사를 납치해서 만든 것답게 위엄이 가득했다.

“위대하신 아버지께서 말씀하시는데 정말 시끄럽군.”

갑자기 앞으로 나선 어린 소년의 모습에 예차프는 깜짝 놀라 몸을 굳혔다. 그는 부루퉁한 얼굴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소년의 나이가 이제 열세 살 정도로 어려 보인다는 점에 깜짝 놀랐다.

물론 이레일이나 예차프가 발육이 좋은 다른 러시아인들에 비해 어려 보이는 편이었기에 상대방의 나이를 더 어리게 보는 경향이 있었다. 그 때문에 아무리 엔레이드맨의 육체 나이가 열여섯 정도여도 예차프에게는 열세 살의 어린 소년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팔짱을 낀 채 허공에 앉아 공중에 둥둥 떠 있는 소년의 눈동자에 불쾌함이 어렸다. 이레일은 그를 보자마자 저 소년이 바로 다크 카오스의 장남 엔레이드맨이라는 걸 깨닫고 예차프를 끌어당겨 자신의 뒤에 숨겼다.

“다… 당신들이나 되는 사람들이 이런 어린 소년을 데리고 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겁니까, 다크 카오스… 그것도 레드-헬-파이어의 파트너를 인질로 붙잡기까지 하고.”

재언은 속으로 몇십 번 정도 심장이 벌렁거렸지만, 티 내지 않으려고 가면 안에서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이레일의 앞에서 이런 식으로 쇼를 벌이는 건 내키지 않았는데 그래도 평범한 생활을 놓치고 싶진 않았다.

팔짱을 끼고 자꾸 몸이 돌아가려는 ‘신재언X’의 어깨를 밟아 고정하면서 이레일의 질문에 착실히 대답해 주었다.

“음… 나는 그냥 불쌍한 어린아이를 두고 볼 수만은 없었던 것뿐이에요. 히어로와 경찰이 제대로 일하지 않아서 내가 나선 것뿐이라고요? 난 좀 억울한데. 애초에 피해자들을 잘 보호하고 피해에 대한 보상을 제대로 했다면 우리가 범법행위를 저지르진 않았을 거라고요.”

재언은 다른 누구보다도 죄를 지은 사람이 법의 심판을 받는 게 가장 옳다고 여기는 사람이었다. 정부 기관이 제대로 처리하고 피해자들을 보호한다면 이 얼마나 바람직할까.

하지만 법의 사각지대에서 부당한 일을 당하는 사람은 여전히 존재했고 피해자들이 피눈물을 쏟을 때 가해자들은 더욱 잘 살고 뻔뻔하게 지내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법의 눈치를 받지 않는 그의 자식들이 그런 가해자들을 처단한다는 명목으로 움직인다는데 재언은 굳이 말릴 필요성을 찾지 못했다.

거기다가 재언이 일반인들에게 피해가 가는 걸 싫어한다는 걸 자식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것까지도 고려하면서 세력을 키워 나가는 중이었다.

하지만 재언은 정말로 억울했다.

“지금 이 사건과 그 이야기가 무슨 관련이 있습니까?”

역시 눈치가 빠른 이레일이 잔뜩 긴장한 채 질문을 던졌다. 사실 이레일은 후들후들 떨려 오는 다리를 필사적으로 감추고 있었다.

다크 카오스는 어딘가 피폐하고 어둡고 사람을 지배하는 분위기를 가진 남자였다. 정의할 수 없는 어둠을 눈앞에 목도한 느낌이었다.

그가 가진 위압감은 평범한 사람이 절대로 견뎌내지 못할 것이다. 실제로 예차프도 다리에 힘이 풀리는지 풀썩 주저앉아 버렸다.

그런 이레일의 속마음과는 반대로 재언은 예차프와 사샤의 일뿐만 아니라 체어맨과 이레일의 눈치까지 보느라고 아주 죽을 맛이었다. 체어맨을 눈앞에 두고도 이레일의 반응이 영 껄끄럽고 미지근한 것이 무슨 일인지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대체 둘 사이에 뭐가 있었는지 지금 상황에서 직접 물어볼 수도 없고 자신은 끼어들 수 없는 둘만의 관계에 개인사인지라 가만히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둘의 분위기가 왠지 모르게 찝찝해서 눈알을 굴리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어휴, 모르겠다. 일단 사샤의 일이 더 급하니까 이쪽을 먼저 수습해야겠지. 일단 나중에 알아보기로 하고… 체어맨은 이레일 쪽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눈치고…….’

대충 생각을 정리한 재언이 이레일의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이레일과 예차프의 발밑이 쑥 꺼져 밑으로 추락했다.

“헉!”

분명히 꽤 깊게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는데 몸이 멀쩡했다. 다만, 방금까지 있었던, 어둡고 먼지로 가득했던 폐공장이 아니라 좁지만 제법 안락한 가정집 복도가 눈앞에 나타났다.

이레일은 옆에 있는 소파를 짚으며 엉거주춤 일어났다.

“여긴…….”

“아는 곳입니까?”

자신의 몸을 이곳저곳 쓰다듬어 다치진 않았는지 확인한 예차프가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네… 여긴 우리 집이에요.”

두 사람이 떨어진 곳은 예차프와 사샤가 살던 2층짜리 작은 집이었다. 1층에 거실과 주방, 다용도실이 있었고 2층에는 서재와 각자의 방이 하나씩 있었다.

그중에서 가장 작은 방이 예차프의 방이었다. 평소에 훈련으로 나가 있는 시간이 많기에 자신의 넓은 방을 사샤에게 양보한 것이다.

“…왜 우리가 여기에 있죠? 우리 집이라니? 여기가 실제로 우리 집이 맞는 거예요?”

혼란스러운 얼굴로 복도에 있는 익숙한 장난감 상자를 발견하고 집어 든 예차프가 주변을 둘러봤다.

“위층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요.”

이레일의 말에 귀를 기울이니 실제로 위층에서 무언가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예차프가 하얗게 질리자 이레일이 그를 뒤에 숨기고 앞장서서 계단을 올랐다.

관리가 잘 되어 있어 집 안은 깨끗했지만, 워낙 낡은 집이라 계단을 오르니 삐거덕대는 소리가 귀를 거슬리게 했다. 2층으로 올라와 둔탁하게 들리는 소리가 들리는 어느 방 앞으로 가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 보이는 것은 끔찍한 몰골로 피투성이가 된 예차프의 아버지, 드레고프가 무언가를 주먹으로 열심히 때리는 광경이었다.

분명히 때리는 건 드레고프인데 그가 주먹질할 때마다 그의 몸에서 피가 튀어나와 바닥에 흩뿌려졌다.

“아버지!”

비명을 지르며 방 안으로 들어가려는 예차프를 막아 세우고 이레일은 드레고프의 행동을 유심히 살폈다.

드레고프는 자신의 체구보다 반 정도 되는 크기의 제법 큰 사람 모양 인형을 때리는 중이었다. 주먹으로 인형의 복부나 얼굴을 가격하고 발을 사용하기도 했다.

“뭐 하는 거지?”

“아버지! 왜 그러세요? 맙소사. 그, 그 빌런들이 무슨 짓을 한 게 분명해요. 제발 아버지를 말려 주세요. 저렇게 심하게 상처를 입어선…….”

아버지의 참혹한 모습에 예차프의 눈에 눈물이 글썽거렸다. 그의 아버지는 끊임없이 무슨 말을 중얼거리면서 어린아이만 한 인형에 폭력을 멈추지 않았다.

능력을 사용해 주변의 음파와 진동을 느낀 이레일은 이곳이 결계 안이나 빌런들이 만들어낸 환각이 아니라 실제 예차프의 집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그러는 동안 예차프의 아버지가 인형의 머리를 한 손으로 쥐어 들어 올렸다.

“사샤… 왜 이 아버지를 슬프게 하는 거냐. 왜 넌 형처럼 될 수 없어? 왜 사랑하는 아들에게 폭력을 행사하여야 하냔 말이다. 왜 널 사랑할 수 없게 만드니? 오, 사샤. 넌 정말 빌어먹게 나쁜 아들이야. 널 때리는 내 마음이 찢어질 것 같아. 이 악마 같은 것…….”

드레고프는 인형의 뺨을 손바닥으로 사정없이 때린 뒤 바닥에 사정없이 내팽개쳤다. 그것만으로도 부족한지 바지 벨트를 풀었다.

그런데 바닥에 쓰러진 인형이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구석으로 도망가더니 몸을 잔뜩 웅크렸다. 그 모습에도 아랑곳없이 벨트를 손에 쥔 드레고프가 인형의 등에 온 힘을 다해 휘둘렀다.

무언가 터지는 듯한 끔찍한 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인형에게 아무런 변화는 없었고 대신 드레고프의 등이 마치 무언가에 맞은 것처럼 새로운 상처가 덧나다 못해 터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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