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9화
“이게 뭐야? 왜… 왜 이런걸? 아버지, 지금 뭐 하는 거예요? 난… 난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어요.”
핏기 하나 없이 창백한 안색이 된 예차프가 인형을 때릴 때마다 본인의 몸이 엉망으로 변하는 아버지의 기행을 허망하게 쳐다보았다.
인형의 복부를 사정없이 발로 찬 드레고프는 내장이 상하기라도 한 것처럼 피를 토했다. 그 와중에도 그는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네 형에게 이 사실이 알려지면 우리 가족은 다 끝이야. 너 하나 때문에 우리 가족이 전부 절망에 빠질 거라고……. 너 때문에 난 지위도 아들도 잃겠지. 우리를 지탱해 주는 예차프는 가족을 잃게 될 거고 결국 다 잃고 말 거다. 너 때문에 형의 미래가 산산조각이 날 거다……. 너 같은 게 태어나지 않았다면 우린 행복하게 살 수 있었을 텐데……. 이 식충이… 더러운 놈…….”
“뭐하는 짓이냐니까요! 대체 아버지가 왜 저러는 거예요!?”
두 눈 뜨고 보기 끔찍한 광경에 예차프가 비명을 지르며 이레일에게 매달렸다. 차분하게 상황을 살피던 이레일이 인형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저 인형에 부적이 달려 있습니다……. 저건 귀신들의 성녀가 만든 저주받은 인형이군요…….”
이레일의 말이 끝나자마자 두 사람의 몸이 위로 쑥 올라갔다. 마치 보여 줄 건 다 보여 주었다는 듯 다시 두 사람은 폐공장의 방으로 돌아왔다.
느긋하게 턱을 괴고 있던 다크 카오스가 주의를 끌려는 듯 손뼉을 두 번 쳤다.
“잘 보셨습니까? 이제 짐작하셨죠? 그가 사샤를 학대하고 있었다는 사실을요.”
다크 카오스의 말에 이레일은 침묵했고 예차프는 비명 지르듯 소리쳤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아버지가 사샤를 학대할 리 없잖아!”
하지만 그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듯 다크 카오스의 말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난 그렇게 생각해요, 예차프. 무지는 죄라고요. 동생을 아끼는 형이라면서 동생이 학대당하다 못해 죽어 가고 있는데 그걸 몰랐다고요? 그건 관심이 없었다는 말이에요.”
신재언조차도 사샤를 만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학대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런데 그토록 오랜 시간 아버지에게 학대당해 온 사샤의 상태를 곁에 있으면서도 몰랐다는 건 결국 예차프는 동생에게 관심이 없었다는 소리였다.
신재언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그때, 마침 체어맨의 품에서 새근새근 자고 있던 사샤가 눈을 떴다. 재언이 손짓하자 체어맨이 순순히 사샤를 바닥에 내려 주었다.
자기 전과는 매우 다른 풍경과 분위기에 사샤는 두리번거리며 눈치를 봤다. 이내 다크 카오스와 눈이 마주치자 잔뜩 겁먹은 채 창백한 얼굴로 멍하니 서 있는 형에게 달려갔다.
“혀, 형!”
“…사샤.”
자신의 다리에 매달리는 사샤를 품에 안은 예차프는 동생의 몸에 다른 이상은 없는지 꼼꼼하게 살폈다. 그러다 문득 아이의 등이 지나치게 울퉁불퉁하다는 게 느껴졌다.
허겁지겁 상의를 들어 올려 살핀 그는 놀라서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사샤의 등은 온통 멍투성이에 둔탁한 무언가로 맞은 듯 쓸리고 갈라져 흉하게 자리 잡은 상처가 곳곳에 있었다.
예차프는 처음에 눈앞의 빌런들을 향해 너희들이 이 어린아이에게 폭력을 가한 것이 아니냐고 화를 내려 했다. 하지만 어리고 작은 몸 여기저기에 자리 잡은 흉터들은 세월의 흔적이 느껴졌다.
참담한 모습에 말문이 막혀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잘 보이진 않아도 노랗게 바랜 멍과 아직도 선명한 보랏빛 멍, 그리고 배와 가슴 쪽에는 아주 옛날에 당한 듯한 흔적들이 눈에 들어왔다.
예차프는 이 사실을 믿을 수 없어 필사적으로 부정했다.
“거짓말이야… 이 애는 사샤가 아니야……. 지금 나, 날 속이고 장난치기 위해 이런 짓을 벌인 게 분명해. 아버지를 찾아 헤매는 나를 속이려고… 빌런이란 것들은 그런 놈들이잖아.”
예차프가 돌연 고함을 치며 사샤의 어깨를 밀쳤다. 사샤는 밀쳐졌지만 넘어지지 않고 중심을 잡아 형에게 돌진했다.
아이는 옷 아래에 있는 흉터를 형에게 들켰을 때부터 커다란 눈망울에 눈물을 단 채였다.
“형! 미안해!”
“…….”
“형. 내가 미안해. 절대 들키지 말라고 했는데……. 내가… 들켰어. 나 때문에 이제 형이 끝난 거야? 내가 들켜 버려서… 우리 가족이 뿔뿔이 흩어져야 하는 거야? 미안해, 형. 이제 안 그럴게. 나 두고 가지 마!”
“…….”
아이의 입에서 두서없이 나오는 말을 듣던 예차프는 아연실색했다. 그가 떨리는 입술을 겨우 열어 사샤를 바라보며 질문을 던졌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미안해. 나… 나… 사실, 빌었어……. 너무 아파서, 한 번만 아빠를 제발 어디로 데려가 달라고… 기분 좋은 아빠를 다시 데려와 달라고… 빌었어. 근데 그거 진심이 아니야. 그냥, 거짓말로 바랐던 거였어.”
사샤가 눈물을 줄줄 흘리며 절대로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그럼에도 예차프는 지금 눈앞에 있는 동생이 사실 빌런들이 만들어 낸 가짜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예차프는 매달려 있는 사샤를 또다시 밀어냈지만, 아이는 뒤로 데굴데굴 나뒹굴었다가도 다시 일어서서 달려왔다.
“거짓말이야! 저 빌런들이 우리를 속이고 있는 거야! 그럴 리 없어. 그럴 리 없다고! 이건 가짜야. 아버지가 사샤를 학대할 리 없어!”
예차프가 찢어질 듯한 비명을 지르며 또다시 사샤를 밀어내려고 하자, 침통한 얼굴로 그들을 지켜보고 있던 이레일이 예차프의 어깨를 잡아 말렸다.
이레일은 점점 이성을 잃어 가는 예차프를 차마 위로하지도 못하고 다크 카오스를 노려보았다.
“이렇게 잔혹한 방법을… 당신이 원하는 건 대체 무엇입니까?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그의 아버지를 벌주면 되었잖아요. 아니, 애초에 당신에게 그들의 잘못을 벌할 자격이 있습니까?”
이레일의 날카로운 지적에 재언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신재언X’의 어깨를 고정하기 위해 밟고 있던 발의 위치를 살짝 고쳤다. 자세가 어정쩡해서 슬슬 허벅지에 무리가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재언X’를 발로 굴려 바닥에 엎드리게 하자 이레일이 움찔하고 떠는 게 보였다.
‘너네는 왜 놀라는 거냐.’
이레일과 마찬가지로 엔레이드맨과 체어맨이 움찔 놀라는 모습에 재언은 황당한 마음을 속으로 삼켰다. 심지어 저 둘은 ‘신재언X’가 인형인 걸 알면서도 놀란 것이다.
어이가 없지만 차마 티를 낼 수는 없었기에 재언은 마음을 가다듬고 예차프를 한 번 바라본 뒤 이레일을 쳐다봤다.
아직 성인도 안 된 어린 청년의 얼굴이 눈물로 젖은 것을 보니 썩 마음이 좋지만은 않았다.
체어맨의 ‘절망의 미로’는 그 안에 있는 사람의 공포를 극대화해 아주 조금씩 이성을 좀먹는 공간이었다. 물론 진심으로 두 사람에게 펼친 것은 아니고 귀신들의 성녀가 드레고프에게 저주를 내리는 데 필요한 시간을 벌기 위해서일 뿐이었다.
이것도 이레일이 아주 단시간에 능력을 간파해 버려서 살짝 당황하긴 했지만 말이다. 기억까지 잃었으면서 체어맨에게 집착하는 솜씨가 누구보다도 남달랐다.
“내가 말했잖아요, 이레일. 당신은 사실 드레고프가 아들들을 학대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예상하지 않았습니까?”
다크 카오스의 질문에 이레일이 반박하지 못하고 눈을 내리깔며 머뭇거렸다. 체어맨이 아동학대범만 골라잡아간다는 건 히어로 계에선 공공연하게 알려진 사실이었다.
멀쩡해 보였던 단란한 가족조차도 결국 파고들면 심각한 학대에 곪아 있기 일쑤였다. 하지만 히어로 협회에선 빌런의 히어로화를 절대로 용납하지 않았고, 그 사실은 ‘있지만 없는 진실’이 되었다.
“무슨 소리예요?”
“이레일. 예차프는 제 말을 도통 믿으려 하지 않으니 당신이 설명해 주세요.”
어째서 다크 카오스가 말하는 대로 자신이 움직여야 하는지 의구심을 가지면서도 이레일은 차마 거짓말을 할 순 없어 사실대로 대답했다.
“…체어맨의 사냥감은 아동학대범이 대부분입니다……. 아동학대범이 아닌 사람을 납치한 경우가 있긴 하지만… 그건 모방범의 소행으로 밝혀졌고요. 그래서 제가 계속 여쭤본 겁니다. 아버지와의 사이는 어땠는지… 말 못 할 사정이 있진 않았는지.”
이레일은 아주 잠깐 입을 다물고 뜸을 들였다.
“하지만 예차프… 당신이 아버지를 너무나도 걱정하는 게 보여서… 행복한 가정을 깨려는 빌런에게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무작정 이곳까지 찾아온 거고요. 설마 당신의 동생을 그랬을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그랬다. 이레일은 너무나도 화가 났었다.
체어맨이 무고한 사람을 납치했으며 그것 때문에 그가 비난받아야 하는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눈앞이 까맣게 변했다. 무조건 체어맨을 만나야겠다는 욕망 외에는 아무런 생각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거짓말이야……. 거짓말. 아버지가… 사샤를…….”
“사샤는 죽을 뻔했어. 체어맨이 아니었다면 그 애는 내장이 터져서 고통스럽게 죽어 갔을 거야.”
다크 카오스는 존대하던 말버릇도 던지고 오만한 말투로 말을 던졌다. 반짝이는 눈물 보석이 사람을 홀리려는 것처럼 푸른색 빛을 냈다.
이레일은 가면의 영롱한 푸른빛을 보며 누군가의 눈동자를 떠올렸다.
재언은 예차프가 너무 구슬프게 울고 있어서 약해지려는 마음에 어린아이를 달래듯이 반말로 위로해 준 것뿐이지 절대로 소년을 책망할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몰랐던 건 면죄부가 되지 않아. 그게 네 죄란다.”
제 나름의 위로를 던지며 다크 카오스는 의자에 앉아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 다리를 꼬았다.
“내게 무슨 자격이 있어서 그들을 벌주냐고 물었지? 맞아. 자격이 있어서 그들에게 벌을 주었다면 난 히어로라고 불렸겠지.”
재언은 그 말이 참 재밌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어떤 권리, 혹은 자격으로 사람이 사람을 심판할 수 있을까.
확실한 건 자신은 그들에게 벌을 내릴 권리나 자격 따위 없었다.
그는 세상 사람들과 정의를 책임지는 히어로가 아니다. 그렇기에 피해를 당한 사람들을 책임질 의무도 없었다.
“그게 없기 때문에 우리가 빌런이라 불리는 것 아니겠니.”
다크 카오스의 뒤로 막이 내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