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0화
정적이 흐르는 분위기 속에서 다크 카오스가 주머니에서 낡은 손목시계를 꺼냈다. 제대로 작동하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아주 낡고 엉망인 시계였다.
“그것보다… 우리가 이렇게 잡담이나 하고 있을 시간은 없을 텐데요. 그 남자에게 저주를 걸어 놓은 상태라……. 어서 해주하지 않는다면 그대로 죽을 겁니다.”
이레일이 다급하게 앞으로 나서며 물었다.
“저주라고요?”
“그래요. 사샤를 때렸던 만큼 그대로 되돌려 받는 저주요. 사샤는 오랜 기간 지속해서 조금씩 맞아 왔으니 그나마 살아 있을 수 있던 거고, 지금 그 남자는 사샤에게 가했던 폭력을 몰아서 받고 있어요. 이제 곧 죽을지도 몰라요?”
다크 카오스의 충고에 예차프는 공기가 부족한 것처럼 숨을 몰아쉬었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가 어린 동생을 죽기 직전까지 학대했다는 걸 믿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끌어안은 동생의 등에 거미줄처럼 나 있는 상처들은 예차프를 현실로 일깨워 주고 있었다.
눈앞에 있는 저 악마 같은 남자는 이 상황을, 자신들의 불행을 즐기는 것 같았다.
“예차프. 당신이 저 문을 열고 나간다면 아버지를 구할 수 있을 겁니다. 해주 방법은 간단해요. 당신이 그를 용서하면 됩니다.”
예차프는 그가 마치 자비를 베푸는 독재자 같다고 생각했다.
“다만, 그렇게 된다면 당신은 사랑하는 동생이 성인이 될 때까지 못 보게 될 겁니다.”
“뭐…라고요?”
“그 아이는 우리가 데려갈 거니까요.”
재언은 예차프가 폭력적인 아버지를 버리지 못하고 선택한다면 자신의 연줄이 닿는 보육원에 맡기고 보살필 생각이었다. 시간이 지나 사샤가 제 몸을 충분히 지킬 수 있을 만큼 성장했을 때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갈 기회를 주려고 했다.
지금 사샤를 아버지에게 돌려보내 봤자 또다시 폭력에 노출되어 죽을지도 모른다. 마음속 한구석이 찝찝한 것보단 속 편하게 데리고 가는 게 나았다.
그런 속마음을 알 리가 없는 예차프는 재언의 말을 전혀 다른 의미로 받아들이고 사색이 되어 외쳤다.
“사샤를 데리고 가서 무슨 짓을 하려고요!”
그가 비명 지르듯 소리치며 사샤를 끌어안았다.
“그 아이는 똑똑하고 야무지니 아주 훌륭한 사람이 될 겁니다.”
재언은 사샤가 그런 일을 당했음에도 아버지를 용서하고 싶다는 넓은 아량을 가지고 있다는 걸 느꼈다. 조금만 대화를 나눠 봐도 아이가 똘똘하고 똑 부러진 성격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즉, 재언은 사샤가 제대로 된 보호 아래 제대로 된 교육을 받는다면 성인이 되었을 때 굶고 다니진 않을 것 같아서 한 말이었다.
하지만 예차프는 사샤를 데리고 가 아이를 빌런으로서 키워져 인간 세계의 밑바닥 생활을 전전하게 할 것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재언이 알게 된다면 무슨 말을 저렇게 배배 꼬아서 듣는지 모르겠다며 억울해할 만한 상상이었다.
잠시 생각하던 예차프는 사샤를 들어 올려 품에 꼭 안고 그대로 뒤돌아 도망치려고 했다. 하지만 등 뒤에서 들리는 다크 카오스의 목소리가 그보다 빨랐다.
“그 문을 나서는 순간 당신의 품에 동생은 없을 겁니다. 그리고 당신은 아버지를 구하고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겠죠.”
“…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거예요? 아버지가 사샤에게 그런 짓… 을 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가슴이 찢어질 것 같은데……. 왜 제게 선택을 강요하는 거냐고요. 그렇게 재밌어요? 사람이 괴로워하는 모습이 당신에겐 재미있는 유흥거리인가요?”
예차프가 애처로운 목소리로 속삭이면서 울먹였다. 재언은 이제 슬슬 이레일이 나서서 무고한 시민을 도와주기를 내심 바랐지만, 그는 예차프를 돕지 않고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멍하니 서 있기만 할 뿐이었다.
“당신 아버지가 죽을 때까지 그 문을 열지 않는다면 사랑하는 동생과 줄곧 함께할 수 있지요. 자, 그동안 줄곧 방관하고 있었으니 이번엔 당신이 선택할 차례입니다. 예차프… 그래서 누구를 선택할 거죠? 전 당신의 선택을 존중할 거예요.”
마치 아담과 이브를 유혹하는 악마처럼 부드럽고 상냥한 말투가 예차프의 귀에 꽂혔다.
그에게 인간의 괴로움은 한낱 유흥거리밖에 안 되는 것일까. 역시 절망을 먹고 사는 빌런들의 왕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사람이었다.
“친부에게 학대당한 건 동생이지 당신이 아니잖아요. 당신에겐 상냥한 아버지였으니……. 당신이 아버지를 선택한다면 난 당장이라도 당신 아버지를 놓아줄 의향이 있어요.”
물론 신재언은 예차프에게 둘 중 하나만을 선택하라고 종용하게 된 셈이라 마음이 약해져 부드럽고 상냥한 말투를 쓰기 위해 애썼던 것뿐이다.
아무리 동생을 학대한 아버지라 해도 자신에게는 상냥하고 당신의 몸을 희생해 지금의 자리까지 이끌어 주었던 보호자였을 테니까.
“사냥감을 중간에 빼앗긴 체어맨에게는 내가 잘 말해 두지요. 맹세합니다. 그대로 문을 열고 나간 당신을 어떤 빌런들도 공격하게 두지 않을 것이라고.”
그러니 예차프가 어느 쪽을 선택하든 이해하고 너그럽게 넘어가 줄 생각이었다.
“난… 나는…….”
예차프는 품에 안겨 있는 사샤를 내려다봤다. 그의 등에 새겨진 흉터들과 아버지가 벨트를 들고 미친 듯이 인형을 때렸던 행동이 떠올랐다. 인형의 등을 가격할 때마다 아버지의 등은 피투성이로 변했었다.
다크 카오스의 말대로라면 그는 사샤에게 그와 똑같은 행동을 저질렀다는 뜻이다. 사샤의 등도 분명히 그렇게 되었을 것이겠지.
이 작은 몸 곳곳에 멍 자국과 흉터가 가득했다.
“형 미안해… 내가 빌었어……. 무서운 아버지를 데려가고 착한 아버지를 다시 데려와 달라고…….”
“난… 나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 예차프. 5분 정도 후에 당신 아버지는 죽을 겁니다. 오… 이제 막 4분이 되었군요.”
뒤에선 다크 카오스가 압박해 오고 앞에선 사샤가 애처로운 얼굴로 매달려 왔다. 이 모든 비극을 모르고 있었던 죗값을 받는 것일까.
예차프는 동생을 사랑했지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고 아버지를 이상적인 보호자라고 생각하며 그의 폭력적인 면모를 외면했다.
“난… 나는…….”
예차프가 눈물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
.
.
“…형.”
사샤가 눈동자를 굴리며 자신을 품 안에 가둔 채 미동조차 하지 않는 형을 작게 불렀다. 예차프는 소리 죽여 울면서 동생의 작은 몸을 힘주어 끌어안았다.
다크 카오스가 말했던 5분이 지났다.
재언은 목덜미를 만지작거리며 한숨을 쉬었다. 이번 일은 정신적으로 기가 다 빨리는 느낌이었다.
차라리 형제 둘 모두에게 못된 아버지였다면 마음이 편했을 텐데, 한 명에게는 더없이 소중한 아버지를 빼앗은 셈이라 무고한 사람을 처리한 것만 같은 기분이 들기까지 했다.
이쯤이면 상황을 정리해도 된다고 여긴 재언이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엔레이드맨이 앞으로 나서서 예차프와 사샤를 기절시킨 뒤 이레일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그런데 이레일이 기절하기 직전 체어맨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나직하게 어떤 말을 중얼거렸다. 이레일의 모국어인 러시아어로 말한 탓에 재언은 알아듣지 못했다.
그런데 그때, 이레일의 증오와 욕망의 파동이 폭발하듯 터져 순식간에 퍼졌다. 재언에게만 보이는 광경이었다.
“…어?”
그 광경에 재언이 이레일을 보면서 손으로 입을 가렸다.
“어떻게?”
재언의 표정이 경악으로 번지자 엔레이드맨이 기절한 이레일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아버지?”
이레일이 완전히 각성했다.
정확히 말하면 힘을 가지고 싶다는 욕망과 체어맨에 대한 집착으로 그의 마음속 규제가 완전히 풀려 버렸다.
본디 증오라는 부정적인 감정으로 각성한 이들은 결코 히어로가 될 수 없었다. 하지만 예외적으로 이레일은 힘을 각성하기 전, 체어맨 덕분에 세상을 증오하는 감정이 작았다.
그 덕분에 히어로가 될 순 있었지만, 재언이 각성시켜 주었던 다른 형제들보다 힘이 약했다. 그대로였다면 그는 절대로 체어맨을 이길 수 없다.
‘체어맨과 만나고 욕망이 강해진 건가? 이 정도면… 같은 급 정도는 되겠는데?’
단지 한 사람을 향한 욕망만으로 히어로이자 누구에게나 순하고 정의로웠던 사람이 증오의 힘으로 각성하는 게 믿을 수 없었다. 재언은 체어맨을 힐끔 쳐다보며 혼란스러워했다.
“체어맨… 그가 뭐라고 했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는 대답에 재언은 표정을 굳히고 체어맨을 돌아봤다. 화상으로 일그러진 체어맨의 눈가를 뚫어지게 응시하며 팔짱을 꼈다.
‘요즘 우리 애들이 반항기인가?’
체어맨이 거짓말을 한다니, 충격이었다. 저렇게까지 하는데 말하라고 으름장을 놓기도 민망하고 비밀로 하고 싶어질 정도로 은밀한 내용인가 싶었다.
그보다도 이레일의 각성이 걱정스러웠다. 그를 포함한 아홉 명의 능력자를 포함해 ‘평행 세계’의 ‘신재언’이 각성시킨 무수히 많은 빌런 중에서도 처음 겪는 일이었다.
정신을 차린 이레일이 과연 이전처럼 정의로운 마음을 유지할 수 있을까. 아니면 또 다른 사람으로 다시 태어날 것인가…….
도저히 짐작할 수 없었다.
.
.
.
면사포에 가려진 체어맨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이레일이 입술을 열었다. 신재언은 알아듣지 못할 러시아어였다.
『난 당신을 놓지 않아. 계속 찾아낼 수 있어, 아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