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1화
“윽.”
흰색의 걸쭉한 액체를 한 모금 마신 재언이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마치 요거트처럼 생긴 음료는 냄새만 맡았을 땐 달콤한 향이 났는데 실제로 입에 넣으니 쓰고 시큼하고 달았다. 러시아 전통 음료라고 해서 받았는데 영 자신의 취향이 아니었다.
결국, 재언은 자신을 바라보며 상큼하게 미소 지은 얼굴로 한 잔 더 주겠다는 듯 음료가 든 주전자를 흔드는 종업원에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
가게 종업원이 서비스로 준 음료를 다 마셔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 사이, 누군가가 옆으로 다가와 서성이며 물었다.
“혼자 왔어요?”
그 종업원이었다. 재언이 살짝 미소 지으며 익숙하게 거절하는 손짓을 보였다.
“네. 애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오우, 아쉽네요.”
종업원은 눈치를 보면서 옆을 서성였던 것과는 달리 시원시원하게 포기하는 것인가 싶었는데, 역시나 다시 돌아온 그는 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내 재언의 앞에 내려놓았다.
“연락하고 싶을 때 연락해요. 기다리고 있을게요.”
“제가 내일이면 한국으로 돌아가서… 아마 연락할 일은 없을 거예요.”
재언은 단호하게 거절하면서도 매너 있게 종이를 손에 들고 흔들어 주었다. 종업원은 신재언의 탄탄한 몸매를 아쉽다는 듯 쓱 훑어보다가 떠났다.
벌써 이 자리에서 받은 네 번째 헌팅이었다. 게다가 놀랍게도 전부 남자들이었다.
이마에 게이라고 써 붙인 것도 아닌데 왜 이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러시아는 동성애에 박한 편 아니었나?’
재언이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마시기 거북한 음료와 얼마나 오래 씨름하고 있었을까.
갑자기 종업원의 연락처가 적힌 종이가 화르륵 불에 타올랐다. 손안에서 불이 붙어 종이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데도 뜨겁거나 화상을 입진 않았다.
“왔어요? 어떻게 됐습니까?”
재언이 옆자리 의자를 당기며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눈부시도록 예쁜 미인이 옆에 앉아 재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재언 씨 말이 맞았어요. 이레일의 능력이 비정상적으로 강해졌더군요. 그 정도면 S급은 쉽게 받을 수 있을 겁니다.”
역시 이레일의 각성이 착각은 아니었다. 레헬이 제법 강하다고 판단할 정도면 이전보다 월등하게 능력이 강해졌다는 이야기였다.
지금만 해도 러시아 히어로 협회에서 레헬에게 도움을 요청했는데 레헬이 손쓸 새도 없이 이레일 혼자 해결했다고 한다. 상당히 어려운 사건이었는데 아침에 출발해서 점심에 돌아온 걸 보니 이레일의 힘이 상상 이상인 모양이다.
“사샤는 아직 병원에 있어요. 점심 먹고 병문안 가 보려고요.”
예차프는 그 사건 이후로 동생 사샤와 함께 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그저께 혼자 퇴원했다. 그리고 지금은 한국에 있는 김은원 선수의 집에 신세를 지고 있었다.
예차프의 아버지가 참혹하게 고문당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는 사실이 알려졌기 때문이다.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체어맨의 소굴에 쳐들어간 예차프의 효심 어린 행동까지 전부 말이다.
그를 둘러싼 비극적인 상황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그의 주변을 떠들썩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그 때문에 김은원은 예차프의 주변 상황을 많이 걱정했다. 그래서 하루빨리 그를 한국으로 데려가 안정을 되찾아 주고 싶어 했다.
그 와중에 퇴원 전부터 예차프가 입원한 병원을 어슬렁거리는 파파라치들 때문에 아직 출국 절차가 끝나지 않은 사샤를 두고 김은원은 예차프와 먼저 갈 계획을 세울 수밖에 없었다.
예차프는 신재언을 찾아와 사샤를 데리고 있다가 함께 한국으로 와 주면 안 되겠느냐며 부탁을 해 왔다.
재언은 마침 출장 일정이 아직 남아 있어서 그 부탁을 수락했다. 게다가 아버지를 잃은 비극적인 상황에 놓인 형제를 돕는 게 회사 홍보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는지 팀원들까지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예차프가 침묵하고 있어서 그들의 아버지가 아동학대범이라는 사실이 알려지진 않았어요. 덕분에 체어맨의 악명만 높아졌죠.”
재언은 차민재와 함께 가게에서 나와 카페로 향했다. 이런저런 내용을 주절거리는 재언의 말에 민재는 고개를 끄덕이거나 추임새를 넣으며 대화를 이어 갔다.
“저도 그가 벌을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하지만, 이 이상 몰아붙이면 결국 남아 있는 예차프만 괴로워질 게 분명하니까요. 뭐… 체어맨의 악명이야 유명하니까 여기서 더 나빠질 것도 없지만요. 그 남자는 아들 하나를 잘 키운 덕에 명예롭게 갈 수 있는 겁니다.”
드레고프는 러시아 정부에서 장례까지 치러 준 뒤 추모 공간까지 마련해 주었다. 그리고 예차프는 더욱더 주목을 받는 선수가 되었다.
이레일 또한 대한민국에 귀화한 러시아인 히어로로서 시민을 구하기 위해 힘써 준 공로를 인정받았다. 러시아 히어로 협회에서 그가 다시 돌아오기만을 바란단 소리가 있을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실제 피해자였던 사샤는 누구도 기억하지 않았다.
재언이 병원에 도착해 병실 문을 열자 고치처럼 이불을 돌돌 만 채 숨어 있던 어린 소년이 허겁지겁 고개를 들었다. 기자들로부터 사샤를 보호하기 위해 예차프가 먼저 한국으로 떠난 후로 내내 형을 찾으면서 울기만 한다고 하더니, 정말로 눈이 발갛게 퉁퉁 부어 있었다.
재언이 안으로 들어가자 기대에 찬 눈빛이 한순간에 실망으로 물들었다.
“안녕, 사샤. 몸은 좀 어떻니?”
“괜찮아요. 그런데 형이 보고 싶어요.”
침착하게 대답하는 사샤의 목소리가 잔뜩 떨렸다. 재언은 사샤를 위해 사 들고 온 과자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며 자상하게 목소리를 꾸며 냈다.
“내일이면 만날 수 있을 거야.”
재언이 느끼기에 사샤는 제법 유망한 인재였다. 예차프가 사샤를 포기했더라면, 아마도…….
“네 형이 한국까지 널 무사히 데려와 달라고 나에게 부탁했어. 다만 지금 형은 마음이 너무 힘들어서 네게 신경을 많이 못 쓰는 거야.”
“전… 알아요. 형은 지금 나 같은 건 꼴도 보기 싫을 거예요.”
나이가 몇 살이라고 했더라, 한국 나이로 치면 여덟 살이었나. 이렇게나 어린데도 애가 눈치도 빠르고, 침착했다.
비슷한 나이의 백건이는 아직도 아기 같은데, 그에 비해 사샤는 정말 성숙했다. 물론 아직 백건이가 더 어리긴 하지만 말이다.
자신의 소중한 조카를 떠올린 재언이 쓴웃음을 지으며 머릿속을 털어 냈다.
아이가 가족과 행복하게 사는 게 가장 좋은 거지.
“그렇지 않아.”
‘어쨌든 형은 아버지 대신 널 골랐잖아. 지금 많이 심란할 뿐이지 절대 널 싫어하는 건 아닐 거야.’
그 생각이 목구멍 끝까지 올라왔다가 다시 들어갔다.
‘신재언’은 그때 다크 카오스로 인해 무력하게 묶인 채 인질이 되었다가 겨우 살아남은 사람일 뿐이었다. 사샤의 상황을 잘 모르고 있어야 하는 게 당연했다.
무어라 대답하기 애매해진 재언이 사샤의 애꿎은 머리만 마구 헝클였다.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이고 있던 사샤가 머리를 흔들어 재언의 손을 털어 냈다.
“건강한 걸 보니까 금방 출발할 수 있겠네. 그렇게 걱정이면 형 말 잘 듣고, 훌륭한 사람이 되는 거야.”
그때, 대화를 주고받는 재언과 어린 소년의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차민재의 주머니에서 핸드폰 벨 소리가 울렸다.
“이레일이에요?”
“아니요. 일을 맡겨 놓고 와서 지금쯤이면 히어로 협회와 함께 빌런 소굴을 습격하고 있을 텐데……. 잠시 전화 좀 받고 올게요.”
이레일의 힘이 S급 이상으로 강해졌건만 그는 독립하는 것보단 레헬의 사이드킥으로 남겠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재언은 사건이 모두 끝나고 병원에서 눈을 뜬 이레일과 마주했던 그때를 떠올렸다. 키다리 아저씨, 체어맨에 대한 집착으로 능력을 완전히 각성한 이레일은 이전과 다를 바 없이 수줍어하고 다정한 청년이었다.
그는 병원 침대에 누운 채 자기 육체를 짓누르는 힘의 무게를 견뎌 냈다.
“신 선생님… 어디 다친 곳 없으십니까?”
“어… 그래요. 그들은 저 같은 일반인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어요. 저보단 이레일… 당신 상태가 더 안 좋은 것 같은데요.”
재언의 대답에 이레일이 다행이라는 듯 웃었다. 그 이후로는 이레일과 만날 기회가 전혀 나지 않았다. 차민재가 의뢰를 해결하자며 끌고 가 버린 것이다.
재언이 통화를 위해 병실에서 나간 차민재의 뒷모습을 보며 테이블 위에 가방을 내려놓자 이불에서 얼굴만 빼꼼히 내민 사샤가 말을 걸었다.
“나… 아저씨한테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어요.”
“나한테? 왜?”
사샤는 말을 하기 전에 우물쭈물하면서 입술만 벙긋거리다가 재언과 눈을 마주하며 배시시 웃었다.
“아저씨 덕분에… 우리 형이 나를 선택해 줬잖아요. 아저씨가 아빠를 죽였을 때, 사실 계속 바라던 일이었어요.”
“…….”
재언은 눈가를 움찔하면서 천진난만한 미소를 짓고 있는 사샤를 내려다봤다. 재언의 얼굴에 곤란한 미소가 감돌았다.
“그러니까 정말 고마워요. 형이 나를 선택하고, 아버지를 죽게 해 주어서요.”
재언은 무슨 소리냐며 딴청을 피울까 아니면 사샤의 말을 정면으로 부정할까. 잠깐 고민하다가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그는 사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작게 속삭였다.
“정 고마우면 이 일은 비밀로 해 주렴. 절대 다른 사람한테 말하면 안 되는 거야.”
“네.”
사샤가 비장하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아저씨는 제 은인이에요.”
역시 놓치기 아까운 인재였다.
이불 안 고치에서 나오지 않던 사샤가 겨우 잠이 들었을 때 면회 시간도 끝나 갔다.
재언은 통화를 끝낸 차민재가 병실 안으로 들어오는 걸 막으며 검지를 입술에 댔다.
“애가 자고 있어요. 우리도 그만 호텔로 돌아갑시다. 그리고 좀 쉬다가 근처 바에서 술이나 한잔해요. 오늘이 러시아 일정 마지막 날인데 그대로 가면 아깝잖아요.”
“좋아요.”
병실 문을 닫자마자 차민재가 재언의 허리를 끌어안고 입을 맞췄다. 복도에 돌아다니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다행이었다.
두 사람은 그대로 병원을 나가 근처에 있는 호텔로 걸음을 옮겼다.
“전화는 무슨 일 때문이었어요? 이레일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죠?”
“네.”
차민재가 짧게 대답했지만, 할 말이 남은 듯 머뭇거렸다.
“아무 일도 생기지 않은 건 아닙니다. 그가 곤란한 일을 좀 저지르긴 했거든요.”
차민재의 말에 재언은 이레일에게 무슨 문제가 생겼다고 짐작했다. 혹시 빌런으로 각성한 것은 아닐지 슬그머니 걱정이 올라왔다.
“무슨 곤란한 일이요?”
“크게… 곤란한 일은 아닙니다. 그가 상대했던 빌런들은 위험등급 S급을 받은 우두머리와 A급의 빌런들이에요. 러시아 히어로 협회에서 버거운 상대니 도움을 요청한 범죄조직입니다.”
“그러면 혹시 다친 건가요?”
차민재가 재언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말했다.
“아뇨, 오히려 반대입니다. 이레일은 제 사이드킥으로서 히어로 생활해 오면서… 단 한 번도 살생을 저지른 적이 없습니다.”
그랬다. 이전에 이레일이 수줍은 얼굴로 이렇게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전… 그냥, 빌런이라고 해서 생명을 빼앗을 권리가 생긴다는 게… 내키지 않아서 그래요. 그냥… 사람을 죽이는 게 아주 거북해서요. 아직 멀었죠, 뭐.”
“그런데 이레일이… 빌런들을 제압하는 과정에서 그들을 터트려 죽였다고 합니다. 한 명도 살려 보내지 않고 전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