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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근하는 빌런-272화 (272/324)

272화

흉악한 빌런을 죽인 것이어도 살인은 살인, 러시아 경찰에 연행된 이레일은 다음 날 아침에서야 공항에서 차민재와 합류할 수 있었다.

한국처럼 러시아 역시 히어로가 빌런을 제압하는 과정에서 반항이 심하거나 민간인에게 끼칠 피해가 심각해질 것으로 판단될 경우엔 즉결 처형이 가능한 나라였다.

다만 이레일이 죽인 빌런들이 흉악 테러범들이라는 근거를 수집해야 했기에 하루 정도는 형식적인 조사가 필요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전의를 상실하고 항복한 빌런들이 존재했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것 때문에 이레일은 구속되어 처벌받지는 않더라도 히어로 협회 차원에서 징계받게 되었다.

그는 1년 동안 히어로 협회를 통해 공식적인 의뢰는 받을 수 없었고 한 달간 능력 사용에 제한이 걸렸다.

그나마 레드-헬-파이어의 사이드킥으로서는 계속 활동할 수 있었다. 능력을 직접 사용하는 게 아니어도 보수를 받거나 먹고 생활하는 것에는 지장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재언은 공항에서 자신의 사이드킥을 인도받기 위해 기다리는 레헬의 뒤쪽에서 팀원들과 함께 서 있었다.

그때 러시아 경찰들을 양쪽에 끼고 양손이 구속된 채 공항에 모습을 드러낸 이레일을 보고 깜짝 놀라 괜찮냐며 눈치 없이 소리를 지를 뻔했다.

이레일이 걱정되는 재언의 마음과는 반대로 러시아 경찰들은 줄곧 긴장한 듯 굳어 있다가 레헬을 보자마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들은 테러범들을 제압하기 위해 이레일을 뒤쫓아 가다가 그때의 광경을 두 눈 뜨고 똑똑히 봤던 이들이었다.

그러니 이레일이 아무리 협조적이고 히어로라 해도 그 무지막지한 빌런들을 그가 얼마나 처참하게 죽였는지 알기에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수갑을 풀도록 하겠습니다.”

경찰 두 명이 이레일의 팔을 잡고 그의 손목을 구속하는 수갑을 풀었다. 그러자 이레일의 오른쪽 손목에 걸린 이상한 무늬의 금빛 팔찌가 눈에 띄었다.

아마 저것이 이레일의 능력 사용을 제한하는 히어로 협회 아이템인 듯했다. 하지만 재언이 아는 한 저런 아이템 따위로 이레일의 힘을 막지 못한다.

그들이 저것에 맹신하는 이유가 대체 무엇일까.

이레일이 힘을 일부러 숨겼거나 드러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의로운 청년 그 자체인 이레일이 그런 음침한 짓을 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니면 예전에 측정했던 이레일의 힘을 생각해서 장착했던 것일 수 있다. 그런 거라면 히어로 협회는 정말 일을 대충하는… 왜 존재하는지 모를 집단이겠지만 말이다.

‘아니면 진짜로 양쪽 다일 수도 있고…….’

이레일이 수갑을 찼던 제 손목을 쓰다듬으며 차민재에게 고개를 숙였다.

“정말 죄송합니다, 사장님…….”

차민재는 별말 하지 않고 이레일을 흥미로운 시선으로 바라보다가 관심이 식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러시아 경찰과 인사까지 나는 그는 할 일은 다 끝냈다는 듯 비행기 탑승 수속을 기다리는 줄로 걸음을 옮겼다.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재언은 팀원에게 사샤를 맡기고 시무룩한 얼굴로 서 있는 이레일에게 다가갔다.

“이레일, 몸은 괜찮습니까?”

“아, 신 선생님… 무사하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어디 다친 곳은 없으십니까?”

재언은 쓴웃음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이레일은 저만 보면 그 말을 하는 것 같아요.”

어딘가 어리숙하지만 착한 청년이 지금은 하얗게 질린 채 눈동자가 흐려진 모습으로 변했다.

‘이걸 어찌하면 좋을까.’

재언은 이레일이 지금이라도 체어맨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평범하고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히어로로서 정의를 지켜내 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해 주고 싶었다.

재언이 할 말이 있는 듯 눈치 보는 걸 알아차린 이레일이 힘없이 미소 지으며 먼저 말을 꺼냈다.

“신 선생님께서도 사장님께 들어서 알고 계신 거죠?”

“아, 음… 네. 이레일의 능력이 갑자기 강해졌다고요.”

재언이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이레일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설명을 이었다.

“능력자 중… 능력을 각성하고 재차 각성한 경우는 드물지만… 있긴 있다고 합니다. 제가 아마 그런 경우인 것 같습니다.”

“…….”

이레일의 또 다른 각성은 그것과는 조금 다른 경우긴 하지만 그가 가진 오해를 정정해 줄 방법이 없었다.

사실 네 힘은 내가 각성시켜 주었고 체어맨과 만난 네 욕망과 증오가 2차 각성으로 이어진 것이라고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제가 어릴 때… 옆집 할머니께서 말씀해 주신 게 있습니다. 신께서 인간의 욕망을 처음 들어주었을 때, 사람들은 그것만으로 만족했다고……. 그런데 죄지은 자들이 그보다 더 많은 욕망을 키워 결국 힘에 잡아먹히게 될 것이라고요.”

이레일은 증오가 희석된 채 각성했기 때문에 신재언의 통제에서 그나마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욕망을 키워 완전히 각성해 버린 지금 같은 경우는 재언도 처음인지라 그의 마음속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났을지 전혀 짐작도 할 수 없기에 절로 긴장되었다.

“그분의 남편은 능력자였는데 2차 각성자였다고 합니다. 2차 각성하면서 인간에 대한 연민과 동정심도 함께 잃어버린 탓에 무자비한 살인자로 변해 결국 사형당했다고 하더군요.”

“흠… 이레일은 다르지 않습니까.”

“아뇨, 신 선생님. 저도…….”

이레일이 자신의 손목에 채워진 팔찌를 쓰다듬으며 지독하게 공허한 목소리를 흘렸다.

“빌런들을 죽일 때, 아무렇지도 않았습니다. 한 번만 살려 달라고 항복하는 빌런들을 죽이면서 어떤 죄책감도 들지 않았죠…….”

자신의 욕망을 위해 인간의 도리를 잃어버리는 게 옳은 길은 아닌 것 같지만, 이레일의 표정은 이전보다 훨씬 가벼워 보였다.

“하지만 과거의 제가… 지금의 제 선택을 후회할 거라곤 생각하지 않아요.”

‘…체어맨은 당분간 파도치는 절벽 위 별장에 근신하도록 해야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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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을 떠나 머나먼 한국 땅에서 사샤와 만난 예차프는 그동안 생각을 많이 정리했는지 눈물을 펑펑 흘리며 동생을 끌어안았다.

김은원의 집에 신세를 지면서 그와 많은 이야기를 나눈 것 같았다. 김은원도 어느 정도 사건의 전말을 들었는지 사샤를 챙겨 주려 노력했다.

예차프와 사샤의 카운슬링이 끝날 때까지 김은원의 집에서 두 형제가 함께 지내기로 했다. 형제의 문제는 거의 해결된 것 같았다.

그리고 신재언은 회사에서 승진에 한층 더 가까워졌다. 김은원이 그의 마지막 주니어 그랑프리 대회에서 금메달을 따며 홍보 효과를 톡톡히 봤기 때문이다.

게다가 한창 이슈가 많은 라이벌, 예차프 선수를 알뜰히 챙긴다는 소식까지 전해지며 그들의 뜨거운 우정에 대중들이 더 환호한 점도 있었다.

뉴스는 물론 포털사이트가 김은원과 예차프에 대한 소식으로 온통 도배되었다. 그러다 보니 그가 홍보 모델인 재언의 회사 브랜드 홍보 효과가 굉장했다.

김은원이 대회에 차고 나갔던 귀걸이는 남녀 가리지 않고 인기몰이를 한 덕에 매장마다 재고가 없어서 예약을 걸어 놓고도 물품을 수령할 때까지 몇 달이 걸릴 정도였다.

귀걸이뿐만 아니라 전체적으로 브랜드 상품의 매출이 크게 뛰었다. 브랜드에서 이번에 처음 개시하는 파인 주얼리의 성공적인 런칭에 본사에서 한국까지 찾아와 재언의 팀을 칭찬하기도 했다.

덕분에 김은원 선수와 계약을 맺자고 처음 아이디어를 냈던 프로젝트팀의 책임자인 과장은 곧바로 부장으로 특별 승진했다. 그러면서 재언 또한 대리 진급 이야기가 나오는 중이었다.

입사하고 3년 뒤에 주임으로 승진하고 1년도 안 되어 또 승진한다면 흔하지 않은 고속 승진이었다.

“이번에 대박 났다면서요. 재언 씨네 팀 전원이 승진 얘기가 나온다던데……. 보너스는 두둑이 받은 거죠?”

재언보다 훨씬 고속으로 승진 중인 임 과장이 웃으면서 말을 걸었다. 그녀의 말대로 프로젝트가 대박이 나면서 상당한 금액의 보너스를 받기는 했다.

이걸 어떻게 사용할까 고민 중이긴 하지만, 재언은 회사에서 승진 얘기를 하는 게 조금 조심스러웠다. 이번에 동기인 남무혁이 또다시 승진에서 제외되었다는 소식도 함께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사원에서 주임으로 승진하는 건 연차만 쌓이면 대부분 가능한 것이었는데 이상하게 그에게 기회가 찾아오지 않았다. 동기는 맡은 프로젝트에 성공하고 있고 후배는 자신을 제치고 주임으로 승진하는 상황에서 주눅 들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안 그래도 요즘 남무혁은 복도에서 마주쳐도 잔뜩 우울한 얼굴로 인사를 대충 받아 주기만 할 뿐이었다.

‘남무혁 씨, 패션 센스가 좀 꽝이긴 해도 사람이 좋고 일 처리도 꼼꼼하다고 들었는데 왜 계속 밀려나는 걸까.’

재언이 남무혁을 걱정하며 커피를 홀짝였다. 스틱 커피는 그만의 달콤함과 맛이 있어서 가끔 입맛이 당겼다.

종이컵 끝을 씹으며 한숨을 쉰 재언은 핸드폰을 들어 남무혁이 힘을 낼 만한 게 뭐가 있을까 하며 color’s 관련 물품들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재언 씨도 그런 거 좋아해요?”

“아, 아니요. 남무혁 씨한테 선물해 줄 생각입니다. 요즘 기운이 없어 보여서요.”

임 과장이 남무혁의 이름이 나오자 인상을 찌푸렸다. 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어우, 그런 사람하고 잘도 친하게 지내네요. 난 싫더라고요, 그런 사람은.”

“…….”

아무래도 임 과장은 남무혁을 썩 좋게 여기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친한 사람의 뒷얘기는 하고 싶지 않았던 재언은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화제를 전환했다.

“이번에 보너스 받은 걸로 해외여행을 갈까 고민 중입니다.”

실제로도 이번에 받은 보너스로 차민재와 해외여행을 다녀올까 리스트를 짜던 중이었다.

재언은 다른 이들보다 여행을 좋아하는 편이었고, 대학생 때는 여행을 위해 아르바이트로 모은 돈을 전부 탕진해서 떠나곤 했었다. 물론 떠나는 족족 사람을 주워 와서 문제였지만 말이다.

“애인이랑요?”

임 대리도 남무혁에 관해서는 깊이 생각하고 싶지 않은지 전환된 화제에 곧장 맞장구쳤다. 그녀 역시 여행을 좋아하는 걸로 유명했다.

“네. 애인이랑요.”

“어디로 가게요? 정해 둔 곳 있어요?”

보너스도 예정에 없었던 금액이었던지라 아직 자세한 계획은 세우지 않았기에 재언은 어깨를 으쓱했다. 비행기 티켓과 호텔, 연차까지 조절하려면 적어도 3개월 후에나 갈 수 있을 것 같지만 벌써부터 기대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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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요. 재언 씨와 함께라면 어디든 따라갈 수 있어요.”

퇴근 후, 민재의 집 소파에 드러누운 재언이 여행 얘기를 꺼내자 차민재는 예상보다 더욱 눈을 빛내며 수줍은 얼굴로 웃었다.

“비행기표 바로 예약할까요?”

“아뇨, 아뇨, 아직. 민재 씨 여권이나 줘 보세요. 제가 비행기는 알아서 예약할 테니까요. 아니, 그전에 휴가 일정이랑 연차도 쓸 수 있는지 봐야 해요.”

재언은 잔뜩 안달이 나서 붙어 오는 차민재의 어깨를 잡고 입술을 맞대며 침대 위로 나뒹굴었다. 한동안 얼굴도 제대로 보기 힘들 정도로 바쁜 애인 때문에 입만 삐죽이던 나날은 저 멀리 제쳐 두고 여행 이야기에 신이 난 듯했다.

재언은 웃으며 그의 입맞춤을 받아 주다가 베개에 머리를 뉘었다. 재언의 매력적인 목으로 민재의 입술이 내려앉았다.

그 순간, 재언의 눈앞에 변화가 생겼다. 그는 화려하지만 낡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의 주변은 온통 어두웠고 퀴퀴한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다크 카오스의 기억이다.’

어째서 무슨 타이밍에 ‘평생 세계 신재언’의 기억 속으로 끌려오게 된 건지 전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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