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3화
‘돈 많은 애인에게 받은 것이 워낙 많아야지.’
시계부터 시작해서 차민재가 선물해 준 걸 값으로 환산하면 금액이 꽤 컸다. 값비싼 외제 차 차 한 대나 서울은 아니더라도 수도권 인근에 집 한 채 정도는 마련할 수 있을 정도였다.
재언도 사람인지라 얻어먹기만 하는 건 미안했다. 애인에게 돈을 쓰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은데 큰맘 먹고 뭘 사줘도 그의 마음에 찰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섰다.
그러니 이번만큼은 꽤 두둑하게 받은 보너스로 자신이 여행 경비를 부담하는 걸로 해서 애인과 해외여행이나 다녀오자는 계획으로 설렘에 잔뜩 부풀어 오르는 중이었는데…….
‘…….’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지.
재언은 넓은 침대 위에서 눈만 멀뚱멀뚱 뜬 채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실제로 한숨이 입 밖으로 나오진 못했다.
그의 정신을 담고 있는 몸은 ‘평행세계’에서 가족을 잃고 상위급 존재들에게 인생을 희롱당한, 몸도 마음도 까맣게 타 버린 흑화한 ‘신재언’이었기 때문이다.
정신은 또렷한데 육체를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은 생각보다 굉장히 답답했다. 대체 왜 하필 애인과 꽁냥거리고 있을 때 이런 일이 생긴 걸까.
그것도 실제 자신이 저질렀던 과거도 아니고 평행 세계의 자신이 저지르는 부끄러운 모습을 봐야 하는지 모르겠다.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그냥 이대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마흔아홉 번 정도 들었을 무렵, 드디어 ‘신재언’이 움직였다.
언뜻 보이는 ‘자신’의 옷차림은 검은색의 보들보들한 실크 가운을 입었고 부드러운 카펫이 그대로 밟히는 걸 보니 맨발인 듯했다.
어깨가 훤히 드러날 만큼 흘러내린 가운을 좀 정리해서 깔끔하게 입어 줬으면 좋겠는데 ‘신재언’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그대로 터덜터덜 방문을 열었다.
침실 내부가 제법 호화롭고 넓었기에 여기가 어딘가 의아해하던 것도 잠시, 재언은 방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거실의 참혹한 풍경에 경악했다.
그가 잠을 자는 침실만 깨끗했을 뿐 거실과 주방으로 이어지는 복도는 온통 피로 물들어 있었다. 피 웅덩이가 유독 고여 있는 곳에는 집주인으로 보이는 중년 남성이 처참한 몰골로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잔인하기 짝이 없는 풍경에 재언이 경악하든 말든 ‘신재언’은 싸늘하게 식어 물컹해진 피 웅덩이를 맨발로 밟으며 욕실을 향해 걸었다.
같은 감각을 공유하는 재언만 그 기분 나쁜 느낌에 몸서리를 쳤다. 욕실로 들어간 ‘신재언’이 세면대 물을 틀고 얼굴에 물을 뿌렸다.
‘앗, 차가.’
갑작스러운 찬물 세례에 재언이 깜짝 놀라 저도 모르게 속으로 외쳤다. 얼음장같이 차가운 물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재언은 원래 찬물로 세수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어쨌든 ‘신재언’도 자신일 테니 찬물 세수는 별로 좋아하지 않을 텐데.
그럼에도 그는 몇 번이나 얼음장 같은 물을 연거푸 얼굴에 적시며 세수하더니 고개를 들어 젖은 얼굴로 세면대 위에 설치된 거울을 응시했다.
집주인의 취향이 상당히 고급스러운지 테두리에 무척이나 화려한 문양이 새겨진 거울이었다.
‘…몸이 앙상하잖아? 안색도 별로고, 운동을 안 하는 건가? 조금만 운동해도 확 살아날 텐데 아쉽네. 몸이 건강하지 않으니까 다크서클도 엄청 내려오고 표정도 별로인 거잖아. 눈이 어디 동태 눈깔을 심어 놓은 것 같네.’
본인이지만, 본인이 아닌 사람에게 신랄한 평가를 하며 재언은 운동의 중요성을 마흔한 가지나 떠올렸다.
재언은 쉬는 날마다 틈틈이 헬스장을 다닐 정도로 운동을 즐기는 편이라 운동을 하지 못하는 날엔 자신의 복근을 만지작거리며 아쉬워하기도 했다. 학생 때부터 꾸준히 해 온 운동 덕분에 재언의 가슴은 언제나 두툼했고 안색은 활기가 돌았다.
직장 동료들 사이에서 떠도는 말을 빌리자면 짜고 짜도 과즙이 뿜어져 나올 것 같다는 상큼한 남자였다.
혈색도 좋고 다크서클도 없고 눈동자가 반짝이는 재언과는 다르게 ‘신재언’은 어딘가 위태로운 분위기를 가졌다.
재언과 키만 똑같을 뿐 마르고 비실비실했다. 게다가 흘러내리는 가운 사이로 보이는 흉근이 빈약했다. 재언에게는 정말 충격적인 모습이었다.
관리하지 않은 자신은 저렇게까지 엉망으로 변하는구나 싶은 마음에 더욱더 열심히 관리해야겠다는 생각에 빠졌다. 그때 피폐하기 짝이 없는 ‘신재언’이 거울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입술을 열었다.
“너… 재미있는 일을 하던데.”
설마 평행 세계의 자신은 거울을 향해 말을 거는 그런 부끄러운 짓도 하는 건가.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오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신재언’의 탁한 푸른색 눈동자가 거울 너머의 무언가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그건 바로 자신이었다.
평행세계의 기억을 읽는다는 건 과거에 이미 일어난 일을 보는 것과는 결이 달랐다. 현재 자신이 있는 현실보다 시간대가 과거일 수도, 미래일 수도 있었다.
언젠간 이 세계와 시간대가 맞물리며 접점이 생길지도 모른단 생각은 하고 있었는데, 이렇게까지 직접적으로 아는 척해 오는 ‘신재언’의 모습에 재언은 당황에서 입을 다물었다.
자신이 이쪽 세계를 읽을 수 있듯이 반대도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양쪽 기억을 가진 광대랑 사귀고 있다지. 너무 웃겨서 말이야.”
‘신재언’이 손가락을 들어 거울을 쓰다듬었다.
“광대한테 놀아나는 내가 너무 가여워서 하는 말인데, 그가 과연 마지막까지 ‘나’와 기억을 공유하는 널 살려 둘 것 같아?”
그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전혀 모르겠다.
‘뭔가 충고를 줄 거면 있어 보이는 척 두루뭉술한 말을 던지지 말고 하나부터 열까지 자세하게 설명한 다음 설득해 줬으면 좋겠는데!’
하지만 사람의 기분을 있는 대로 찝찝하게 만든 ‘신재언’은 피식 웃으며 주변에 나뒹구는 비눗갑을 들어 거울을 향해 힘껏 던져 버렸다. 연약한 몸 어디서 힘이 나오는지 한 번에 거울이 산산조각이 나 깨졌다.
그대로 재언은 깨진 거울 속에 갇혀 버렸다.
‘성질머리하고는!’
비록 그게 자기 자신이라도 짜증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분하긴 하지만 ‘평행세계’의 ‘신재언’은 상위급 존재들에게 사랑받고 있어서 기묘한 힘을 쓸 수 있었다. 능력으로만 따지면 지금의 자신보다 월등했다.
- 형.
길을 잃어버리고 멍하니 서 있는 재언의 귀에 누군가가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 형.
재언은 자신을 강제로 현실로 돌아오게 만든 뜨거운 손길을 느꼈다. 눈을 뜨자 무척 예쁘고 아름다운 얼굴이 보였다.
방금까지 볼품없는 자신의 신체 때문에 충격받은 눈을 정화해 주는 아주 멋진 광경이었다. 이 외모만 있으면 열 세계도 부럽지 않았다.
재언은 멍하니 차민재를 올려다보다가 머리를 흔들었다.
“재언 씨, 갑자기 멍해지더니 정신을 잃어서 놀랐습니다. 혹시 무슨 일 있었습니까?”
‘네가 광대에게 놀아나는 게 가여워서 하는 말이야.’
갑자기 머릿속에 ‘신재언’의 충고가 떠올랐다. 재언은 평행 세계의 자신에게 너를 조심하라는 충고를 들었다고 이실직고할까 고민하다가 눌러 삼키고 머리를 긁적였다.
“가끔 그래요. 저쪽 세계 기억이 흘러들어 와서… 알잖아요.”
재언이 평행 세계를 떠올릴 때 정신을 잃거나 혼란스러워하듯 민재도 그렇지 않을까. 하지만 차민재는 재언의 말에 묘하게 웃으며 그의 손등에 입을 맞출 뿐이었다.
“알죠.”
그는 잡은 손을 그대로 뒤집어 재언의 손목을 쓰다듬었다.
“그런데… 재언 씨는 어디까지 기억했습니까?”
재언은 자신의 직감이 그에게 전부 다 말하지 말라고 충고하는 듯한 위화감을 느꼈다. 그는 요즘 발동하긴 하는지 의심스러운 럭키를 믿어 보자는 마음으로 별일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잘 모르겠어요.”
“…….”
“그냥, 애니메이션을 중간만 잠깐 보고 마는 기분이에요. 그것도 엄청나게 긴 장편 애니메이션의 중간 부분만이요. 앞에 어떻게 시작했는지도, 결말도 모르는 그런 거요. 300화가 넘어가는 애니메이션의 중간 부분 몇 편만 본다고 스토리를 전부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요.”
딱 맞는 비유를 생각해 낸 자신을 기특해하며 재언은 별일 아닌 것처럼 넘기려 했다. 그런데 차민재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재언의 손을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고개를 들어 올려 눈동자를 마주하며 미소 지었다.
“맞아요. 중간만 몇 편 봤다고 전체적인 스토리를 이해하긴 힘들죠.”
방금까지 둘 사이에 있던 묘한 기류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차민재는 재언의 손을 잡고 부드럽게 잡아당겨 끌어안았다. 재언 또한 그런 민재를 끌어안으며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평행 세계의 ‘신재언’은 딱 하룻밤만 묵기 위해 아무 죄 없는 집주인을 죽이는 허세 가득한 쓰레기 빌런이고, 세계를 멸망시킨 악당이다. 마찬가지로 레헬도 그쪽 세계에선 같은 급의 쓰레기였을 것이고.
하지만 이쪽 세계의 자신은 부모가 살아 있고 건강한 일상을 영위하는 중이었다. 레헬 역시 더 이상 우스꽝스러운 광대가 아니며 히어로다. 사람은 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보단 여행 얘기나 계속해요. 어디가 좋을까요? 전 국내도 충분히 다녔으니까 해외로 나가고 싶은데.”
재언은 그렇게 말하곤 결심하듯 한 가지 강조했다.
“물론 아무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 정말 관광 목적인 여행으로요. 둘 다 아무 일도 없이.”
“좋아요.”
차민재가 재언의 말에 활짝 웃으며 몸을 일으켜 냉장고에서 맥주 두 캔을 꺼냈다. 목을 축이고 싶었던 걸 어쩜 저렇게 귀신같이 알아차리는지 모르겠다.
역시 차민재는 정말 교과서에 나와도 될 정도로 이상적인 연인이었다. 상냥하고 눈치도 굉장히 빠르다.
맥주를 본 재언이 거실로 나가 지금쯤 소파 밑 어딘가에서 널브러져 있을 배추를 찾으며 리모컨을 집었다.
배추는 요즘 하루가 다르게 크고 있어 지금은 몸무게가 3kg 가까이 되었다. 다음 주에 중성화 수술하러 간다던데, 탱글탱글한 땅콩이 사라질 거라고 생각하니 조금 아쉬웠다.
여느 때처럼 TV를 틀어 뉴스 채널로 돌린 뒤 맥주캔을 입에 갖다 댄 재언은 깜짝 놀라 기침을 터트렸다.
[S급 히어로 마더. 20년 만에 극적으로 아들을 찾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