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4화
16년.
엔레이드맨이 지옥에서 살았던 시간의 총합이었다. 섬 노예 생활 13년과 그곳에서 탈출한 뒤에도 매일같이 악몽에서 빠져나오지 못해 쌓여 가는 증오에 몸부림쳤던 시간까지 더하면 총 16년이었다.
그가 점점 정신을 차리기 시작한 건 재언이 그의 아버지가 되어 주고 헤드셋을 선물 받은 뒤에 시간이 더 지나고 나서였다.
이제 막 중학교에 입학했을까.
학교 운동장에서 꽃다발을 든 채 꺄르륵 웃는 여자아이의 두 손을 매우 소중하게 잡고 걸어가는 부모. 그리고 그 모습을 뒤에서 묵묵히 지켜보다가 아무 말 없이 등을 돌리는 소년.
그날 이후부터 섬 노예 박주현이라는 소년은 사라지고 잔혹한 다크 카오스의 첫 번째 자식이자 거대 빌런들의 우두머리인 엔레이드맨만이 남게 되었다.
@
뉴스 화면 속 엔레이드맨의 친모, 히어로 마더는 눈물을 글썽이며 벅차오르는 감정을 추스르는 데 온 힘을 다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숨을 몰아쉬면서 자신의 손을 잡은 남자의 얼굴을 보자 다시 울컥 올라오는 눈물을 참아 내는 게 힘들어 보였다. 하지만 재언은 마더의 손을 잡고 있는 상대가 진정으로 마더가 찾던 친아들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녀의 친아들인 엔레이드맨은 지금쯤 ‘파도치는 절벽 위 별장’의 거실 난로 앞 흔들의자에서 명상하는 것처럼 멍하니 앉아 있을 테니까 말이다.
“마더가 제 자식을 찾았나 보군요.”
“…아닌 거 알잖아요.”
흥미롭다는 듯 중얼거리는 차민재의 말에 재언은 머리를 감싸 쥔 채 나직하게 대답했다.
마더의 옆에 있는 저 청년은 대체 누구이며 어째서 마더가 제 아들이 맞다고 인정한 건지 의문이 들었다. 인터넷 커뮤니티를 아무리 뒤져 봐도 극적인 모자 상봉 광경에 눈시울만 붉힐 뿐 제대로 된 설명은 없었다.
한창 여행 이야기로 분홍빛 기류가 흐르던 둘 사이를 훼방 놓아 버린 난데없는 소식은 재언이 핸드폰 화면에 코를 박게끔 했다.
그에 차민재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재언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숙여 그의 겨드랑이 사이로 머리를 들이밀었다. 재언은 자연스럽게 팔을 들어 올려 허벅지에 누운 차민재의 머리를 품에 안은 채 손가락을 바삐 놀렸다.
드디어 어느 포털사이트의 어느 블로그에서 신재언이 알고 싶었던 정보가 한 줌 정도 나왔다.
[20년 만에 만난 모자, S급 히어로 마더가 23년 전 잃어버렸던 아들을 드디어 찾아 눈시울을 붉혔다.
아들은 세 살 때부터 보육원에서 힘겹게 자라 왔다. 그리고 마더가 자신의 친모라는 사실을 어렴풋하게나마 느꼈지만, 찾아갈 용기가 없었다고 했다.
그는 보육원에서 나와 고시원을 전전하며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결국 모정이 그리워져 마더를 찾아갔다.]
“…….”
마더는 S급 히어로다. 그녀는 재산도 많고 사람들 사이에서도 평판도 가장 좋았다. 그렇기에 당연하게도 자신이 ‘박주현’이라며 나타나는 사람 또한 적지 않았다.
어느 사설 보육원의 원장이 직접 찾아와 당신의 아이를 데려왔다고 주장한 적도 있었고 스무 살의 젊은 청년 한 명은 언론을 통해 자신이 진짜 마더의 아들이라며 눈물을 흘렸던 적도 있었다. 그들 모두 마더의 지위와 재산을 노린 사기꾼들이었다.
뉴스 화면 속, 마더의 손을 잡은 청년은 어색하고 부끄럽지만, 친모를 만나 진정으로 기뻐하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제 막 20대 중반쯤 되는 나이의 키가 큰 남자였다.
신재언과 만난 날부터 시간이 멈춰 열여섯 살처럼 생긴 소년과는 전혀 다른, 평범한 성인이었다. 그는 두 번 다시 자신의 손을 놓지 않겠다는 마더의 손을 양손으로 꼭 붙잡으며 울먹였다.
“…….”
만약 재언이 사건의 전말을 전혀 모르는 일반인이었다면, 20여 년 만에 극적으로 상봉한 모자의 재회 장면을 보면서 함께 훌쩍거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신은 사실을 알고 있다. 자신의 옆에 머무르는 엔레이드맨이 그녀의 친아들이라는 걸.
재언은 너무나도 기가 막혀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여태껏 많은 사기꾼을 잘 물리쳐 온 마더가 갑자기 저 남자를 아들이라고 인정하며 인터뷰까지 하는 것도 수상했다.
뻔뻔하기 그지없이 ‘박주현’을 가장해 마더를 어머니라고 부르는 남자의 행동에도 속이 답답해졌다.
“…후우…….”
열이 오르는 머리를 간신히 식히며 재언이 심호흡했다.
“그를 아들이라고 인정하다니……, 정말 수상하네요. 저 남자가 한 말을 그대로 믿는다고요? 마더에게 그런 사기꾼은 널리고 널렸어요. S급 히어로 부모 밑에서 편하게 살다가 재산도 물려받고 싶어서 사람의 간절한 마음을 이용하는 놈들이 한둘은 아니었다고요.”
누구는 좋아서 그 권리를 모두 포기하고 미련 없이 등을 돌렸던가.
보고 싶어서 사흘 밤낮을 울었고 가족을 만날 수 있다는 희망에 잔뜩 부풀었었다. 하지만 자신이 서 있을 자리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돌아서는 엔레이드맨의 뒷모습이 아직도 재언의 눈에 선했다.
“이번 일은 너무 수상해요. 마더가 왜 그를 아들이라 인정했는지 조사해 봐야겠어요.”
@
남자는 당장 다음 달 빠져나가는 카드값과 고시원 이용료 때문에 골머리를 썩고 있던 중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편의점 아르바이트 중에 누군가가 그에게 다가와 이걸 인천항까지 들고 와 주면 백만 원을 주겠다고 달콤하게 유혹했다.
그 수상하기 짝이 없는 제안을 덥석 문 남자는 인천항 한구석에서 불안하게 서성이다가 빌런 조직에게 찍혔다. 그들을 피해 도망가는 사이 출동한 마더와 마주쳤다.
남자는 자신을 구해 주고 등 돌려 떠나려는 마더를 향해 입을 열었다.
“어… 엄마.”
“…….”
뜻밖의 호칭에 마더는 고개를 돌려 눈을 가늘게 뜨고 남자를 경계했다. 하지만 울먹이면서 하는 남자의 다음 말에 눈을 크게 떴다.
“나… 박주현이에요……. 엄마라는 걸 알고 있었는데… 차마 말할 수가 없었어요. 엄마가 만들어 줬던 총도… 이렇게 계속 부적처럼 가지고 있었어요.”
“내가… 만들어 준, 총……?”
마더는 그동안 사기꾼들에게선 절대 들을 수 없었던 증표를 발견했다. 마더의 아들이 납치 실종되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었지만, 아들과 함께 사라진 장난감 두 개는 가족들만 아는 비밀이었다.
저 장난감 로봇이 들고 있는 총은 마더가 처음으로 아들을 위해 만들어 준 작은 레고였다. 그리고 그건 누구도 따라 할 수 없는 신비한 힘이 깃들어 있었다.
.
.
.
남자는 스물여섯 살의 나이로 엔레이드맨과 동갑이었다. 세 살 때 고속도로에서 길을 잃고 헤매던 그를 어떤 은사가 구해 준 뒤로 쭉 보육원에서 자랐다고 한다.
군대는 면제를 받아 복무하지 않았다. 평범한 외모에 키는 182cm, 고등학교는 졸업했지만, 대학교는 진학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제대로 무언가를 배우거나 일한 적이 없어 아르바이트를 하며 고시원이나 친한 지인들의 집을 전전하며 살아가는 중이다.
현재는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하는 중이고 주변의 평판은 특별한 것 없이 조용한 사람으로 통했다. 그런데 그와 같이 다니는 무리는 은근히 질이 나빠 보였다.
재언은 남자의 인적 사항이 담긴 종이를 쭉 훑으며 커피를 홀짝였다.
마더와 남자가 만나게 된 곳은 인천의 한 부둣가, 마더가 어떤 조직을 쫓기 위해 출동했다가 마주쳤다고 적혀 있다.
남자를 아들이 맞다고 확신하게 된 계기는 바로 그가 어린 아들과 함께 사라진 장난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더는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색은 좀 바랬어도 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장난감 총이었다.
마더는 그날, 아들이 양손에 쥐고 있었던 장난감들의 생김새만큼은 선명하게 기억했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아들이 어떤 장난감들을 들고 있었는지, 어떤 옷을 입었는지조차도 잊으래야 잊을 수 없었다.
남자는 세 살 때 부모를 잃고 고속도로 주변을 헤맸을 당시에 이 장난감을 손에 꼭 쥐고 있었단다. 지금도 보육원을 나와 겨우 먹고살면서도 이 인형만큼은 도저히 놓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공교롭네. 참으로 기구해.’
진짜 마더의 자식인 엔레이드맨은 그녀가 말한 장난감들을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다. 노예를 파는 브로커 놈들에게 전부 빼앗겼고 그나마 입고 있던 옷가지들도 섬으로 들어가면서 그의 것이 아니게 되었다.
섬 주민들이 고급스러운 옷과 신발을 신고 있는 노예를 가만히 둘 리 없었다. 모두 빼앗아 자신의 손주들에게 나눠 준 뒤에 노예에게는 허름한 거적때기만 던져 주었다.
엔레이드맨은 마더의 아들로서 어떤 증표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진짜 친아들이라는 증거는 오로지 그의 몸에 흐르는 피뿐이었다.
대체 무슨 이유로 저 남자가 엔레이드맨이 잃어버렸던 로봇 중 하나를 가졌는지 모르겠지만, 어째서 마더가 그것만으로 혈연임을 확신했는지 의구심이 들었다.
우리나라엔 저렇게 긴 시간 동안 헤어졌다가 재회했을 때 친자임을 증명할 수 있는 과학적인 방법이 있는데 그녀는 하지 않았다. 오히려 마더는 친자 확인을 해 볼 것이냐는 기자의 질문에 고개를 흔들었다.
- …의심하고 싶지 않아요. 전 정말 오랫동안 찾아왔거든요. 한 번도 포기하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그런 걸 확인하는 것이 우리 주현이에게는 상처가 될 것 같습니다. 전 그냥 이 애가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정말 고마워요.
- 어머니를 만나서 정말 기쁩니다. 전 사실 마더가 제 어머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께서 절 잊으셨을까 봐 두려워서 용기 내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하지만 힘껏 용기 내 보았습니다. 전 어머니의 자식이라고요.
재언이 봤을 땐 말의 앞뒤가 하나도 안 맞았다. 의절당한 것도, 버린 것도 아닌 엄마를 왜 그동안 찾아가지 않았는지.
그리고 마더가 계속 아들을 찾아 헤맨다는 사실은 이미 전 세계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알려진 일이었다. 그런데 이제 와 나타난 이유가 무엇일까.
차라리 우연히 로봇 장난감을 주웠는데 그것의 주인이 마더의 아들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게 더 신빙성 있을지도 모르겠다.
- 제 아들을 위협하던 건 엔레이드맨이 관리하는 범죄 집단, ‘검은 태양’이었습니다. 저는… 기적처럼 만난 제 아들을 건드린 그 조직과 조직의 가장 위에 있는 놈에게 정의의 심판을 내릴 것입니다.
“아…….”
점점 꼬여 가는 상황에 재언은 신음을 삼키며 이마를 짚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