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5화
조직명 검은 태양. 위험등급 A급의 능력자인 젊은 두목이 이끄는 이 조직은 행동대장을 비롯해 조직의 중추 대부분이 능력자였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히어로 협회에 위협적이었지만, 그들은 아직 빌런으로 규정되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이 건실하고 합법적인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의심하는 사람들에게 불법적인 짓이나 빌런으로서 테러를 저지른 증거를 가지고 오라며 도리어 화를 내기까지 했다.
이 조직의 근본은 원래 한국 조폭이었다 하지만 자신들은 몇 년 전에 있던 조직들 간 항쟁의 최대 피해자들이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때 당시 그들은 라이벌 조직에 의해 괴멸 수준으로 학살당하고 두목을 잃었다. 그들이 운영하던 단란주점은 로비를 포함한 모든 방이 피투성이가 되었고 발견된 시신이 산을 이뤘다.
그 사건 이후로 가게도 문을 닫고 그대로 건물 자체가 방치되었다. 그리고 몇 달이 지난 후 건물에서 썩은 내가 진동한다는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이 조사하던 중 수습하지 못했던 잘린 시신 일부들을 발견할 정도였다.
어느 날은 실시간 방송으로 유명한 한 방송인이 몇십 명이 살해당한 폐건물을 탐험하는 콘텐츠를 위해 건물 안으로 몰래 들어갔었다.
그가 카메라를 들고 돌아다니던 중, 천장에 구멍이 뚫려 있는 걸 발견하고 그 위로 올라갔다가 그곳에도 숨어 있는 시신과 들끓는 벌레들과 마주해 그만 발을 헛디뎌 넘어지고 말았다.
그 충격으로 시신들을 위태롭게 지탱하던 천장이 부서졌고 방송인의 머리 위로 시신과 벌레들이 우수수 떨어져 버렸다. 그 이후로 그는 모든 방송 생활을 접고 트라우마 치료에 전념한다는 소식만 들려왔다.
이처럼 지금까지도 많은 영향을 주고 있는 끔찍한 항쟁에서 겨우 살아남은 피해자들이 만든 조직이 바로 지금의 검은 태양이었다.
두목과 중추 인원들이 전부 죽고 오합지졸만 남은 상태에서 그들에게 남은 건 라이벌 조직이 자신들을 죽이러 올 때까지 필사적으로 도망치는 일뿐이었다.
그런 그들을 찾아내 하나둘 모아 세력을 키운 이가 죽은 두목의 하나뿐인 외동아들이었다.
도망치던 이들을 한데 모으긴 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그들 중에 희망을 품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상대편에는 무려 S급 능력자인 행동대장 쌍칼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갑자기 상대 조직의 중추 세력들이 모두 돌연사하면서 상황이 역전되었다. 의기양양해진 그들은 우왕좌왕하는 상대를 소탕하기 시작했다.
젊은 두목은 상대 조직원들에게 조직을 배신하고 항복하여 자신의 밑으로 들어온다면 살려 주겠다는 제안을 하며 조직원을 늘려 갔다.
복수도 완성하고 부하도 늘려 가던 젊은 두목은 조직 이름을 검은 태양으로 지었다. 그리고 자신을 대표로 한 건설회사를 하나 만들어 부하들에게 팀과 직급까지 내려 주었다.
과거의 아버지가 당한 일은 모두 불법적인 일과 폭력으로만 이루어졌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고 이제부턴 성실하게 합법적인 일을 해야 한다면서 말이다. 그 때문에 히어로 협회에서 그들을 빌런으로 규정지어 토벌할 수 없게 되었다.
젊은 두목이 조직 이름을 ‘검은 태양’으로 지은 이유는 밝은 하늘엔 태양이 있으나 검은 하늘에는 오로지 검은 태양만이 뜰 것이라는 지극히 사이비 종교적인 이유였다.
거꾸로 세워진 검은 십자가와 검은 하늘을 지배하는 검은 태양.
그것은 ‘다크 카오스’를 숭배하는 이들에게서 나오는 전형적인 이론과 믿음이었다.
“그래, 나다. 그 여자는 내가 처리할 테니 넌 맡긴 일에나 집중하도록 해.”
재언이 뉴스를 보고 조심스럽게 ‘파도치는 절벽 위 별장’으로 들어오니 엔레이드맨이 흔들의자에 앉아 ‘영원히 꺼지지 않는 모닥불’이 타오르는 벽난로 앞에 앉아서 누군가와 통화를 하는 모습이 보였다.
재언의 앞에선 공경심이 넘쳐 순종적으로 굴고 형제들에겐 엄격하지만 자상한 것과 다르게 냉소적이고 오만한 말투였다. 세간에 알려진 것처럼 검은 태양은 엔레이드맨이 가장 아끼는 조직이 맞았다.
다른 어중이떠중이들이 부하를 자처하며 다크 카오스의 산하 조직이라고 외치는 것들 하고는 달랐다. 검은 태양의 젊은 두목은 엔레이드맨과 직접 연락하며 명령을 받으니 말이다.
검은 태양의 뒷배에 엔레이드맨이 있다는 가설은 진실이고 그것은 재언이 알고 있을 정도로 공공연했다. 그 때문에 히어로들은 검은 태양을 직접 언급하거나 부딪치는 걸 매우 꺼렸다.
“위대하신 아버지.”
엔레이드맨이 거실에 나타난 재언을 보자마자 상대에게 양해를 구하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통화를 종료한 뒤 급하게 일어서서 맞았다.
재언은 손을 들어 대충 인사해 준 뒤 엔레이드맨이 앉아 있던 흔들의자에 앉았다. 굳이 이렇게까지 안 해도 된다고 늘 말하지만, 말이 통하는 녀석들이 아니었기에 서서 실랑이하는 것보다 앉는 게 나았다.
그런데 모양새가 상당히 좋지 않아서 기분이 묘했다. 열여섯 살밖에 안 된 소년의 자리를 빼앗아 앉은 격이지 않나. 이게 더 꼴불견이 아닌가.
재언은 심란한 마음을 꾹꾹 눌러 참으며 대화의 물꼬를 텄다.
“엿들어서 미안해.”
“아닙니다. 아버지께선 이 세상의 지배자가 되실 몸……. 듣지 못할 말이 없으시고 저희에 대해 알지 못할 일이 없으십니다.”
‘어우… 그런 말은 좀 안 했으면 좋겠는데.’
속으로 질색했지만, 그것까지 지적한다면 말이 길어질 것 같아서 재언은 말을 돌렸다.
“엔레이드맨. 마더와… 이야기를 나눠 보는 게 어때?”
“…….”
“마더가 오해를 하는 게 분명해. 그놈은 진짜 아들이 아니잖아. 그런 놈 때문에 너와 부딪친 뒤에 나중에 진실을 알게 되면 망가질지도 몰라.”
물론 마더뿐만이 아니라 양쪽 다 마음이 무너져내릴 것이다. 하지만 엔레이드맨은 재언의 말에 드물게도 고개를 저었다.
“…위대하신 아버지. 그 여자가 찾던 아들은 이미 10년 전 죽었습니다. 저는 박주현이 아니라 엔레이드맨입니다. 아버지에 의해 다시 태어난… 아버지만의 충성스러운 장기 말입니다.”
그는 신재언에겐 헌신하면서도 자기 자신에게는 혹독한 사람이었다.
“엔레이드맨. 내겐 장기 말은 필요 없어.”
재언이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내가 처음에 말했잖아. 난 그냥 네가 복수할 힘을 가지고 더 이상 억압과 착취에 휘둘리지 않는 삶을 살아가길 원했던 것뿐이야. 힘을 준 것도 그런 생을 살았으면 했던 거고. 그냥… 엔레이드맨 네가 평범하고 행복하게, 부모를 찾아서 살았으면 좋겠어.”
그러자 엔레이드맨이 부모에게 대드는 아이처럼 부루퉁한 표정을 지었다.
“아버지께서 원하지 않으시니 다른 형제들도 숨죽이고 있을 뿐입니다. 저희는 언제든지 아버지를 위해 움직일 준비가 되었습니다. 이 세상을 위대하신 아버지의 발아래 두기 위해, 지금도 형제들이 전 세계를 활보하고 있죠.”
엔레이드맨의 눈에 불꽃이 일렁였다.
“아버지, 저는 이번 일을 결코 넘어갈 생각이 없습니다.”
저 불꽃은 신재언이 각성시킨 증오의 불꽃이었다. 증오로 힘을 얻게 된 그들은 항상 증오와 욕망을 마음속에 담아두고 살았다.
“마더는 제가 만든 검은 태양을 언급했습니다. 그에 대응하지 않는다면 저, 엔레이드맨의 명예가 실추되겠죠. 제 이름이 어찌 되는 건 상관없지만, 그로 인해 세계를 지배하실 아버지의 명예에 조금이라도 흠이 생긴다면… 그것은 절대로 용서할 수 없습니다.”
‘아이고, 두야…….’
흔들의자에 앉아 엔레이드맨의 말을 듣던 재언은 눈을 감고 이마를 짚었다. 아주 골머리를 썩이게 만드는 자식들이다.
무슨 얘기만 하면 일단 세계를 지배하게 될 거라는 걸 전제로 대화가 시작된다. 환장할 지경이었다.
말이 통할 것 같으면서도 통하지 않았다. 이건 엔레이드맨뿐만이 아니라 다른 자식들도 마찬가지였다.
세계를 지배하고 싶은 게 아닌데, 이미 ‘평행 세계 신재언’이 그러겠다고 난리 친 일 아닌가.
이쪽은 평범하고 긴 생활을 안정적으로 보내고 싶을 뿐이었다.
“그리고…….”
엔레이드맨이 냉소를 지었다. 지나치게 차가운 표정이었지만 재언이 보기엔 어린아이가 상처받고 싶지 않은 마음에 가면을 쓰고 연극을 하는 걸 보는 기분이었다.
“저 남자가 박주현이 되고 싶다고 하면… 하라고 하면 됩니다. 마더가 그를 자식이라 믿고 싶다면 믿으면 됩니다. 저는 말리지 않아요.”
엔레이드맨은 자식 중에서 재언의 말을 가장 잘 듣고 충성도가 높았다. 말 잘 듣는 장남 포지션을 취하고 있지만, 사실 그가 정말 말을 잘 들었다면 범죄 빌런 조직들을 뒤에서 조종하는 짓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개개인의 복수와 일반인 피해를 최소화하라는 재언의 통제에 눈치를 보면서도 나쁜 놈들을 벌하는 것까진 굳이 간섭하지 않겠다는 재언의 뜻을 교묘히 이용했다.
그렇게 자식들은 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은 선에서 범죄 조직들을 움직이며 세력을 키웠다.
“걸어오는 싸움을 피하진 않을 것입니다. 저에게 부모로서 존경받아 마땅하신 분은 오로지 위대하신 아버지, 단 한 분뿐이십니다. 그리고 저희는 아버지의 명예를 위해서라면 이 한목숨 다 바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낳지도 않은 불효자 놈들 때문에 아주 머리가 아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