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근하는 빌런-276화 (276/324)

276화

엔레이드맨과 마더의 관계 때문에 골머리를 적지 않게 앓았지만 당장 해결 방법은 떠오르지 않았다.

무심한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 출근할 시간은 닥쳐왔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출근한 재언에게 남무혁이 다가왔다.

출근하자마자 퇴근 후에 술 한잔 마시러 가지 않겠냐고 말하는 그의 제안을 재언은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이번에도 그가 승진 목록에서 빠졌다는 사실이 확정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이번엔 무혁의 부사수였던 후배 사원이 입사한 지 3년이 되자마자 주임을 달았다.

‘오늘 끝나고 집에 오면 민재 씨가 자칭 박주현에 대한 자료를 조사해서 준다고 했는데……. 남무혁 씨 꼴을 보니 술자리가 빨리 끝날 것 같진 않군. 엔레이드맨도 그렇고 이쪽은 이쪽대로 먹구름이 잔뜩 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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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 후, 재언은 회사 주변에 괜찮은 곱창구이 식당에 들어가 소주를 다섯 병이나 주문하는 남무혁을 힐끔 살폈다.

그는 요즘 근심이 많은지 얼굴이 해쓱하고 피부가 푸석푸석했다. 몇 주 만에 급격하게 노화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아이돌 팬 활동이 가장 행복하다고 밝게 말하던 성격 좋은 남자는 온데간데없고 연거푸 술을 들이켜며 하소연하는 사람만이 남아 있었다.

“재언 씨는 또 승진 얘기가 나오고 있죠?”

“운이 좋았습니다.”

“운도 실력이에요. 줄 잘 타는 것 또한 실력이고요…….”

재언이 두 잔을 마시는 동안 한 병을 해치워 버린 남무혁이 또다시 술병을 들어 올렸다. 신경이 다른 곳에 있었던 재언은 상황을 눈치채자마자 화들짝 놀라 그의 손에 들린 술병을 빼앗으려 팔을 뻗었다.

“무혁 씨, 잠깐 진정해요. 너무 그렇게 급하게 마시면…….”

“괜찮아요. 괜찮아! 요즘 술을 안 마시면 잠이 안 와서 그래요. 이렇게 먹는 것도 다~ 익숙해졌어요, 신 주임님. 아니… 이제 대리님인가.”

“아직 승진한 것도 아니고… 말만 나왔을 뿐인데요. 뭘.”

남무혁은 불판 위에서 쪼그라들며 익어 가는 곱창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전 아직도 남 사원이에요.”

“무혁 씨… 다음엔 좋은 기회가 올 겁니다.”

“기회 따윈 오지 않아요! 저도 제 몰골이 다른 사람들에 비해 눈에 띄는 편이라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것에 굴복하지 않으려고 남들보다 배는 더 열심히 했어요. 이번에 팀장님도 승진은 따 놓은 거라고 말씀하셨는데……. 대체 왜.”

그는 머뭇거리는 재언의 손에서 술병을 빼앗아 병째로 벌컥벌컥 들이켰다. 순식간에 두 병을 해치워 버린 그의 얼굴이 지나치게 새하얘서 걱정스러웠다.

“왜 저만 아직도… 왜.”

그 부분은 재언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회사 내 남무혁의 인사 평가는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그는 성격이 친절하고 팀원들과 불화 없이 두루두루 잘 어울리는 사람으로 유명했다.

패션 센스는 남들 보기 부끄러웠지만, 그 또한 요즘은 패션 관련 회사에서는 별 문젯거리가 되지 않았다. 그런 모습을 개인의 개성이고 취향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대체 왜 저만 이렇게 계속 뒤로 밀려나는 걸까요? 그렇게 노력했는데 대체 왜…….”

“남무혁 씨…….”

지금의 그는 시름시름 앓는 것도 모자라 무슨 일에도 비관적인 우울한 남자로 각성해 버렸다. 하긴, 후배였던 이가 이제는 자신보다 상급자가 되었다면 재언도 견디기 힘들지도 모르겠다.

이 상태에서는 재언이 위로해 봤자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 듯했다.

“우리는 동기잖아요, 재언 씨. 교육생 때 우리, 같은 교육실에 있었죠? 그때까지만 해도 분명히 같은 위치였는데 지금은 따라갈 수 없는 커다란 벽이 놓였어요. 재언 씨… 당신과 제가 다른 게 뭘까요? 외모? 키?”

남무혁이 재언의 손을 잡고 매달리면서 울먹였다. 단지 외모 때문에 승진한 것은 아니었지만, 남무혁은 사소한 거 하나라도 차별점을 찾고 싶은 모양이었다.

심란한 표정으로 그런 남무혁을 바라보던 재언은 한숨을 깊게 내쉬면서 그의 잔에 술을 따라 주었다.

결국, 남무혁은 재언이 술을 한 병 비울 때까지 4병을 연거푸 들이켠 뒤 진탕 취해서 제대로 몸을 가누지도 못하게 되었다.

‘예전에도 이랬던 적이 있었는데…….’

물론 그때는 재언의 승진을 축하하는 자리였고 분위기가 이렇게 우중충하지 않았다.

‘그런데… 조금 이상하긴 해.’

어지간히 위쪽에 찍히지 않고서야 연차가 된 사원이 주임으로 승진하는 게 어려울 리 없다. 그 옛날 김 대리도 대리로 승진했는데, 남무혁은 그 정도로 일을 못 하는 사람도 아니었다.

이번에 남무혁을 제치고 주임으로 승진한 후배가 그보다 더욱 뛰어나게 일을 잘했냐 하면 그렇지도 않았다. 친한 사이여서가 아니라 객관적으로 봤을 때도 남무혁이 일을 더 잘했다.

이번만큼은 재언도 의아함을 감출 수 없었다.

‘이번 엔레이드맨 일이 끝나면 한번 알아보기나 해 볼까? 승진 못 하는 이유를 알아내고 넌지시 조언해 주면 되겠지. 분명 위쪽의 누군가에게 알게 모르게 찍힌 게 분명해.’

남무혁을 택시에 태워 보낸 뒤 뻐근한 어깨를 주무르며 재언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재언보다 키가 작긴 하지만 운동으로 다져진 몸은 무게가 상당해서 부축하는 데 조금 힘이 들었다.

일단 남무혁의 일은 엔레이드맨 일이 정리된 후에 알아보자고 생각한 재언은 아까부터 자신의 주변을 빙글빙글 도는 조각난 장난감에게 말을 걸었다.

“조각난 장난감. 이제 나타나도 돼.”

그러자 허공에서 불쑥 눈알이 나타나 재언에게 다가왔다. 조각난 장난감이란 걸 알지만, 밤하늘에 떠다니는 눈알은 어떤 호러 영화 남부럽지 않을 만큼 무서웠다.

재언은 조각난 장난감에게 눈알 두 개로 엔레이드맨과 자칭 박주현을 각각 감시하라는 명령을 내린 참이었다.

그녀가 이런 식으로 다급하게 찾아왔다는 건 둘 중 한 명에게 문제가 생겼다는 소리였고, 그건 아주 높은 확률로 엔레이드맨이 돌발행동을 했을 게 분명했다.

역시 예상대로 엔레이드맨은 마더와 자칭 박주현을 찾아갔단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그들이 머무는 넓은 저택 위를 기웃거리며 습격의 기회를 엿보는 것 같다고 했다.

재언은 허겁지겁 엔레이드맨을 찾아갔다. 엔레이드맨이 정말로 그의 친모를 죽이기라도 할까 조마조마했다.

그나마 다행히 그는 아직 아무 짓도 저지르지 않은 채 가로등 위에 서 있기만 했다. 재언이 가로등 아래로 다가가 그를 불렀다.

“엔레이드맨.”

그러자 재언의 앞에 가로등으로 향하는 계단이 하나둘씩 나타났다. 사실 이미 재언이 엔레이드맨을 발견하고 다가가는 동안 그의 결계인 둠(doom) 속에 들어와 있었다.

가로등 불빛 때문인지 엔레이드맨의 낯빛이 유독 하얗게 보였다.

“사실은 신경 쓰였던 거지? 그렇게 신경 쓰이면 그들을 한번 만나 보는 게 어떠니.”

부드러운 말투로 타이르는 재언의 말에 엔레이드맨은 저택을 노려보는 눈빛을 거두지 않은 채로 대답했다.

“오늘 검은 태양 본사에 마더가 찾아와 선전포고했다고 전해 들어서 온 것뿐입니다. 감히 면전에 대고 시비를 걸어오다니……. 받아 주는 게 인지상정이기에 찾아왔습니다. 어떻게 하면 그들을 절망의 지옥에 빠트릴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마더가 벌써 움직여 검은 태양을 찾아가 들쑤신 모양이다. 유혈사태가 벌어졌다는 속보가 뜨지 않았다는 것으로 보아 아직은 쌍방 간 피해는 없는 듯했다.

재언은 강한 체하는 엔레이드맨을 어떻게든 달래 보려 애썼다.

“엔레이드맨. 괜찮으니까 마더와 이야기를 나눠 봐.”

“…….”

재언의 말에 엔레이드맨은 대답하지 않고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한참 동안 침묵했다.

그가 입술을 달싹이며 겨우 말을 꺼내려던 그때, 넓은 저택의 정원으로 누군가가 나왔다. 타이밍 좋게 나온 이들은 마더와 자칭 박주현이었다.

“널 괴롭혔던 놈들은 누구도 멀쩡하게 살 수 없을 거야. 그러니까 우리 아들… 너무 걱정하지 마.”

마더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은은하지만 매우 또렷했다. 그래서 불행히도 엔레이드맨과 재언이 서 있는 가로등에까지 목소리가 닿고 말았다.

“어머니…….”

“걱정하지 마. 엄마가 지켜 줄게.”

세 살, 납치당해 잃어버린 금쪽같은 자식의 그때 당시 나이였다. 그 뒤로 사방팔방을 돌아다니며 아들의 흔적을 찾았지만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한평생 함께하고 싶었으나 너무나 많은 시간을 자식과 떨어져 지냈던 마더의 목소리에 물기가 어렸다.

“엄마는… 계속 꿈꾸고 있었어. 그날 우리 부부가 어째서 동시에 차 밖으로 나갔을까. 애 아빠만 보내도 됐었는데… 왜 우리 주현이를 지키지 못했을까……. 늘 후회하면서 살았단다.”

아들을 잃고 많은 시간이 흐른 마더의 머리카락과 얼굴 곳곳에 세월의 흔적들이 엿보였다.

“그래도 제발 살아 있어 주길 바랐어. 혹시 너무 어릴 때 잃어버려 기억을 못 하는 건 아닌지, 그래서 엄마 품에 돌아오지 못하는 건 아닌지… 매일 신에게 빌었단다. 제발 우리 아들이 살아만 있어 달라고. 어디서 굶고 다니지 말고, 여름에 시원하게, 겨울에는 따뜻하게 지내기를 기도했단다. 조금이라도 인간답게, 행복하게 살아 달라고 빌었어.”

그녀의 간절한 기도에도 신은 무심하게 모두 들어주지 않았다. 섬 주민들은 엔레이드맨을 겨울에는 가장 추운 곳에서, 여름에는 가장 더운 곳에서 지내게 했으며 쉬는 날도 없이 궂은 일을 시켰다.

집도 주지 않고 정자 아래에 거미줄과 벌레가 가득한 곳에 종이 박스를 깔고 겨우 잠이 드는 날이 대부분이었다. 그 혹독했던 십여 년을 버텨 살아온 것 자체가 기적이었다.

“부디 네가 행복하길 바라면서 보육원을 차릴 때도 네가 이 정도로 누리고 살았으면 좋겠다는 마음뿐이었어. 엄마는 네가 다시 돌아와서 너무 기뻐……. 네가 엇나가지 않고 훌륭한 사람이 되어서, 그냥, 그것만으로도 너무 기뻐.”

“어머니…….”

“그렇게 힘든 시련을 겪고도 착하게 자라서 정말 고맙단다……. 하늘에 네가 조금이라도 괴롭지 않기를 계속 빌었어.”

하지만 엔레이드맨은 아주 괴로웠고, 누구보다도 강한 빌런으로 각성할 만큼 증오의 불길을 태웠다. 마더가 빌었던 기도는 어느 것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등을 보이고 선 탓에 엔레이드맨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볼 수가 없었다. 다만, 울고 있는 마더와 그녀를 끌어안은 자칭 박주현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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