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7화
딸의 손을 잡고 가는 단란한 가족의 뒷모습을 보며 엔레이드맨이 말했었다.
“이제 됐어요, 아버지.”
어떤 남자를 제 아들이라고 굳게 믿고 끌어안은 마더를 한참 동안 쳐다보더니 나직하게 속삭였다.
“이제 됐어요, 아버지.”
재언은 그때와 마찬가지로 무덤덤하게 체념을 말하는 그의 등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자신의 존재가 가족들에게 얼마나 독이 되는지 잘 아는 사람의 뒷모습이었다.
그 때문에 지금 당장 마더와 이야기해 보라고 억지 부리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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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회사에 출근해 사내 메신저에 로그인한 재언은 남무혁이 아직도 오프라인인 것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젯밤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출근에 지장을 준 것인가 걱정스럽기도 했다.
남무혁에게 연락해 볼까 고민하며 탕비실에서 커피를 내리려고 할 때 남무혁과 같은 인사팀 동료가 들어왔다. 텀블러를 손에 든 채 세상에서 가장 피곤한 사람의 표정을 짓던 그는 재언과 인사를 나눈 뒤 잡담을 떨기 시작했다.
얼굴만 조금 아는 사람이어도 탕비실 만남은 누구든 절친한 사이로 만들었다.
“안녕하세요. 신 주임님.”
“안녕하세요, 정 주임님. 오늘만 지나면 주말이에요.”
“네… 금요일 퇴근부터 일요일까지 시간이 느리게 갔으면 좋겠어요.”
“진짜요.”
시답지 않은 대화를 나누며 재언은 이번에 탕비실에 새로 들어온 커피 머신의 버튼을 꾹 눌렀다.
이제 제 돈으로 커피믹스를 사지 않아도 된다며 임 과장이 아주 좋아했었던 기억이 났다. 카페에서 사 먹는 것보다는 훌륭하지 않지만, 어쨌든 아침잠을 깨우는 덴 탁월했다.
“그러고 보니까… 남무혁 씨가 메신저 오프라인이던데, 아직 출근 안 했습니까?”
“아, 오늘 아파서 병가 내셨다고 하더라고요.”
정 주임이 주변의 눈치를 보다가 슬그머니 다가와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왜, 아시잖아요. 이번에도… 삐끗한 거.”
사실은 정 주임이 이번에 승진한 남무혁의 후배였다. 저번 주까지만 해도 사원이었던 그는 이번에 주임이 되었다.
그의 단점을 굳이 뽑자면 말투가 가볍다는 것뿐이었고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일 처리도 큰 실수 없이 잘 해내기도 하고 말이다.
단지 월급만 꼬박꼬박 받고 다니자는 마음가짐으로 근무하고 있어 승진에 딱히 욕심이 없기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그것 때문에 팀장님도 남 선배님이 병가 낸다고 하셨을 때 바로 수긍해 주신 거예요. 푹 쉬고 오라고까지 하셨다니까요. 저도 엄청 눈치 보여요……. 솔직히 이번에 굳이 저 말고 남 선배님이 올라간 게 더 나았을 거 같아요.”
정 주임이 한숨을 깊게 내쉬면서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하긴, 이번 소문의 당사자가 되었으니 마음이 불편할 만도 했다.
그는 할 말이 더 남은 듯 계속 탕비실 입구를 힐끔 쳐다보면서 머뭇거렸다.
“…그리고 그 소문이 있잖아요. 남 선배님이… 계속 승진 탈락하는 거. 그 사람 때문이래요.”
“그 사람?”
바로 그 순간 휴게실 안으로 임 과장이 들어왔다. 그녀는 텀블러를 들고 환하게 웃으며 탕비실 안의 두 사람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오늘도 좋은 아침이에요.”
“아, 임 과장님…….”
“안녕하십니까.”
정 주임이 눈동자를 빠르게 굴리더니 더 이상 이야기를 나눌 수 없다고 판단했는지 커피가 담긴 텀블러를 들고 어색하게 웃었다.
“저는 그럼 이만 업무 준비하러 가 볼게요. 임 과장님, 신 주임님, 오늘도 파이팅해요.”
“그래요.”
임 과장이 방긋 웃으며 정 주임과 인사를 나눈 뒤 재언에게 말을 걸었다.
“아휴, 정 주임은 사람이 싹싹하고 성격이 괜찮아서 좋다니까. 저번에 회식 자리에서도 사람들 챙기는 게 아주 보기 좋더라고. 업무야 뭐 차차 익혀도 누구나 다 중간 이상은 하니까…….”
“정 주임님이 성격이 좋긴 하죠.”
“그렇다니까요. 아, 재언 씨 오늘 한잔하러 갈래요? 오늘 옆 부서와 술 약속을 잡았어요.”
그녀의 제안에 재언은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 오늘 약속이 있어요.”
사전에 언질도 없이 당일 통보한 술자리라는 자각은 있는지 임 과장은 기대하지 않았단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와 함께 탕비실을 나가 자리에 앉은 재언은 남무혁에게 안부 차 문자를 보내 놓았다.
그리고 업무를 시작했지만, 오늘따라 집중이 되지 않아 업무 속도가 느렸다. 어젯밤에 본 엔레이드맨의 등이 눈앞에 아른거려서 일에 집중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재언 씨, 오늘부터 신입 들어오는 거 알지? 미안한데 신입 관리 좀 부탁할게……. 아니, 아예 강사로 들어가는 게 아니라 아침에 출석 체크랑 자료 나눠 주는 것만 해 주면 돼. 기기에 이상이 없는지만 체크해 주고…….”
‘인사팀, 총무팀은 뭐하고?’
박 팀장이 직접 찾아와 부탁하는 일에 거절하기는 힘들어서 고개를 끄덕였는데, 그렇다고 업무를 줄여 준 것도 아니라서 오늘 퇴근이 막막했다.
회사에서 한 달 전부터 대대적으로 공개채용을 모집해 이전에 비해 상당히 많은 신입이 들어오는 모양이다. 홍보팀에 있는 자신에게까지 손을 빌리다니.
‘이런 회사 차라리 신입 때 도망가세요…….’
교육생 한 명씩 찾아가 이야기해 주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자신도 그랬듯이 취업하는 것만으로도 잔뜩 꿈에 부풀어 월급 받는 날만 기다리는 새내기들에겐 지금 전혀 통하지 않을 말이었다.
사실 이번 일은 사내 남자 사원 중 가장 잘생긴 사원 1위에 뽑힌 신재언을 얼굴마담 역할로 기용한 것이었다. 신입사원들의 사기진작과 유혹하는 용으로 쓰자는 임원들의 술수일 뿐이었다.
그 전략은 아주 잘 먹혀서 재언이 교육실에 들어와 출석 체크를 시작하자 교육생들, 특히 여성 교육생들의 안광이 번뜩였다.
“교육은 총 3개월간 진행됩니다. 한 달 동안 지각이 세 번 이상이면 그대로 불합격 처리되며, 교육 테스트 70점 미만일 시 입사가 어려워질 수 있습니다. 교육비는 공고된 월급의 80%가 지급됩니다. 곧 여러분들과 함께할 팀장님이 세 분 들어오시는데 입사할 때 세 분 중 한 분이 여러분들의 팀장님이 되시는 거니까 참고해 주세요.”
재언은 왜 홍보팀인 자신이 이 일을 맡게 되었는지 처음엔 이해할 수 없었다가 교육생들의 시선이 아주 뜨겁게 불타오르는 것을 보며 약간 짐작했다.
아마도 다음엔 90%의 확률로 고객 CS팀 백지연 주임이 들어올지도 모르겠다. 백지연 또한 사내 여자 사원 중 가장 예쁜 사원 1위에 뽑힌 사원이니까.
대체 그런 쓸데없는 통계는 누가 내는지 모르겠으나 그게 누구든 굉장히 형편없고 무의미하기 짝이 없었다.
신입사원들이 쓸 태블릿PC와 노트북을 나눠 주고 인터넷 연결부터 사내 메신저, 프로그램이 제대로 설치되었는지 확인해 주고 오류를 재설정하는 데만 두 시간이 넘게 걸렸다.
오전 시간을 완전히 날리게 된 재언에게 남은 건 밀린 업무와 오후에 추가될 업무들뿐이었다. 망할 회사는 쥐꼬리만 한 월급을 주면서 그보다 더 일을 많이 하기를 원한다.
‘언젠간 폭파해 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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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좀 늦은 겁니다. 미안해요. 기다렸어요?”
“아니에요. 재언 씨한테 연락이 올 때까지 사무실에 있었어요.”
퇴근 후, 차민재와 만나기로 한 시간을 넉넉하게 잡아서 오후 8시로 정했는데, 회사 건물에서 나와 마중 나온 그의 차에 타니 벌써 9시 40분이었다.
대략 1시간 40분 정도를 바람맞힌 셈이라 미안해하는 재언을 차민재는 너그럽게 용서하며 오히려 달래 주기까지 했다.
“배고프지 않습니까?”
“사실 좀 고파요. 민재 씨랑 먹을 생각으로 팀원들이 피자 시켰을 때 침만 삼키고 있었단 말이에요.”
“오… 그러면 재언 씨, 저녁으로 뭘 먹고 싶습니까?”
시간이 너무 늦어서 데이트는 이미 물 건너갔고 둘 다 혼자 사는 집이 있는데 호텔에 가는 것도 조금 돈 낭비하는 기분이 들어서 별로였다. 물론 차민재의 집이 호텔보다 좋고 편한 것도 있었다.
재언은 괜히 데이트를 망친 것 같아서 머쓱해진 기분에 목덜미를 주무르며 입을 열었다.
“그러면… 피자나 시켜 먹어요. 그 냄새가 잊히질 않아요.”
“좋아요.”
그에 차민재는 매력적으로 미소 지은 뒤 재언의 목덜미를 차가운 손가락으로 쓰다듬었다.
“그것보다… 신입 중에 재언 씨한테 추파 던지는 놈들은 없었습니까?”
“하하…….”
없진 않았다. 하지만 자신의 인기를 자랑했다가 여러 의미로 피곤해질 것을 알기에 재언은 어색하게 웃으며 앞을 바라봤다. 집에 도착할 때쯤 음식을 받아 볼 수 있도록 미리 주문해 놓자는 마음으로 배달 어플을 뒤적거렸다.
한참이 지나 주문을 완료한 재언은 차민재를 힐끔 쳐다보며 물었다.
“민재 씨. 혹시… 마더에 대해 뭐 들은 것 없습니까?”
차민재가 부드럽게 핸들을 돌리며 대답했다.
“이레일이 능력 제한에 걸려 많이 심심한 모양이더군요. 이것저것 조사해 왔던데 아주 흥미로운 게 있어서요. 그 남자… 보육원에서는 박주원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답니다. 고등학교 재학 중에 트러블이 있어 퇴학당했고요.”
그의 부드러운 웃음도 지금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리고… 마더는 친자 확인을 하자는 딸의 말에도 한사코 거절 중이라더군요.”
“하아…….”
재언은 머리가 아팠다. 엔레이드맨만 떠올리면 두통이 심하게 이는 느낌에 손바닥으로 이마를 짚었다.
차민재는 신호에 걸려 잠시 정차한 김에 팔을 뻗어 그런 재언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밤인데도 날이 더워서 그런지 그의 머리카락이 살짝 땀에 젖어 있었다.
“재언 씨는… 엔레이드맨에게 아주 특별한 감정이 있나 보네요. 그에 관한 것이라면 평소보다 더욱 과민 반응하고 있어요.”
차민재는 고개를 살짝 들어 올려 자신과 눈을 마주치는 재언의 뺨을 손끝으로 간질였다.
“재언 씨, 그에게 죄책감을 느끼고 있습니까?”
“…….”
그의 말에 재언은 눈을 감았다.
“숨겨 봤자 다 알고 있을 테니까 솔직히 말할게요. 맞아요……. 전 엔레이드맨을 각성시킨 걸 후회하고 있어요.”
‘어쩌면 마약왕보다 더…….’
다시 눈을 뜨자 마주친 차민재의 눈에 재언은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평행 세계’에서도 엔레이드맨의 부모는 아들을 찾는 걸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결국 어느 한 섬에서 제 아들을 찾아냈어요. 섬 주민들이 아들을 주워 돌봐 줬다고 알려졌죠.”
신호가 바뀌어 고개를 돌린 차민재가 액셀을 밟으며 운전석과 조수석의 창문을 열었다. 재언은 도저히 참지 못하고 뒷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차 안에서 담배를 무는 건 굉장히 무례하고 매너 없는 행동이었지만, 차민재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친부모를 찾은 아들은 마더를 만나 능력을 각성한 뒤 히어로가 됩니다. 모두에게 사랑받고, 가족에게도 떳떳한 S급 히어로가요.”
모자(母子) 히어로로 유명하며 ‘신재언’을 항상 방해하고 광대와 대적했던 인류의 희망.
그게 바로 신재언과 만나지 않은, 평행 세계에서의 엔레이드맨이었다. 증오로 각성한 지금의 능력이 더 강하겠지만, 그는 가족의 앞에 떳떳한 모습으로 행복하게 살아갔다.
재언이 기억하는 평행 세계의 엔레이드맨은 비록 불우한 과거를 가지고 있지만, 부모와 만났고 히어로가 되었다. 지금처럼 범죄를 저지르지도, 빌런이 되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신재언이 개입해 그에게 희망을 불어넣는 바람에 섬 주민들을 자극해 버렸다. 섬 주민들에 의해 죽을 뻔해 절망과 증오심이 커진 그가 능력을 각성했기에 비극이 시작되었다.
“…저를 만나지 않고 마더를 만났다면……. 어쩌면 엔레이드맨은 히어로가 됐을지도 모릅니다. 전 제가 가진 능력이 그를 빌런으로 만든다는 걸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요……. 엔레이드맨이 저를 만나지 않았다면 그가 절망에 빠질 일은 없었을지도요.”
재언은 담배를 입에 물었다. 참으로 잔인한 이야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