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근하는 빌런-279화 (279/324)

279화

재언이 맡았던 주얼리 런칭 프로젝트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결과적으로 팀원들 몇 명은 승진하면서 각각 다른 프로젝트팀을 배정받았고 그건 재언도 마찬가지였다.

이번에 재언이 들어간 프로젝트는 해외 지사와의 합동 업무였다. 거기다가 프로젝트의 부책임자가 되었다.

이번 프로젝트에서 큰 문제만 일으키지 않는다면 다음 승진 대상 확정이라는 보상까지 약속되었다. 그만큼 규모가 큰 장기 프로젝트라 회사에서 거는 기대가 크다는 뜻이었다.

재언은 승진도 좋지만, 또다시 야근을 밥 먹듯이 해야 할지도 모른단 불안감이 먼저 들었다.

“이번 프로젝트 땐 재언 씨를 내가 있는 팀으로 보내 달라고 그렇게 부탁했는데 결국 안 됐네. 정말 아쉽다, 재언 씨.”

임 과장이 잔뜩 아쉬워하며 재언의 어깨를 툭툭 쳤다. 주임이었을 때부터 재언을 매우 마음에 들어 했던 그녀는 장기 프로젝트에 재언을 빼앗기자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눈빛을 보냈다.

그런 임 과장을 뒤로하고 재언은 새로 꾸리게 된 프로젝트 팀원들끼리 점심을 먹으러 회사 근처 중식당으로 향했다.

“저 신 주임님 알고 있었어요. 본사에서 엄청 유명하잖아요.”

“저도요.”

팀원 중 유일한 여성인 홍 주임이 너스레를 떨며 어색한 분위기를 조금이나마 희석하기 위해 애썼다. 문제는 신재언이 대화의 주제로 올라왔다는 점이다.

옆에 앉아 있던 해외지원팀 김성종 사원이 격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입사한 지 이제 3개월 정도밖에 되지 않은 하얀색 털이 듬성듬성 자란 따끈따끈한 햇병아리 같은 신입이었다.

재언은 자신의 앞에 놓인 새우튀김을 입에 넣으며 시선을 피했다. 아마도 이다음으로 ‘잘생겼다’로 시작해서 ‘일도 잘하고 성격도 좋다.’라는 내용의 칭찬이 쭉 이어지게 될 것을 예상했기 때문이다.

몇 번이고 팀이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레퍼토리였다. 처음에는 이런 식으로 자꾸 띄워 주니까 부끄러워서 어색하게 웃기만 했는데 지금은 딱히 부정하지도 않고 시선만 피할 만큼 뻔뻔해졌다.

하지만 시선을 돌리자마자 보인 것에 재언은 차라리 팀원들을 보며 머쓱해하는 쪽이 더 나았을지도 모르겠다고 후회했다.

식당 벽면에 설치된 TV 화면에서 마더와 마더의 아들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20년 넘게 잃어버린 아들을 드디어 찾은 감동적인 이야기는 대중들이 매우 열광할 만한 소재였다.

심지어 보육원 출신의 가난하게 자라온 남자가 하루아침에 몇 백억 재산을 가진 S급 히어로의 아들이 되었다는 성공 스토리는 누구라도 한 번쯤 꿈꿔 볼 이야기였으니까 말이다.

- 저는 무척 행운아입니다. 지금까지 저를 찾아 주시고 사랑해 주신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사랑스러운 여동생이 있으니까요. 만약 가족들이 저를 포기했다면 지금 이 자리에 결코 있을 수 없었겠죠.

저 모습을 보자 재언은 간절하게 담배를 피우고 싶어졌다.

‘저것도 어떻게든 해야 할 텐데……. 마더가 무슨 생각으로 저런 놈을 박주현으로 인정했는지 진의를 확인할 수 없어서 답답해도 움직이기가 쉽지 않아.’

엔레이드맨은 그날 이후 가족에 대한 미련을 모두 버린 듯이 행동했다. 하지만 재언은 아무도 들어올 수 없는 결계 속에 꼭꼭 숨어 버린 세 살짜리 엔레이드맨이 어디선가 길을 잃고 울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울화통이 터진 재언이 답답한 마음에 TV 화면에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한참 동안 재언의 얼굴에 금칠하던 해외지원팀 막내가 멍하니 TV를 보다가 잔뜩 못마땅한 얼굴로 젓가락을 까딱거렸다.

“아~ 저놈 진짜 부러워요.”

팀원들의 시선이 전부 막내에게 쏠렸다. 이제 막 젓가락을 내려놓고 티슈로 입술을 닦던 남 대리가 모두를 대신해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

“뭐가 부러워요?”

“저놈이요. 지금 TV에 나오는 박주원이요.”

“박주원? 마더의 아들이요?”

“네. 고등학교 동창이었어요. 그때 이름은 박주원이었고요. 저랑 같은 반이었고 제가 반장이었거든요. 진짜 골치 아팠었는데 저렇게 성공할 줄 아무도 몰랐어요. 이럴 줄 알았으면 연락처라도 교환해 둘걸.”

신입은 한참 동안 마더와 그의 아들에 대해 연신 부럽다고 중얼거리다가도 저놈은 상종 못 할 놈이었다느니 기분 나쁜 자식이었다느니 같은 말을 덧붙였다.

“S급 히어로들은 의뢰 한 번에 몇 천만 원이라면서요. 부자 엄마가 하늘에서 똑 떨어지다니. 진짜 부러워요.”

“뭐… 그렇긴 하겠지.”

“그래도 전 진짜 감동적이던데요. 기사 보고 울 뻔했잖아요.”

눈치 없는 막내 사원으로 인해 테이블 위로 어색한 기류가 흐르자 분위기를 환기하는 홍 주임의 말을 끝으로 어색한 식사 자리가 끝이 났다.

회사 건물로 돌아가는 중에 각자 카페나 편의점을 들른다며 뿔뿔이 흩어지고 마지막엔 재언과 막내 사원만이 남았다. 건물 입구에 도착하자 재언은 뒷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며 막내 사원을 붙잡았다.

“성종 씨. 같이 담배나 피우고 들어갈래요? 흡연하시죠?”

“저야 좋습니다!”

어떻게 하면 신재언에게 줄을 댈 수 있을까 기회만 엿보던 야심 많은 막내 사원은 재언의 권유에 냉큼 따라갔다.

건물 밖에 있는 흡연 부스 안으로 들어가 잡다한 소재로 이야기를 끌어가다가 은근슬쩍 본론을 꺼냈다. 최대한 그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도록 가벼운 투로 물었다.

“아까… 마더의 아들과 동창이라고 했잖아요. 그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한창 이슈가 되고 있는 주제여서 그런지 그는 재언이 궁금해하는 게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한 듯 가볍게 대꾸했다. 아무리 봐도 입이 그리 무거운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음침했죠.”

식당 안에서는 사람이 많아서 그나마 단어를 고르고 고른 거였는지 그는 재언이 묻자마자 신랄하게 떠들었다.

“반 애들뿐만 아니라 전교생이 그 자식을 기분 나빠했어요. 여자애들 물건을 허락 없이 만지면서 실실 웃었거든요. 같이 다니는 놈들도 다 질이 나빴고요. 뭐 어디 조직에 들어갈 거다, 조폭이 될 예비 범죄자라며 말이 많았어요.”

김성종이 담배를 입에 물며 어이없다는 듯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세상 깨끗한 척, 착한 척은 다 하면서 S급 히어로 엄마와 만나 행복하다고 말하는 꼴이 그렇게 웃길 수가 없어요. 고등학교 퇴학까지 당한 놈이.”

김성종은 그런 놈이 이제 부모 돈이나 펑펑 쓰면서 세상 부러울 것 없이 살아갈 걸 생각하니 배가 아파 죽겠다며 크게 한숨을 쉬었다. 왠지 모르게 같은 반이었다는 것만으로 이렇게까지 불만을 품은 건 아닌 듯했다.

재언이 의아한 눈빛을 보내자 그제야 자신의 말투가 과했다는 것을 알아차린 그가 머쓱하게 웃었다.

“사실 같은 보육원이었거든요.”

두 사람의 접점은 그게 끝인지 보육원 안에서도 박주원과는 말 한번 제대로 나눠 본 적이 없었다고 했다.

그에게서 더 이상 알아낼 것은 없다고 판단한 재언은 이번엔 다른 쪽을 파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

아름다운 노랫소리가 ‘파도치는 절벽 위 별장’에 울렸다. 뮤지컬 무대 위에서 노래 부르는 소프라노를 그대로 옮긴 것 같은 노랫소리였다.

“저 코루루가 왔습니다. 위대하신 아버지. 제가 보고 싶지 않으시던가요?”

마침 재언도 엔레이드맨을 만나러 지금 막 별장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에게 꼼짝없이 붙잡혀 버렸다. 체구는 연약하기 그지없으면서 팔심은 어찌나 좋은지 재언이 벗어나려고 아무리 힘을 줘도 문어처럼 달라붙어 애교를 떨었다.

결국, 벗어나기를 포기한 재언이 다른 쪽 팔을 들어 머리를 쓰다듬어 주니 어린 자식이 부모에게 칭찬받는 듯한 표정으로 변했다.

잠깐 쓰다듬을 받던 그녀는 만족한 얼굴로 떨어진 뒤 양팔을 벌려 빙글빙글 돌았다. 그녀가 입은 흰색 드레스가 화려하게 펄럭였다.

그 모습을 보던 재언의 눈에 한 가지 이상한 점이 띄었다. 흰색 옷에 붉은 꽃이 자수처럼 새겨진 드레스인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별처럼 박힌 보석에 무언가가 묻어 있는 거였다.

“코루루. 드레스에 뭐가 묻었는데?”

“이건 코루루의 무대를 더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 죽은 남자의 핏자국이랍니다. 발목을 자르고 천장에 매달아서 천천히 내려오도록 만들었지요. 꽁꽁 얼린 다음 무대의 클라이맥스 때 녹아내리게 했더니 마치 피가 비처럼 내려 코루루의 무대를 화려하게 장식해 주었어요.”

괜히 물어봤다. 듣고 싶지 않았다. 그런 끔찍한 살인 얘기 따위는.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코루루의 이야기를 애써 무시하며 재언은 별장의 거실 안으로 들어갔다. 코루루도 그런 재언의 뒤를 쫄래쫄래 따라 들어온 뒤 소파에 앉아 어딘가 기분 나쁜 인형을 만지작거리는 귀신들의 성녀에게 달려갔다.

재언은 난로 앞에 비어 있는 흔들의자를 보며 귀신들의 성녀에게 물었다.

“엔레이드맨은?”

귀신들의 성녀는 저주 인형을 무서워하는 코루루를 배려해서인지 인형을 소파 옆 바구니로 던지며 대답했다.

“엔레이드맨 오라버니는 조직에 이상이 생겼다며 자리를 비웠습니다. 아버지께서 찾으시는 줄 알았다면 오라버니도 자리를 비우지 않았을 거예요.”

“어머, 엔레이드맨 오빠도 참… 그런 꼭두각시들을 생각보다 아끼는 모양이에요. 어차피 한번 쓰고 버릴 편리한 인형이 아닌가요?”

코루루가 불길한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귀신들의 성녀 역시 기분 나쁜 웃음소리를 내며 덧붙였다.

“그러게요. 위대하신 아버지의 세상을 만들기 위해 한 번 쓰고 버릴 무가치한 인간들. 죽어도 그대로 버리면 될 텐데요.”

그녀들의 웃음소리를 듣던 재언은 저도 모르게 소름이 돋아서 팔을 문질렀다. 그런 재언을 아는지 모르는지 코루루가 이번 사건에 대해 무언가 들은 게 있었던 듯 무대 위에서 연기하는 것처럼 말하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아아, 하지만 엔레이드맨 오빠 일은 정말 가슴이 아파요. 어쩜 그런 악독한 모자(母子)가 다 있을까요? 엔레이드맨 오빠의 마음에 대못을 박다니. 저 코루루가 용서하지 않겠어요. 그놈을 납치해서 체어맨 오빠의 고문실에 가둬 버리자고요.”

…자기 무대를 위해 사람을 죽인 이가 할 말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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