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2화
“이 일은 엔레이드맨에게 맡길 테니까 너희는 나서지 말고 있어.”
재언은 당장이라도 마더에게 달려가 시비 걸 것처럼 날뛰는 코루루를 진정시키느라 진땀을 뻘뻘 흘렸다.
코루루는 재언의 말에 불복할 수 없기에 더 나서진 않았지만, 소파에 털썩 주저앉으며 입술을 삐죽 내밀어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잔뜩 삐친 얼굴은 재언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나서야 풀렸다.
“그리고… 엔레이드맨이 별장으로 돌아오면 내게 찾아오라고 전달만 해 줘.”
“네, 아버지.”
“가시는 건가요?”
찾는 이가 없으니 늦은 시간까지 여기서 기다리는 것보단 1분이라도 더 잠을 자는 게 나았다. 재언은 성녀와 마녀의 배웅을 받으며 집으로 돌아왔다.
이번엔 차민재의 집이 아니라 자신의 집이었다. 워낙 애인의 집에 있는 시간이 많다 보니 어질러진 것 없이 깨끗했지만 여기저기 먼지가 뽀얗게 쌓여 있었다.
오늘은 집에서 자고 내일 놀러 가겠다는 내용의 문자를 차민재에게 보낸 뒤 화장실로 들어갔다.
“으음.”
재언은 거울에 비추는 얼굴을 보며 턱을 쓰다듬었다. 아무래도 내일 아침엔 면도하고 나가야 할듯했다.
다른 성인 남성들보다는 수염이 자라는 속도가 느린 편이라서 매일같이 관리하지 않아도 되지만, 가끔 꼼꼼하게 관리해 줄 필요는 있었다.
가볍게 씻고 나와 편한 차림으로 갈아입은 뒤 침대에 누웠다. 눈을 감고 잠이 들려던 순간, 재언은 다급하게 열린 문소리에 눈을 번쩍 떴다.
어둠 속에서 빛나는 안광을 번뜩이며 시선을 돌렸다. 현관이 열리지 않았으니 다른 쪽 문이 열린 것이다.
재언이 고개를 들어 침입자를 확인했다. 코루루였다. 그녀는 문을 열고 재언과 눈이 마주치자 허겁지겁 달려와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 아버지. 주무시는데 죄송해요. 이런 불충을 저지르다니.”
“아니, 아니야. 왜 그래?”
좀 놀라긴 했지만, 평소 같지 않은 코루루의 행동에 의아한 점이 더욱 컸다.
그녀가 아무리 나서기 좋아하고 즉흥적인 성격이어도 이 늦은 시간에 잠이 든 재언의 방을 불쑥 찾아올 정도로 예의 없지는 않았다. 이렇게까지 다급하게 재언을 찾아온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게 분명했다.
“아버지, 큰일 났어요. 엔레이드맨 오빠랑 마더가… 지금 한바탕 붙고 있다고 해요.”
“뭐!?”
어째서 하루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걸까. 재언은 검은색 티셔츠에 운동복 바지 차림에 급한 대로 낡은 카디건을 걸치고 코루루의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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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의 발단은 이러했다. S급 히어로 마더를 등에 업고 제 세상인 것처럼 고개를 뻣뻣하게 들고 다니던 박주원 패거리가 그동안 당한 걸 갚아 주겠다는 듯 검은 태양 조직원의 아내를 집단 폭행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동네에서 작은 호프를 운영하는 그녀는 늦은 오후에 장사를 시작하고 새벽에 마무리하곤 했다. 그날도 새벽에 퇴근 중이던 그녀를 어느 무리가 붙잡고 돈을 갈취한 뒤 폭행한 것이다.
골목길에 쓰러져 있는 그녀를 인근 상가 주민이 발견해 구급차를 불렀고 다행히 생명에 큰 지장은 없었다.
하지만 갈비뼈 두 대가 부러졌고 얼굴은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참혹했다. 게다가 얼굴을 맞으면서 머리 쪽에 충격이 있었던 탓에 현재는 의식이 돌아오지 않은 상태였다.
인근 CCTV 감식 결과 그녀가 직접적으로 폭행당하는 장면은 발견하지 못했다. 하지만 박주원 패거리들이 마약과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시비를 걸다가 그녀를 향해 저들끼리 손가락질하더니 기분 나쁜 얼굴로 쫓아가는 모습이 찍혔다.
검은 태양의 보스 원한이 엔레이드맨에게 도움을 요청한 지 4시간 만에 밝혀진 사실이었다.
“형님! 제 마누라가 대체 무슨 짓을 저질렀다고 그렇게 심한 짓을 당한 겁니까! 전 머저리같이 그놈들 짓인 줄도 모르고 태평하게 병문안이나 다녀왔습니다.”
험상궂게 생긴 남자가 원한의 앞에서 무릎을 꿇고 목에 핏대를 세우며 눈물을 흘렸다.
그는 박주원 패거리가 건든 여성의 남편이었다. 이를 갈면서 품 안에서 단도를 꺼내는 게 범상치 않아 보였다.
어느 남편이 아내가 그렇게 무차별적으로 폭행을 당했는데 가만히 있을 수 있을까. 그 마음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원한은 아직 때가 아니라며 그들을 진정시켰다.
하지만 손쓸 새도 없이 조직의 분위기는 고조되었다. 당장이라도 그 녀석들을 잡아, 드럼통에 가두고 콘크리트를 채운 다음 인천 앞바다에 빠트리지 않으면 터질 것만 같았다.
모두 낮에는 주식회사 흑천의 임원으로 얌전히 지내지만, 발톱을 숨기고 있는 야생 들개들인 것에는 변함없었다.
“그놈들 뒤에 누가 있는지 잊었어?”
“어차피 지 아들 새끼가 한 짓이 아니라고 딱 잡아뗄 게 분명한데 이대로 S급 히어로가 무섭다며 숨으실 겁니까?!”
부하의 말에 원한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조직원이 당한 것도 아니고 아무 힘없는 일반인이 가족이라는 이유로 험한 꼴을 당했다.
여기서 물러난다면 조직의 근간이 위태로울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아직 검은 태양은 더욱 성장해갈 수 있는 조직이고 건설사업도 성장의 윤곽이 조금씩 드러나고 있었다.
그때, 주저하는 원한의 뒤에서 어린 목소리가 들렸다.
“그냥 한판 붙지 그래?”
“…형님.”
덩치로 가득한 이들 중에서도 원한은 가장 어렸지만, 갑자기 그들 사이에 끼어든 소년은 그보다 훨씬 어려 보였다. 매캐한 담배 연기로 가득한 방에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이 상황과는 이질적인 외형을 가진 소년이었다.
소년을 형님이라고 부른 원한이 자리에서 일어나 상석을 넘겨주었다.
“마더는 내가 상대할 테니 넌 그놈들을 잡아 기강이나 다시 살려. 이대로 무너졌다간 곤란해.”
엔레이드맨이 다리를 꼬고 앉아 원한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의 눈빛에 원한은 고개를 끄덕이며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히어로와의 항쟁은 최대한 피하고 싶었지만, 언젠가는 이런 일을 맞닥뜨리게 될지도 모른다고는 생각했다.
일단 결정하고 나니 일은 속전속결로 진행되었다. 엔레이드맨이 결계 능력을 이용해 박주원 패거리의 위치를 빠르게 알아냈다.
요즘 제 세상인 것처럼 행동하고 다닌다는 게 맞았는지 그들은 S급 히어로를 믿고 마약에 취해 길거리에서 나뒹구는 중이었다. 그 안에 박주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패거리에 무슨 일이 생긴다면 마더에게 도움을 요청할 것이 분명했다.
엔레이드맨은 더 이상 마더가 두렵지 않았다. 피가 이어져 있을 뿐, 마더는 그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녀가 자신을 대체할 아들을 찾았으니 이제는 위대하신 아버지를 섬기는 데 온 정신을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주원이, 주원이 불러!”
검은 태양의 조직원들이 마약에 취한 놈들을 끌고 차에 태우는 사이에 무슨 수로 박주원에게 연락을 취했는지 그들이 인천항에 도착했을 땐 이미 S급 히어로 마더가 기다리고 있었다.
“역시… 조금만 기다리면 본색을 드러낼 줄 알았어……. 사람 목숨을 대체 뭐라고 생각하는 거냐.”
마더는 혼자였다. 사실 S급 히어로가 나설 땐 대부분 다른 하위급 히어로의 도움은 필요 없었기도 했다.
원한은 그때까지도 마더와 굳이 시끄럽게 대적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 컸다. 최대한 조용히 이놈들만 처리하고 끝내고 싶었다.
그는 마더에게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마더. 이놈들은 파렴치한 악당들이야……. 정의의 검으로 우리를 처단하고 싶은 거라면 일단 그 검으로 이 자식들부터 베어 봐. 이 녀석들한테 죄가 없다면 우리도 더 이상 손대지 않겠어.”
그러나 마더는 원한의 말을 들은 체도 하지 않고 검을 뽑았다. 거대한 심판의 검이 그녀의 손에서 찬란하게 빛났다.
성스러워 보이기까지 하는 검은 악당의 심장은 꿰뚫지만, 무고한 이는 상처 하나 생기지 않다고 하는 절대 영역의 검이었다.
그녀의 행동에 원한은 말이 통하지 않는다고 생각해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여기는 더 이상 인간이 끼어들 자리가 아니었다.
마더가 원한에게 검을 겨눈 채 발돋움했다. 하지만 마더의 검이 그에게 닿기 직전, 고요한 침묵이 둘 사이를 가두었다. 눈치챘을 땐 이미 그녀는 엔레이드맨의 둠(doom) 속에 들어온 상태였다.
엔레이드맨은 후드티의 모자를 꾹 눌러쓰고 헤드셋으로 고정한 채로 모습을 드러냈다. 마더는 소문의 엔레이드맨이 체구가 어린아이처럼 작다는 것에 놀라고 하늘을 뚫을 것 같았던 자신의 힘이 약해져 검신이 작아진 것에 또 한 번 놀랐다.
“허튼짓을!”
마더가 검의 방향을 바꾸어 엔레이드맨을 향해 휘둘렀다. 하지만 둠(doom) 속의 엔레이드맨은 신이나 다름없었다.
아무리 검이 그를 베어도 벤 것이 아니었고 공격도 전혀 먹히지 않았다. 게다가 하나둘씩 실현되는 악몽은 그녀의 마음속 공포를 건드렸다.
- 으앙- 으앙…….
“그만… 뭐, 뭐 하는 짓이야. 그만해!”
마더의 눈앞에서 갓난아이인 박주현이 괴물들에게 끌려가며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마더는 엔레이드맨의 악몽은 현실이 아니라는 건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었지만 울며 끌려가는 어린아이들의 모습을 도저히 외면할 수 없었다.
그것이 설령 환상일지라도. 현실에서 자신은 박주현을 구하지 못했으니까.
마더는 정의의 검을 내려놓고 악몽 속에서 아들을 구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몸부림쳤다. 괴물의 공격에 상처 입어가면서도 어린 아들을 껴안은 채 잔뜩 웅크렸다.
S급 히어로의 숨통을 끊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하지만 엔레이드맨은 이상한 표정으로 천천히 내려와 땅에 발을 디뎠다.
“버려, 버려! 그깟 같잖은 감정 따위 버리라고! 어차피 아들도 못 알아보면서, 어차피, 어차피…….”
자신은 마더에 대한 미련을 끊어 냈다. 빌런으로 각성한 자신이 그녀의 앞에 나타나 봤자 모든 게 파국으로 치달을 게 뻔할 테니까 말이다.
그래서 다 버렸다. 자신에게 남은 건 존경스러운 아버지와 같은 이상을 품고 있는 형제들뿐이었다.
- 아… 정말 나약하군요, 형님.
그때 갑자기 엔레이드맨의 귓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가 경악에 찬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마약… 왕!”
그와 동시에 한순간이지만 엔레이드맨의 결계가 무효화되었다. 그것을 놓치지 않고 악몽에서 벗어난 마더가 정의의 검으로 엔레이드맨의 가슴을 찔러넣었다.
재빠르게 다시 둠(doom)을 펼쳤지만, 정의의 검이 그의 가슴을 깊게 베어 내는 건 막지 못했다.
엔레이드맨의 어린 육체가 느릿하게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 충격으로 헤드셋이 튕겨져 나가고 그의 얼굴을 가렸던 모자가 벗겨졌다.
그가 악당이라는 걸 증명하듯 마더에게 베인 가슴팍에서 피가 뿜어져나 왔다. 뜨거운 피가 바닥을 적시고 열여섯 살의 어린 몸을 가진 엔레이드맨은 바닥에 쓰러진 채 입에서 피를 울컥 쏟아 냈다.
그리고 정의의 검을 회수하고 팔을 늘어트리던 마더가 쓰러진 소년의 얼굴을 정면으로 쳐다봤다.
“…주현아?”
어째서 부모는 자식을 한 번에 알아볼 수 있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