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3화
빌런의 피는 푸른색이어야 했다. 사람들의 눈에서 피눈물을 쏟게 하고 사회에 엄청난 피해를 주는데 자신들과 같은 붉은색 피가 흐를 리 없을 테니까.
하지만 엔레이드맨의 가슴에 새겨진 상처에서 흘러나온 붉은 피는 바닥을 흥건하게 만든 것으로도 모자라 마더의 발을 적셨다. 이대로 놔두었다간 과다출혈로 숨이 끊어질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그녀가 사용하는 정의의 검에 찔리거나 베인 상처는 재생이 늦고 지혈도 힘든 편이었다.
이건 악몽이다.
아직 엔레이드맨의 결계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 자신의 눈앞에 드러난 얼굴에서 선명하게 떠오른 어린 시절 주현이의 모습은 엔레이드맨이 만들어 낸 환상일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렇지 않으면…….
“꺄아아아악!”
마더가 쓰러진 엔레이드맨의 얼굴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그를 향해 다가가려던 순간 갑자기 찢어질 듯 높은 비명이 들렸다.
흠칫하며 뒤로 물러난 마더의 앞에 천지가 흔들리는 굉음과 함께 누군가가 나타났다. 그 누군가는 가슴을 깊게 베여 쓰러진 엔레이드맨을 부축해 상태를 살폈다.
이윽고 바닥에 흘린 피 웅덩이부터 딱딱하게 붉은색의 얼음으로 바뀌기 시작하더니 피가 흘러나오는 가슴에까지 얼음이 삐죽삐죽 튀어나왔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엔레이드맨의 상태에 푸른색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벌떡 일어난 냉기와 제안의 마녀가 비통한 마음을 가득 담아 소리쳤다.
“엔레이드맨 오빠가 죽었어. 저 여자가 엔레이드맨 오빠를 죽였다고!”
굴곡이 잘 드러나는 드레스를 입은 그녀의 온몸에 얼음 결정 모양의 문신이 빼곡하게 차올랐다. 붉은색과 푸른색이 번갈아 가며 바뀌는 문신의 색깔은 마치 그녀의 심정을 반영하는 듯 격정적이었다.
그녀가 그대로 발돋움해 마더를 향해 날카로운 발차기를 날렸다.
그에 마더가 또다시 정의의 검을 꺼내 마녀의 공격을 막았다. 찬란하게 터지는 검신의 하얀빛 사이로 검은색의 혼탁한 무언가가 섞였다.
마녀가 휘두르는 발차기의 궤적에서 날카로운 얼음 가시가 튀어나와 마더를 공격했다. 산산조각이 나며 퍼지는 얼음 가시와 파편들이 마더의 몸에 생채기를 냈다.
얇게 베인 것만으로는 큰 부상이 아니겠으나 얼음의 주인이 냉기와 제안의 마녀라면 말이 달라진다.
상처 입은 피부의 감각이 점점 둔해지기 시작했다. 동상에 걸린 것이다.
“제 자식도 못 알아보고! 엉뚱한 놈을 아들로 착각해서 엔레이드맨 오빠의 가슴을 망치질하더니……. 감히 오빠를 죽이기까지 해?!”
마녀는 엔레이드맨이 죽었다고 생각했다. 그의 작은 몸에서 흘러나온 피의 양이 어마어마했고 엔레이드맨의 몸을 끌어안았을 때 숨결이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죽여 버리겠어! 엔레이드맨 오빠의 길동무로 당신도 데려갈 거야!”
냉기와 제안의 마녀가 히스테릭하게 소리침과 동시에 주변의 바다가 얼어붙었다. 얼음이 갈라지는 소리가 들리고 주변에 있는 생명체를 모두 얼려 버리려는 듯 능력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형제가 죽었다는 생각에 흥분한 나머지 그녀는 가면을 벗으려는 듯 가면에 손을 올렸다.
코루루는 현재 자신이 가진 명성과 지위를 좋아했다. 세계적인 뮤지컬 스타로서 노래 부르는 걸 좋아하고 사랑받는 걸 즐겼다.
그 때문에 절대로 냉기와 제안의 마녀로서 맨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다. 반대로 말하자면 냉기와 제안의 마녀의 맨얼굴을 본 사람은 단 한 명도 살아남지 못했다는 뜻이었다.
또한,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상대를 반드시 죽이겠다는 그녀만의 의지이기도 했다.
콰광-!
코루루가 가면에 손을 올린 그 순간, 그녀의 뒤에서 검은색 벼락이 내리쳤다.
하늘에서 내려와 바닥에 꽂힌 검은 문이 스르륵 열렸다. 그리고 가면을 쓴 채로 나타난 다크 카오스가 피 웅덩이 안에서 눈을 감고 있는 엔레이드맨을 바라보고 있었다.
“냉기와 제안의 마녀… 그만 돌아와.”
피가 더 흘러나오지 않도록 코루루가 얼려 놓았지만 엔레이드맨의 안색은 코루루가 죽었다고 착각하는 게 당연할 만큼 핏기가 없었다.
“엔레이드맨을 치료하는 게 먼저야. 이 구역을 벗어나면 상처에서 다시 피가 흘러나올 거야. 네가 따라와 줘야 해.”
“…엔레이드맨 오빠가 살아 있나요?”
“지금은.”
삽시간에 기세를 누그러트린 코루루가 흉포한 마음을 숨기며 얌전히 다크 카오스의 곁에 섰다. 다크 카오스는 허리를 숙여 엔레이드맨을 살짝 부축한 다음 무릎 뒤에 팔을 걸고 들어 올렸다.
그의 품에 안긴 엔레이드맨은 그 어느 때보다도 작고 어려 보였다. 아래로 늘어지는 팔을 타고 얼지 않은 피가 바닥에 한 방울씩 떨어졌다.
엔레이드맨이 찰나의 순간 둠(doom)을 펼치지 않았다면 손쓸 새도 없이 즉사했을지도 모르겠다.
“기다려, 기다려!”
다크 카오스가 등장할 때부터 멍한 표정으로 상황을 지켜보던 마더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검을 겨눈 채 소리쳤다.
마더는 냉기와 제안의 마녀가 한 말의 의미를 드디어 알아차린 듯 제대로 숨을 내쉬지도 못했다. 떨리는 눈빛으로 다크 카오스에게 안긴, 자신이 죽일 뻔한 소년을 쳐다보았다.
“무슨 소리야! 무슨 소리냐고! 그 애가 왜, 왜 내 아들이야. 어째서 그 빌런이 내 아들이냔 말이야. 왜!”
마더는 눈앞의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다. 저 사악한 빌런들이 자신을 가지고 놀고 있다고, 그렇게 믿고 싶었다.
피를 토해 내듯 소리를 지르는 마더의 모습 또한 제정신이 아니었다. 고개를 돌려 검은빛이 조금씩 섞이는 찬란한 빛의 검을 쳐다보던 다크 카오스는 말없이 품에 안은 엔레이드맨을 고쳐 안았다.
“어째서 빌런이 된 거야. 왜, 왜 악의 길로 빠져든 거야. 왜… 왜.”
엔레이드맨이 참혹한 삶을 살아왔을 것이라고 전혀 생각하지 못한 그녀는 아들이 빌런이 되었단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다크 카오스는 그녀의 말들이 언젠간 엔레이드맨에게 타격을 주리라는 걸 알았다. 엔레이드맨은 시종일관 자신은 혈연을 끊어 내고, 버렸다며 호기롭게 말해 왔지만, 전혀 아니었다.
가족에게 피해가 갈까 봐 숨긴 것이다.
재언은 엔레이드맨의 증오와 욕망이라면 충분히 마더를 이길 수 있었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그는 마더에게 제대로 된 공격을 퍼붓지 못했다.
“마더. 위지도라는 곳을 압니까?”
“뭐……?”
“엔레이드맨은 제가 데려오기 전까지 그곳에서 섬 노예로 지냈었습니다.”
섬 노예라는 말에 마더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결국, 아들이 아주 조금이라도 인간답게 살았기를 바랐던 그녀의 기도는 이루어지지 않은 셈이었다.
하얗게 질려 가는 그녀의 얼굴을 살피던 다크 카오스는 식어 가는 몸을 힘주어 끌어안으며 서늘하게 한마디만을 남기고 뒤돌았다.
“정말 진실을 알고 싶다면… 내일 밤 이곳으로 혼자 오세요.”
“기다려! 내 아들을 어디로 데려가는 거야!?”
마더가 팔을 뻗어 다크 카오스를 붙잡으려고 하자 냉기와 제안의 마녀가 사납게 으르렁거리며 그녀의 앞에 거대한 얼음벽을 만들었다.
다급한 몸짓으로 정의의 검으로 얼음벽을 두 동강 내 봤지만, 다크 카오스와 엔레이드맨을 비롯한 빌런들은 이미 모습을 감추어 버렸다.
엔레이드맨이 흘렸던 피 웅덩이만이 방금 상황이 거짓이 아님을 보여 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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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치는 절벽 위 별장’에 비상등이 울렸다. 침대에 누운 엔레이드맨에게 타락한 추기경이 피눈물을 흘리며 끊임없이 축복을 걸었다.
이전에 레드-헬-파이어에게 당했을 때만큼이나 그의 상태가 위태로웠다. 아니, 그때보다 더 위험했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렸어. 살릴 수 있겠어?”
재언의 물음에도 타락한 추기경은 대답하지 않고 기도문을 외웠다. 그만큼 엔레이드맨의 상태가 위독하다는 뜻이었다.
코루루가 피를 얼려 지혈하지 않았다면 정말 그를 잃었을지도 모른단 생각에 재언은 잠시 아찔해졌다.
“아아, 엔레이드맨 오빠가 당했어요. 전쟁이에요! 히어로 놈들과 드디어 전쟁을 치를 때가 왔다고요!”
체어맨이 이성을 잃고 울먹이는 코루루의 어깨를 토닥이며 진정시키려 애썼다. 그러자 방구석 폐인처럼 방에 틀어박혀서 나오지 않았던 버드맨이 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었다.
“…무슨 일인가요? 엔레이드맨 형님께 무슨 일이 생겼나요?”
코루루는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막내를 덥석 끌어안으며 훌쩍였다.
“엔레이드맨 오빠가 마더에게 당했어. 엔레이드맨 오빠의 힘으로 그렇게 허무하게 당할 리 없으니 분명 그 여자가 뒤에서 무슨 수작을 부린 게 분명해!”
버드맨에게 있어서 첫째 형 엔레이드맨은 형제들의 대장이자 다가가기 어려우며 아버지를 가장 가까이에서 모시는, 완벽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엔레이드맨이 이렇게 처참하게 당했다는 충격적인 소식에도 버드맨은 담담한 자기 자신이 생소하게 느껴졌다. 마치 이렇게 될 걸 예상하고 있었던 듯한 기묘한 감각이었다.
‘…뭐지? …난, 난… 이렇게 될 걸 알고 있었어. 나는… 엔레이드맨 형님이 당할 걸, 알고 있었어…….’
아버지인 신재언부터 형제들이 하나같이 소란스러운 와중에 버드맨은 욱신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그의 망막 위로 마약왕이 미소 지으며 서 있는 모습이 환상처럼 보였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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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바로 이런 기분이군. 이렇게 가슴이 찢어지는 느낌이라니.”
남자가 한 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부여잡으며 중얼거렸다. 그의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이로써 당분간 아버지의 곁이 비겠군. 엔레이드맨 형님이 정신을 잃은 동안엔 모습을 숨길 수 없을 테니…….”
남자는 눈물을 닦으며 매력적인 미소를 지었다.
“곧 만나러 가겠습니다. 나의 아버지시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