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4화
타락한 추기경의 축복은 새벽이 지나고 다음 날 동이 틀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동안 다른 자식들도 모두가 밤을 꼬박 지새웠다.
어둡기 그지없는 분위기 속에서 코루루는 소파에 앉아 몸을 잔뜩 웅크린 채 초조한 듯 손톱을 잘근잘근 씹었다.
엔레이드맨의 친모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아들을 공격했다는 사실은 그녀에게도 상당히 큰 정신적 타격을 가져다주는 일이었다.
“…어떻게 부모가 되어서 아들을 못 알아보고 공격하지? 코루루였다면… 나였다면.”
코루루는 어린 나이에 자신보다 스무 살 이상 많은 남편에게 팔리듯 결혼했고 폭력적인 부부생활이 이어졌다. 그녀에게 자유란 남편에게 순종하며 엄마와 아내라는 이름의 노예로서 본분을 다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날이 갈수록 남편을 닮아가는 다섯 살짜리 아들을 진절머리 난다는 듯 쳐다보았다. 차라리 아들이 이 세상에서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런 그녀의 바람을 신이 들어주었다. 하지만 생각은 생각일 뿐, 현실은 달랐다.
“마레?! 마레 어딨니? 엄마가 찾잖아. 어서 나와! 마레!”
호수 아래는 깊었기 때문에 호수를 향해 미친 사람처럼 달려드는 코루루를 사람들이 붙잡고 말렸다.
“어떻게… 부모가…….”
지금은 흐릿해진 기억을 더듬어 내려가는 코루루의 안색이 점점 창백해졌다.
이명까지 들리는 듯한 느낌에 두 귀를 막으려는데 엔레이드맨의 방에서 타락한 추기경이 드디어 문을 열고 나왔다. 그에 코루루가 벌떡 일어나 잰걸음으로 다가갔다.
“타락한 추기경 오빠! 엔레이드맨 오빠는요?”
“지금은 많이 좋아졌습니다. 적어도 죽음이 그를 데려가진 못할 것입니다.”
다른 자식들과 마찬가지로 초조하게 기다렸던 재언은 타락한 추기경의 말에 긴장의 끈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좋은 소식에도 코루루와 버드맨의 안색은 창백했다. 엔레이드맨이 좀 더 괜찮아지면 저 둘을 신경 써서 다독여야 할 듯했다.
타락한 추기경이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재언의 앞으로 다가와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의 신성력은 마르지 않는 샘이었다. 하지만 그의 타락한 능력은 신성한 힘을 사용하는 걸 허락하지 않았기에 신부복이 핏빛으로 잔뜩 물들어 있었다. 그만큼 엔레이드맨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뜻이었다.
재언은 자신의 무릎에 이마를 기대어 기도하는 타락한 추기경을 내려다봤다. 이 상황에서 가장 힘들었을 그는 신재언에게 기도를 올려 심신의 안정을 도모하려는 듯했다.
평소였다면 부담스러워했을 재언도 상황이 상황인지라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타락한 추기경의 부드러운 금발을 쓰다듬었다.
‘이놈들은 나이도 다 찼는데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 좋아한단 말이지.’
시간이 조금 흘러 낯빛이 조금이나마 회복된 타락한 추기경이 고개를 들었다.
“아버지, 제가 응급조치를 끝냈으나… 아무래도 상처를 치료하고 봉합할 수 있는 의사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재언의 안색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그 말은…….”
“데스 메이커를 데려와야겠습니다.”
타락한 추기경의 덧붙임에 재언의 얼굴이 더더욱 우울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데스 메이커는 빌런들을 치료하러 다니는 돌팔이 의사였다. 의문이 가득하고 수수께끼 같지만 언제 어디서든 유쾌한 남자로 유명했다.
야매 의사인 그가 데스 메이커라 불리는 이유는 간단했다. 그는 치료해 준 빌런에게 무언가 한 가지를 반드시 받아 냈는데, 그게 금전적인 요구가 아니었다.
작게는 머리카락이나 손톱, 혹은 심장이나 다른 내장을 받아 냈다. 인간의 주요 장기를 가져가 버리면 치료하는 의미가 없어지기도 하기에 그를 데스 메이커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가 원하는 건 룰렛을 돌려 정해지는 복불복처럼 생명에 막대한 지장을 주는 것이기도, 그렇지 않기도 했다. 하지만 평범하게 병원을 찾아갈 수 없는 빌런들이 치료가 필요할 때 기댈 수 있는 유일한 방편이었다.
엔레이드맨의 상처가 얼마나 심각하면 재언이 데스 메이커를 질색하는 걸 알면서도 타락한 추기경이 조심스럽게 제안할까 싶었다.
그냥 일반인 의사를 납치해서 보게 하면 어떨까 생각했지만 엔레이드맨의 경우엔 상처가 매우 깊었다.
전문적인 기구도 갖추지 않은 채 손을 댔다간 오히려 더 심각해질 위험이 있었다. 데스 메이커 외에는 별다른 선택지가 남아 있지 않았다.
데스 메이커가 치료를 대가로 신재언에게 원하는 건 항상 딱 한 가지였다. 신체 일부분을 훼손한다거나 생명에 지장이 가는 요구는 아니었다.
하지만 죽을 만큼 짜증 나고 불쾌한 것인지라 재언은 한숨을 크게 내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싫어도 엔레이드맨의 치료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일단 체어맨… 데스 메이커를 데려와.”
체어맨이 자리를 뜨고 재언은 한숨 돌리며 핸드폰을 꺼내 확인했다.
“아… 회사에 연락해야 해.”
어젯밤부터 워낙 정신이 없다 보니 아침 9시가 넘은 줄도 모르고 있었다. 회사에 연락도 없이 무단결근하고 말았다.
팀장에게서 걸려 온 부재중 통화가 5건이었다. 재언은 무슨 일이 있느냐며 연락 달라는 내용의 문자를 확인하자마자 곧바로 통화버튼을 눌렀다.
“아, 팀장님. 죄송합니다……. 제가 개인적인 사정이 생겨서 오늘 출근이 힘들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 신 주임이 근무하는 동안 이런 적은 한 번도 없었던 성실한 사람이라는 걸 아니까 다들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가 걱정하고 있었어요. 무슨 사정인지는 나중에 면담하면서 알아보고 일단 오늘은 푹 쉬어요. 내일은 나올 수 있는 거죠?
“그건… 장담할 수가 없어요. 죄송합니다.”
‘이번 승진 날아가겠구나.’
재언은 쓰디쓴 눈물을 애써 삼키며 몇 번이나 팀장에게 사과한 뒤 전화를 끊었다. 팀장은 혀를 끌끌 차면서도 어떻게든 내일까지는 연차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해 볼 테니 모레에는 반드시 출근해야 한다고 말해 주었다.
그래도 근무하는 동안 특별한 일 없이는 지각도 하지 않고 성실하게 개근한 보람이 있었다.
통화를 종료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윽고 체어맨의 문을 통해 누군가가 별장 안으로 들어왔다.
“히히… 저를 찾으셨다고요. 세상 모든 어둠의 아버지 다크 카오스님.”
체어맨의 뒤를 따라 들어온 이는 한쪽 눈을 안대로 가리고 등이 곱아 있는 남자였다. 상처투성이에 두툼한 남자의 손가락은 사람을 치료하는 이의 것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하기 힘들었다.
그는 치료해 준 빌런들에게 강제로 얻어 낸 장기 같은 끔찍한 것들로 가득 채운 작은 마차를 직접 운전하며 전 세계를 돌아다녔다.
데스 메이커가 빌런들에게 장기를 뜯어 가는 이유 또한 재언의 입장에서는 너무나도 괴상망측해서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인조인간을 만들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인조인간을 만들어 신으로 삼고 싶다는 욕망이었다.
재언이 그런 그를 직접 만나 도움받은 건 지금까지 두 번이었고 이제 세 번째였다.
그가 별장으로 들어왔음에도 재언은 가면을 쓰지 않고 맨 얼굴을 유지했다. 그의 안대 속 눈알이 ‘세상의 모든 진실을 볼 수 있는 눈’이었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성형이나 마스크, 가면 따위는 전혀 통하지 않았다.
재언은 여러 의미에서 데스 메이커를 볼 때마다 섬뜩하고 불쾌한 기분이 들어서 직접 마주하는 걸 꺼려 왔다.
“오, 엔레이드님께서 엉망으로 당하셨군요. 안쪽 내장도 전부 찢겼어요. 헤헤… 이 정도면 숨이 끊어져도 이상하지 않았을 텐데. 오호… 신성력으로 장기들의 기능을 정지시켰군요. 이 데스 메이커도 한 시간은 족히 걸릴 것 같습니다.”
데스 메이커가 흉측한 얼굴에 기분 좋은 미소를 띠며 음흉하게 웃었다.
“엔레이드맨을 살릴 수 있겠어?”
“물론입니다. 히힛… 이 정도는 제게 식은 죽 먹기죠. 흉터 하나 남기지 않겠습니다. 암요……. 안의 내장까지도… 다크 카오스님께서 제 부탁을 들어주신다면 걱정할 필요가 전혀 없답니다.”
기분 나빠서 대꾸하기도 싫었지만,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재언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데스 메이커의 등, 그러니까 정확히는 날개뼈에서 각각 팔 하나씩이 자랐다. 그는 총 네 개의 손으로 엔레이드맨이 누워 있는 방으로 들어가 수술을 시작했다.
기분 나쁜 생김새와 성격이지만, 저래 보여도 봉합 실력만큼은 세상에서 따라올 자가 없었다.
그로부터 정확히 54분이 지났을 무렵, 데스 메이커가 피투성이인 채로 실실 웃으며 방에서 나왔다.
“좋아요. 아주 깨끗합니다. 하지만 의식을 되찾으려면 일주일이 넘게 걸릴 겁니다.”
그의 말에 재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소파에 주저앉았다.
레드-헬-파이어에게 당했을 땐 6개월 가까이 사경을 헤맸었다. 일주일이면 굉장히 양호한 편이다.
안심하며 앉아 있는 재언의 앞으로 데스 메이커가 두 손을 앞으로 내민 채로 다가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버드맨이 불안한 눈빛으로 옆에 있던 코루루에게 물었다.
“누님. 저… 남자는… 뭔가를 받아 낸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예를 들면 장기나 심장이요. 그런데 아버지께 대체 뭘 받아 간다는 거죠? 혹시 허튼짓한다면.”
버드맨의 질문에 코루루가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건 아니지만, 아버지께서 아주 질색하는 걸 받아 가긴 해.”
온몸에 소름이 돋는 건 막을 수 없었던 재언은 떨리는 팔을 들어 올려 데스 메이커의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으윽…….’
그러자 데스 메이커가 고개 숙여 혀를 내밀어 재언의 손등을 핥기 시작했다.
그렇다. 데스 메이커가 요구하는 대가는 다크 카오스의 손등 핥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