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5화
처음에 데스 메이커를 불렀을 때, 그가 다크 카오스에게 요구한 대가는 구체적으로 이러했다.
“당신의 살결을 핥게 해 주십쇼. 그러면 이 데스 메이커가 어떤 상처라도 깔끔하게 치료해 보겠습니다.”
“…씨발.”
물론 재언이 욕설만으로 넘어간 건 아니었다. 그는 재빠르게 팔을 휘둘러 기분 나쁘게 히죽 웃고 있는 데스 메이커의 면상에 주먹을 꽂아 넣었다.
그런데 데스 메이커는 그 괴상망측한 대가 외에는 요구할 생각이 없다는 듯 코피를 내뿜으면서도 물러날 기미를 전혀 보이지 않았다.
결국, 그에게 두손 두발 다 들었다. 그때에는 바티칸의 총공격에 상처를 입어 의식을 잃은 타락한 추기경을 치료해야 했기에 데스 메이커의 도움이 절실했다.
비록 자신의 신체 일부가 오염되는 느낌은 받겠지만, 추기경부터 살리고 봐야 하지 않겠는가. 그중에서 정신적 타격이 가장 작을 것 같은 손등을 고르긴 했는데 사실 어디를 핥든지 기분 나쁘고 더러운 건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장기를 원하지 않은 게 다행이라고 다소 긍정적으로 생각하려 해도 재언은 데스 메이커와 만나는 것 자체가 떨떠름하고 꺼림칙했다.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조금만 정신을 놓으면 데스 메이커의 얼굴에 주먹부터 꽂아 넣고 싶었다. 재언은 그 감정을 필사적으로 삼켜 내야 했다.
“크크크크, 헤헤헤헤… 어떤 무자비한 히어로가 엔레이드맨님을 저렇게 갈기갈기 찢어 놓았답니까? 아무리 빌런이라지만 잔혹하기 짝이 없는 공격이로군요, 크크크… 엔레이드맨님을 정말 증오하고 벌레보다 끔찍하게 싫어했던 히어로의 짓인가 봅니다.”
엔레이드맨을 죽도록 싫어한 히어로의 짓이 아니라 그를 20여 년 동안 하루도 잊지 않고 찾아다니며 눈물을 흘리던 친모의 검에 찔렸다. 하지만 재언은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되물었다.
“생명에 지장은 없는 거지?”
화장실에서 비누 하나가 없어질 때까지 손을 닦고 나온 뒤 핸드크림 한 통을 비우고도 모자라 손수건으로 손등을 박박 닦았다.
“물론입죠. 물론입니다. 상처 하나 남기지 않고 말끔하게 나을 겁니다. 그럼 저는 이만. 언제든지 제가 필요하면 불러 주십쇼, 아름다운 다크 카오스님. 당신의 살결을 핥다니, 옛날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호사였습니다. 헤헤헤헤헤.”
데스 메이커는 작은 캐리어 안에서 낡고 때가 찌든 회색빛의 중절모를 꺼내 쓰더니 마차를 타고 순식간에 사라졌다. ‘파도치는 절벽 위 별장’은 체어맨의 문을 통해서가 아니면 그게 설령 레헬이어도 들어올 수 없는 곳이다.
그런데 그는 체어맨의 문이 아닌 창문을 통해서 사라졌다. 재언이 미심쩍은 시선으로 창문 너머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창문을 아주 살짝 열었을 뿐인데 잠깐 사이에 지옥에서 부는 듯한 비바람이 몰아쳐 별장 안은 ‘검은 비’로 엉망이 되었다. 코루루가 엉망이 된 거실에 짜증을 내며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 창문을 얼른 닫아 버렸다.
계속 창문을 열어 두고 있으면 절벽 아래 파도 속에서 ‘어떤 존재’들이 올라와 별장 안으로 들어올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엔레이드맨의 상태를 봐야겠어.”
방 안으로 들어간 재언은 조금이나마 안색이 돌아온 채 누워 있는 엔레이드맨의 상태를 꼼꼼하게 살폈다.
데스 메이커가 아무리 미심쩍고 변태 같은 놈이었어도 실력만큼은 확실했던지 눈에 띄게 상태가 좋아졌다. 아직은 흉측한 봉합 수술 자국이 가슴에 남아 있었지만 말이다.
재언은 자신의 손등을 희생하는 것만으로 엔레이드맨을 무사히 치료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며 무거운 한숨을 쉬었다.
“어리석기는.”
씁쓸한 그의 목소리가 어두운 방 안에 울렸다가 흩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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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이사님.”
“네, 안녕하세요.”
안내 데스크에 앉아서 자리를 정리하고 있던 직원이 검은색 정장을 입은 무리 중 가장 선두에 서서 걷는 원한에게 공손히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러자 그 또한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에 화답했다.
젊다 못해 이제 막 미성년자에서 벗어난 듯한 이에게 그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듯한 직원이 깍듯이 대하는 모습이 매우 낯설었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워낙 익숙한 풍경이었다.
임원들만 사용할 수 있는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도 상냥하게 미소 짓고 있던 원한은 문이 닫히자마자 표정을 굳혔다. 그는 낮은 목소리로 옆에 있는 중년 남성에게 물었다.
“놈들은?”
“아직 살아 있습니다.”
“명이 질긴 놈들이네. 대충 담가서 인천 앞바다에 버려.”
“예.”
그 뒤로 아주 잠깐 정적이 흘렀던 엘리베이터 안은 어깨가 넓고 얼굴에 흉터 두 개가 나 있는 사내의 질문에 깨졌다.
“그러면 박주원 그놈은 어떻게 합니까?”
그러자 그의 반대편에 서 있던 다른 중년 남성이 쯧쯧 혀를 쳤다.
“이 무식한 새끼야. 그걸 말이라고 하냐? 당연히 죽여 버려야지.”
“회칼 이 씹새가 틈만 나면 이름 가지고 지랄이야. 그걸 몰라서 물어? 그러면 그 악독한 마더는 어떻게 처리할 거냐 이거지.”
“큰형님이 계시는데 뭐가 무섭냐.”
그들은 엔레이드맨이 마더에게 당했다는 사실을 아직 모르고 있었다. 엔레이드맨과 마더가 한바탕 붙기 시작하자마자 박주원 패거리를 끌고 도망쳤기 때문이다.
덧붙여 박주원 패거리들은 검은 태양의 구역에서 마약을 밀매한 것으로도 모자라 조직원을 건드린 대가를 톡톡히 치르는 중이었다.
놈들에게 배가 쑤셔진 조직원은 평생을 하반신 마비로 살아가야 했고 집단 폭행을 당한 조직원의 아내는 몇 달간 병원 신세를 져야 한다.
“조용히 해. 형님 앞이시다.”
주식회사 흑천의 회장인 쌍룡이 투닥거리는 두 사람을 향해 나직하게 경고했다. 그러자 무식한과 회칼은 곧바로 꿀 먹은 것처럼 입을 꾹 다물었다.
이윽고 열린 엘리베이터에서 우르르 나온 그들은 원한의 임원실로 향했다.
원한은 어젯밤 간이 배 밖으로 나온 녀석들을 손봐 주느라 제대로 잠을 깊이 자지 못한 탓에 뻐근한 어깨를 주무르며 한숨을 흘렸다. 그는 지금까지도 마더가 잠잠한 걸 보면 엔레이드맨이 그녀를 어떻게든 처리했다고 굳게 믿었다.
그런데 임원실 문을 열고 들어간 그의 앞에 낯선 광경이 보였다. 고급스러운 책상 의자에 누군가가 앉아 있던 것이다.
이런 식으로 자신의 임원실 안에 불청객이 난입한 적이 한두 번은 아니지만, 이번엔 엔레이드맨이 아닌 완전히 처음 보는 이들이었다.
원한이 당황해서 걸음을 멈추자 뒤에 있던 부하들이 무슨 일인가 고개를 빼꼼 내밀어 보더니 험악하게 소리쳤다.
“저, 저, 저 또라이 새끼는 뭐야? 우리 형님 자리에 앉아 있네?”
“쉿. 들린다, 이 무식한 새끼야.”
뒤돌아 앉아 있던 불청객이 소란스러움에 빙글 몸을 돌렸다. 의자 등받이에 편안하게 앉아 있던 누군가는 다리를 꼬고 앉은 채 임원실로 들어오고 있는 원한과 그의 패거리들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푸른색의 눈물 모양 보석이 박힌 가면을 쓰고 있었는데, 덩치도 있고 몸매가 무척 좋은 것으로 보아 나이가 그리 많아 보이지 않았다.
“누구요? 우리 형님은 오늘 일정이 꽉 차서 나중에 약속을 잡고 다시 오시오.”
그들 중에 성격이 가장 차분한 편인 쌍룡이 앞으로 한걸음 나서며 입을 열었다.
가면을 쓰고 나타났다면 답은 하나였다. 얼굴을 드러낼 수 없는 일을 저지르는 놈들일 것이 분명했다.
검은 태양도 깨끗하고 떳떳한 집단은 아니었던지라 간혹 빌런들과 거래하기도 했으니까.
“어이, 거……!”
쌍룡의 말에도 대답하지 않는 불청객의 모습에 무식한이 무식하게 화를 내려고 할 때, 원한이 얼른 그를 막았다.
“…잠깐.”
그러자 어디선가 여성의 사나운 코웃음 소리가 들렸다. 이제 보니 가면을 쓴 남자에게 정신이 팔려 다른 사람이 또 있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검은색 드레스를 입고 남자의 곁으로 천천히 다가가 애교부리듯 안기는 여성은 남자와 마찬가지로 가면을 쓰고 있었다.
“엔레이드맨 오빠가 아끼는 장난감들이라기에 봐줬더니 감히 위대하신 아버지를 알아보지도 못하고 기고만장해하는 꼴이라니. 저 놈들 모두 얼려 죽여도 엔레이드맨 오빠는 저를 귀엽게 봐주시겠죠?”
가면을 쓴 남성은 날카롭게 중얼거리는 여성의 머리를 토닥이며 진정시켰다.
재언은 안 그래도 엔레이드맨이 부상으로 누워 있어 예민함이 극에 달한 코루루를 괜히 데리고 나왔나 후회했다. 데려가지 않으면 어마어마한 사고를 치겠다며 되레 큰소리를 치는 게 무서워서 데려왔더니 이 모양 이 꼴이다.
“잠시 물어볼 게 있어서 왔을 뿐이야. 우리 애가 너희를 돌봐 주고 있었다던데……. 엔레이드맨 말이야.”
그 말 한마디로 이 자리에 있던 모두가 가면 쓴 남자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그전까지는 목소리가 상당히 젊다고만 생각했는데, 그들은 갑자기 목을 조여 오는 듯한 공포심에 숨을 쉬기가 힘들어졌다.
엔레이드맨에 대해서 감히 ‘우리 애’라고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오직 다크 카오스 단 한 명뿐이다.
저 남자가 그 악명높은, 무시무시한 빌런들의 왕 다크 카오스라니. 그렇다면 저 여자는 냉기와 제안의 마녀일 것이다.
‘다크 카오스인 걸 알면 심리적으로 부담이 되는 건가? 어째 반응들이 하나같이 다 똑같아.’
그전까지는 아무렇지도 않았으면서… 역시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걸까.
오히려 재언은 호들갑스럽게 반응하는 그들을 보면서 한국 조폭을 직접 보는 건 처음이라 조금 무서웠다.
영화나 뉴스에서나 볼 법한 떡대 형님들이 눈앞에 가득했다. 얼굴에 칼자국이 죽죽 그어진 무섭고 험상궂은 남자의 외모가 제일 무서웠다.
그런데 이 중에서 가장 어린 티가 나는, 일반인으로 보이는 남성이 조직 보스란다. 평범한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남자가 다크 카오스라는 걸 알자마자 원한이 떨리는 다리를 겨우 움직여 그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이상하게도 그의 눈동자 속에는 다른 자식들이 가지는 것처럼 희열감으로 가득했다.
“저, 저는 당신을 알고 있습니다. 3년 전, 저를 구해 주셨으니까요. 전… 전 그때부터 당신을 계속 섬기고 싶었습니다.”
‘…내가?’
“그러니까, 그러니… 저를, 절 제발 거둬 주십시오. 제게 힘을 주세요, 다크 카오스님……!”
재언은 박주원에 대한 걸 묻기 위해 그들을 찾아온 것이었다. 그런데 스멀스멀 올라오는 원한의 증오에 호기심이 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