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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근하는 빌런-286화 (286/324)

286화

사실 원한은 부모와의 추억이 전혀 없었다.

청소년기의 대부분을 할머니의 손에서 키워졌지만, 그렇다고 불행하거나 가난하게 살지 않았다.

할머니는 관광지로 유명한 이탈리아의 한 도시에서 제법 알아주는 레스토랑을 운영하면서 재산을 많이 축적했다. 관광객뿐만 아니라 동네 주민들인 마피아들에게도 인기가 많은 가게였다.

열 살까지 친척의 집에 의탁해 살아가고 있던 원한을 그의 할머니가 직접 한국까지 찾아와 그를 데리고 이탈리아에 왔다.

“그 망할 년. 에미한테 아무 말도 안 하고 이런 먼 이국땅에서 사고나 치고… 이렇게 호박꽃처럼 예쁜 내 손주가 있다는 것도 알려 주지 않았다니. 어미 가슴에 얼마나 대못을 박아 댈 건지.”

할머니는 원한이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친모에 대한 욕을 신랄하게 퍼부으면서도 눈물을 훔치며 슬퍼했다.

그녀는 희게 센 곱슬머리에 통통한 체형을 가진, 매우 세련된 외국인이었다. 이목구비가 조금 뚜렷할 뿐이라고만 알고 있던 원한은 자신이 혼혈이라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다.

“내가 널 찾지 못했다면 어떻게 될 뻔했니? 오, 내 새끼… 걱정하지 마. 친척들 집에 얹혀살았다고? 내가 널 최고로 키워 주마.”

물론 원한의 고모와 고모부는 부모 잃은 조카를 자기 자식과 단 한 번도 차별하지 않고 10년간 키워 준 매우 친절하고 좋은 사람들이었다.

원한도 그들을 엄마, 아빠라고 불러온 데다 사촌 동생 두 명과도 친하게 지내 외할머니가 찾아올 때까지 자신이 얹혀살았다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할 정도로 말이다.

이후에 원한은 이탈리아에서 스무 살 성인이 될 때까지 풍족하게 살았다.

그리고 이탈리아로 유학 생활을 하던 중인 프랑스인 여자친구도 생겼다. 쏘냐라는 이름의 두 살 연상 여자친구는 이탈리아인의 피가 반쯤은 흐르는 원한보다도 뜨겁고 정열적인 사람이었다.

남자친구가 성인이 되자마자 결혼 약속을 잡을 만큼 말이다. 게다가 결혼을 약속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쏘냐가 임신 소식을 알렸다.

아직 경제적으로 자립하지 못한 젊은 나이에 부모가 된다는 건 결국 할머니에게 신세를 더 져야 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할머니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임신 사실을 알리는 원한의 등을 토닥이며 기뻐하셨다.

“너흰 성인이고 너는 이 레스토랑에서 일하면 된다. 그러니 너희가 부모가 되는 덴 아무 지장이 없어.”

할머니는 10여 년 전 처음 봤을 때보다 확연히 늙었지만, 여전히 정정하셨다. 그럼에도 막상 감회가 새로웠는지 항상 침착하던 그녀가 돌연 눈물을 글썽거렸다.

“친척 집에서 눈칫밥이나 먹으며 살던 애가 언제 이렇게 컸는지……. 벌써 가정을 이뤄 떠나는구나.”

자신의 고모와 고모부는 눈치를 준 적이 없으며 한국에서도 제법 평화롭고 잘 지냈었다고 원한이 몇 번이나 알려 주었지만, 그녀는 도통 들을 생각이 없었던 것 같다.

할머니는 나이가 들수록 감수성이 풍부해지는지 간혹 원한의 친모, 즉 죽은 딸의 사진을 들고 생각에 잠기곤 했다.

원한은 자신이 비록 부모의 얼굴은 기억하지 못해도 이렇게 과보호로 사랑을 나눠 주는 보호자와 결혼을 약속한 사랑하는 배우자를 위해 인생을 바쳐야겠다고, 그렇게 다짐했다.

그러던 어느 날, 무언가를 바리바리 챙겨 넣은 듯한 커다란 검은색 가방을 든 남자가 레스토랑에 찾아왔다. 그도 레스토랑에 자주 찾아오는 마피아 일원 중 한 명이었다.

“요즘 블랙 마켓 쪽 일이 수상하게 돌아가고 있어. 베네딕트 가의 삼남이 귀환했다는 소문이 있더군. 피바람이 불지도 몰라. 아냑, 너도 당분간 레스토랑을 접고 몸을 피하는 게 좋을 것 같아. 네 레스토랑은 레비아노가 가장 좋아하는 곳이잖아.”

하지만 할머니는 담배를 입에 물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무리 의사가 담배를 끊으라 권고해도 그녀는 흡연을 멈추지 않았다.

원한은 서빙하면서 그들의 대화에 저도 모르게 귀를 기울였다.

“내 손주가 애를 가졌어. 그 애는 곧 한 가정의 가장이 될 거라고. 난 이 레스토랑을 딸에게 물려주지 못했지만, 손주에게는 물려주고 싶어. 그리고 훗날 손주는 가게를 자기 자식에게 물려주겠지…….”

“베네딕트 가의 삼남이 엄청난 힘을 얻었다고 해. 레비아노와 전쟁을 치를 게 분명하다고. 난 발을 빼겠어.”

“베네딕트 가의 삼남은 제법 신사라고 들었어. 충고는 고맙지만… 그 악랄하기 짝이 없는 레비아노도 일반인 가게는 건들지 않아. 그렇게 무식하고 잔인한 짓은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

“힘을 얻은 놈들은 어떻게 돌변할지 몰라. 잔인한 괴물로 변했을지도… 그래도 네 선택이 그렇다면 내가 말릴 순 없겠지. 아냑, 나중에 다시 돌아왔을 때 네가 만들어 준 내장 버거를 먹고 싶군.”

이전에 지나가는 말로 들은 적이 있는데, 두 사람은 젊은 시절에 사귀었던 사이였단다. 물론 지금은 각각 다른 가정을 꾸려 잘 살고 있었다.

“언제든지 다시 돌아와. 은퇴해도 네게 음식은 만들어 줄 테니까.”

할 말을 마친 남자가 가게를 나서고 할머니는 심란한지 담배를 피우다가 술을 몇 잔 마신 뒤 영업을 정리했다.

하지만 할머니는 남자의 충고를 들었어야만 했다. 베네딕트 가의 삼남, 베네딕트 알례리는 괴물 같은 잔인한 심장을 가진 놈이었다.

그 때문에 원한의 평화로운 일상이 순식간에 깨져 버렸다. 평소와 마찬가지로 오픈 준비 중인 레스토랑 안으로 갑자기 양복을 입은 남자들이 몰려들어 와 레스토랑 안을 향해 기관총을 갈겨대기 시작했다.

“으아아악!”

“아아악!”

레스토랑에 고용된 직원들은 전부 마피아와 접점 따위 없는 무고한 일반인이었다.

“한! 도망쳐!”

원한과 함께 레스토랑 주방에서 재료를 손질하던 쏘냐가 비명을 지르며 그에게 달려들었다.

원한은 도시 한복판에서 시작된 학살에 머릿속으로는 자신이 먼저 쏘냐를 챙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자신을 보호할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해야 했다고 말이다.

그런데 원한의 어깨를 잡고 감싼 그녀는 무언가 커다란 충격을 받은 듯 몸을 두어 번 경련하더니 힘없이 축 늘어졌다. 그녀의 등이 피투성이가 된 것과 동시에 레스토랑 안은 지옥으로 변했다.

다른 직원들도 모두 총을 맞고 미동도 없이 쓰러져 있거나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사, 살려 줘… 누가, 누가 제발 살려 줘.”

하지만 마피아의 표적이 된 가게를 용감하게 도와주는 히어로는 존재하지 않았다. 아니, 원한은 피해자를 위하는 히어로가 없다고 생각했다.

“여긴가? 맛집이라고 블로그에 올라온 걸 봤는데 사람이 왜 없지. 오픈 시간이 여덟 시랬으니까 영업 중인 거겠지?”

누구와 대화하는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웬 남성이 가게 안으로 불쑥 들어왔다. 그러다가 벽에 박힌 총탄과 바닥에 쓰러져 있는 사람들, 그리고 총을 든 마피아들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주 잠깐 정적에 휩싸인 분위기에 원한은 총을 맞고 쓰러진 채 피를 흘리는 쏘냐의 몸을 붙잡고 공포로 가득한 얼굴을 들어 올렸다. 남자가 곤란한 표정으로 뒷걸음질 쳤다.

“…음.”

하지만 마피아들이 겁도 없이 이곳에 들어온 목격자를 살려 보낼 리 만무했다.

“잡아!”

마피아들이 관광객으로 보이는 듯한 남자에게 총을 겨누며 붙잡으려고 했으나 남자의 몸에 손이 닿기도 전에 전부 바닥에 나뒹굴었다. 레스토랑 안에 기관총을 난사했던 놈들이 모두 게거품을 물고 심장이 멎은 채 쓰러졌다.

남자가 끔찍한 걸 봤다는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이제 총소리라면 정말 지긋지긋해. 사람이 죽는 것도 좀 그만 보고 싶어!”

남자는 구역질을 참는 듯 하얗게 질린 표정으로 비틀거렸다. 그러자 뒤쪽에서 가벼운 걸음 소리가 들렸다.

언제 와 있었는지 후드티 모자를 눌러쓴 어린 소년이 관광객 남자를 부축하고 있었고, 바로 뒤에는 매력적인 미소를 지은 남성이 서 있었다.

“이놈들은… 레비아노의 부하들입니다. 아아, 죄 많은 나의 형님이 결국 일반인들을 상대로 손을 대고 말았군요. 어찌 이리도 잔혹한 짓을 저지르다니. 아버지께서 이 식당을 기대하고 계셨을 텐데 이 마약왕… 불효와 불충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세계를 지배하실 나의 아버지시여, 부디 용서해 주시겠습니까?”

“…일단 구급차부터 부르고 살아 있는 사람이 있는지 확인해 주겠어?”

관광객 남자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며 명령하듯 말했다. 물론 살아 있는 사람은 없었다. 가게 내부를 정리 중이던 할머니, 자신을 감싸고 죽은 쏘냐, 다른 직원들까지 모두 총에 맞아 숨이 멎어 있었다.

“아버지, 여기 생존자가 있습니다.”

숨만 몰아쉬며 눈알을 굴리는 원한의 존재를 어린 소년이 발견하고 남성을 불렀다. 소년은 관광지에서 호구 취급당하기 딱 좋은 고양이 귀에 꼬리까지 달린 후드티를 입은 채 원한의 앞으로 다가왔다.

“으음… 정말 안타깝게 됐습니다. 이름이… HAN? 한 씨. 이번 일은 잊고 살아가는 게 좋을 겁니다. 제 얼굴을 기억하지 마세요. 이번 일은 정말 안타깝게 됐지만, 당신에겐 증오가 부족해요. 너무 사건 당일이라 그런가…….”

원한의 등 뒤를 힐끔 보며 남성이 곤란한 듯 푸른색 눈을 휘며 웃었다. 이 참혹한 학살과 어울리지 않는 무해한 미소였다.

그의 뒤로 마약왕과 엔레이드맨이 무기질적인 눈빛으로 원한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중에 다시 만났을 때… 당신이 강한 증오를 가지고 있다면, 그래서 복수를 원한다면 힘을 줄 수는 있어요. 하지만 우리가 다시 만날 날이 올진 모르겠네요.”

푸른 눈의 빌런은 그렇게 말한 뒤 레스토랑을 나가 모습을 감추었다. 훗날, 원한은 그가 바로 다크 카오스인 것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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