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근하는 빌런-287화 (287/324)

287화

원한의 사정을 모두 들은 재언이 속으로 신음을 삼켰다.

‘음…….’

선망과 욕망으로 점철된 표정을 보니 그의 기억 속에서 자신이 얼마나 미화되었는지 말하지 않아도 뻔했다.

재언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죽을 뻔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목숨을 구해 준 것으로도 모자라 힘을 주겠다는 등의 두루뭉술한 희망까지 얹어 준 셈이다.

누구라도 머릿속이 뒤집어지지 않겠는가.

무책임하지만 재언은 그 일을 까맣게 잊고 있다가 원한이 한 말에 비로소 떠올렸다. 그에게는 정말 미안하긴 해도 나름대로 변명하자면 그때를 떠올릴 때마다 아직도 머리가 아플 만큼 골머리를 썩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당시에 능력을 각성한 지 얼마 안 된 마약왕은 재언의 남은 여행 기간 동안 극진히 대접하고자 했었다.

그가 준비해 준 음식들은 모두 훌륭하고 고급스러웠지만 몇 날 며칠 그런 것들만 먹자니 느끼하고 물렸다. 그러다 보니 자극적인 음식이 절로 생각났다.

재언은 한식이 너무나도 그리워서 당장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어졌다. 그래서 밤에 침대에 누워 현지인들은 물론 한국인 관광객들도 많이 찾아간다는 가게를 검색하고 아침이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렸었다.

‘어떤 메뉴를 주문할까. 그래도 아침이니 가볍게 먹을까?’

고민을 하며 신나는 발걸음으로 가게를 찾아갔다. 그러나 가게 문을 열자마자 마주친 마피아들의 섬뜩한 시선과 매캐한 화약 냄새, 피비린내는 그의 입맛을 지옥까지 떨어트렸다.

게다가 알례리는 잔혹하기 짝이 없는 데다 워낙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공처럼 굴었다. 당시 알례리의 집에서는 아침마다 섬뜩한 총소리와 비명이 울려 퍼졌고 그 때문에 재언은 한껏 예민해져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다크 카오스라는 해괴한 빌런 명에 빌런들의 왕이라는 말도 안 되는 타이틀을 얻은 직후였다. 삶이 점점 복잡하고 특이하게 변하는 걸 실시간으로 경험한 탓에 거의 돌아 버리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래서 열심히 아르바이트를 뛰어서 모은 돈으로 유럽 여행을 계획한 건데 며칠째 이탈리아에 발이 묶여 있는 것도 스트레스였다.

이곳에서 건진 것이라고는 엔레이드맨에게 선물해 준 90유로짜리 후드 티셔츠뿐이었다. 엔레이드맨에게 어울릴 것이라고 신나서 샀는데 그게 바가지를 잔뜩 썼다는 걸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다.

하지만 모자에 고양이 귀, 등 쪽에 꼬리가 박혀 있는 후드티는 재언이 흡족할 만큼 그에게 잘 어울렸다.

엔레이드맨의 본래 나이를 생각하면 수치스러워하며 기겁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신재언에 관한 일이라면 빙글빙글 돌아 버린 엔레이드맨은 군말 없이 재언이 선물해 준 옷을 바꿔 입었다.

물론 재언이 보지 못하는 반쪽 얼굴은 아주 미묘하게 굳어 있었지만 말이다.

그런 귀여운 옷을 입은 엔레이드맨과 오랜만에 외출을 나섰건만, 일정을 시작하기도 전에 사건이 터졌다.

엔레이드맨이 그 옷차림으로 마피아들을 섬뜩하게 죽이는 것도 살 떨리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갑자기 마약왕이 재언의 뒤에서 나타났다. 왠지 모르게 초조해하는 듯한 분위기로 마약왕이 정신 사납게 자꾸 말을 걸었다.

왜 그러나 싶어서 떨떠름한 기분이 드는 것도 잠시, 엔레이드맨이 생존자를 발견했다.

정신을 잃지 않은 또랑또랑한 눈빛과 마주한 재언은 얼굴을 가릴 만한 물건을 가져오지 않았단 사실에 절망했다.

민낯을 완전히 보여 버렸는데 이런 개판에서 겨우 살아남은 생존자를 고작 얼굴을 봤다고 죽여 버린다면 저 잔악무도한 마피아들과 다를 바가 없어질 것이다.

그렇다고 가만히 놔두고 가자니 어디서 무슨 말을 하고 다닐지 몰랐다. 식은땀이 날 만큼 난처했다.

게다가 생존자의 품 안에는 피투성이가 된 채 죽어 있는 여성이 있었다. 배가 살짝 볼록한 걸 보니 임산부 같은데 이미 숨이 끊어져 있었다.

그를 보자니 아내와 아들을 무참히 잃은 마약왕과 겹쳐 보여 절로 동정심이 들었다. 이리도 잔혹한 짓을 일반인 임산부에게 저지르다니 결코 용서받지 못할 행위였다.

안타까운 마음에 재언이 저도 모르게 혀를 차자 옆에 있던 마약왕이 움찔하고 떨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마약왕은 재언의 앞에선 잔뜩 긴장해 자신의 감정을 숨기는 데 서툴렀다.

“정말 잔혹하군. 이런 끔찍한 일을 저지르다니… 생각보다 경멸스러운 놈이었군.”

마약왕의 말에 의하면 형이라는 철면피가 이런 짓을 저지른 모양이었다. 일반인을 상대로 저지른 무자비한 행위에 재언이 중얼거리던 때, 마약왕이 재빠르게 끼어들었다.

“아버지. 저 남자에 대한 처분은 제게 맡기시지 않겠습니까? 저희 쪽에서 보호한 뒤 시간이 지나면 충분한 보상과 함께 보호하겠습니다. 원수이긴 하나 제 혈육이 저지른 짓이니 저 마약왕이 책임지고 뒤처리하겠습니다.”

“상관은 없다만… 그러고 보니 여긴 왜 온 거냐, 마약왕.”

“아버지께서 이곳에 도착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아버지의 곁에 있고 싶은 마음에 달려왔습니다. 아버지께서 움직이시는데 어찌 당신의 충실한 자식인 제가 가만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마약왕이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매끄럽게 말을 이어갔다.

“그러니 뒤는 제게 맡기시고 집으로 돌아가시지요. 아버지께서 사라지셨다고 고용인들이 모두 깜짝 놀랐습니다.”

그때는 마약왕이 처음 능력을 각성하고 부모를 찾는 아이처럼 자신을 따라다닌다고 별 뜻 없이 생각했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니 그는 신재언을 독차지하고 자신만이 그의 수발을 들고 싶다는 욕망을 무의식중에 표출했던 것 같았다.

그의 말에 재언은 멍한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생존자를 쳐다보았다. 그는 순식간에 벌어진 참극에 넋이 빠져 증오는커녕 현실도 인지하지 못한 듯 눈에 초점이 없었다.

나중에라도 그가 정신을 차리고 다크 카오스의 정체에 대해 떠들고 다닐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래서 마약왕의 제안에 허락을 내리려 했다.

그때 후드티에 달린 주머니 속에 손을 집어넣고 있던 엔레이드맨이 나섰다.

“아버지.”

“응?”

“아버지께서 신경 쓰는 남자라면 훗날 아버지께 좋은 장기 말이 될 수 있을 겁니다. 위대하신 아버지. 이 남자는 저 엔레이드맨에게 맡겨 주시겠습니까? 아버지의 앞에 다시 설 수 있을 만큼 훌륭하게 키워 내겠습니다.”

“…형님.”

원한은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부드러운 목소리를 가진 남자의 눈빛이 어딘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저런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데, 왠지 모르게 온몸이 오싹해졌다.

그때, 후드티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고 원한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던 어린 소년이 움직여 원한에게 향하는 마약왕의 시선을 차단했다.

“마약왕, 너는 나서지 말고 있어라.”

마약왕이라 불린 남자의 나이가 훨씬 많아 보였지만, 그는 어린 소년의 한마디에 꼼짝도 하지 못하고 물러났다.

원한은 순간적으로 마약왕의 눈빛이 음습하고 반항적으로 변했다가 다시 온순해지는 걸 똑똑히 목격했다.

그 상황을 아무것도 모르는 재언은 딱한 감정이 앞서 원한에게 충고 어린 약속을 건네고 가게 밖으로 나갔다. 불쌍해 보이기도 했고 자신의 정체에 대해 떠들고 다니지 않는다면 훗날 그의 복수에 도움을 주자는 심정으로 내뱉었던 말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자신이 한국으로 돌아가면 만날 일은 없으리라 생각해서 완전히 잊고 있었다.

“아버지께서 널 다시 찾을 때까지 네 뒤는 내가 봐주도록 하지. 넌 새롭게 태어나는 거야.”

엔레이드맨은 한순간에 모든 것을 다 잃은 원한을 향해 동정이 아닌 냉정한 시선을 보냈다.

그날 이후, 원한에게는 새로운 지위와 권력이 주어졌다. 엔레이드맨은 망해 가는 조직의 뒷배를 봐주는 대신 자신이 철저하게 교육한 원한을 보스로 내세웠다.

원한은 검은 태양의 젊은 보스로서 입지를 다져 가는 동안 자신에게 벌어진 상황을 충분히 인지했다. 그리고 할머니와 아이를 가진 약혼녀를 어이없고 억울하게 잃은 것에 대한 분노와 증오를 착실하게 쌓아 갔다.

“전 포기하지 않고 기다렸습니다. 언젠간 다크 카오스님을 다시 만나게 되는 날을요. 제게 힘을 주십시오. 증오가 부족하다면… 더 정진하도록 하겠습니다.”

재언은 이미 원한을 제외하고 모두 밖으로 나가 있는 덩치 형님들을 쳐다보면서 한숨을 쉬었다.

원한이 자신의 얼굴을 알고 있을 게 분명하니 답답한 가면은 쓰고 있을 필요가 없기에 일단 벗었다. 재언이 떨떠름한 목소리로 그에게 물었다.

“원한 씨는 위험등급 A급인 능력자잖아요? 전 이미 능력을 각성한 사람에게 힘을 줄 순 없어요.”

“그건 큰형님… 엔레이드맨 형님께서 설계해 놓으신 일로, 제가 퍼트린 거짓 소문입니다. 전 비각성자입니다.”

어린 데다가 정통성도 확실하지 않다면 검은 태양 내에서 얕잡아 보일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 일부러 능력자라고 속인 모양이었다. 재언은 눈을 감고 관자놀이를 쓰다듬으며 한참을 고민했다.

잠깐 마주친 것뿐이지만, 원한의 눈은 어떠한 갈망과 욕망으로 가득했다. 게다가 그의 얘기를 듣다 보면 한 사내가 떠올랐다.

바로 자신이 내친 마약왕이다. 그는 마약왕과 매우 비슷했다. 총에 의해 가족을 잃었고, 끝내 권력을 잡았으며 욕망으로 가득했다.

원한의 증오는 신재언의 기준을 충분히 넘어섰고 이전에 약속했던 것도 있으니 각성시켜 주는 게 맞았다. 하지만 마약왕이라는 실패가 있었기에 조금 더 신중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었다.

고민하는 재언을 바라보는 원한의 얼굴에서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그는 매우 긴장하고 있었다.

잠시 후, 눈을 뜬 재언은 원한의 손을 덥석 잡고 욕망으로 물든 검은색 눈동자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마약왕은 욕망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망가졌는데, 너는 어떻게 되려나?”

그에 코루루는 또 한 명의 빌런의 탄생에 유쾌한 웃음소리를 내며 환호했다.

“꺄하하하! 아버지께서 우리들의 형제를 새로 만들어 주셨구나. 아버지! 막내의 이름을 알려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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