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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근하는 빌런-288화 (288/324)

288화

원한은 신체 안쪽에서부터 몰려드는 거대한 힘의 폭발에 온몸이 산산조각이 나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고통이 잠잠해지자 밀려들어 오는 것은 공허함이었다.

마치 어두운 우주에 발가벗은 채 표류하는 느낌을 받았다. 주변을 둘러봐도 자신 외에는 아무도 없는, 그런 공허한 분위기가 이어지던 중 그의 앞에 푸른 태양이 떠올랐다.

그 순간 원한은 엄청난 욕망과 증오가 터진 느낌에 눈물을 흘렸다. 목이 쉬도록 도움을 요청했지만, 그 누구도 그를 도우러 오지 않았다.

하지만 저기 떠오르는 푸른 태양은 달랐다. 찬란하게 빛나는 푸른빛은 자신을 외면하지 않을 것이다.

그의 불길에 타 버려 잿더미조차 남지 않는다 해도 상관없었다. 이 모든 고독과 괴로움을 ‘저것’이 만들어 냈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이봐요. 정신이 듭니까?”

재언은 갑자기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멍하니 주저앉아 있는 원한의 얼굴 앞에 대고 손바닥을 흔들다가 손뼉을 쳤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재언의 얼굴을 쳐다보며 눈물만 줄줄 흘리고 있을 뿐이었다.

이 사람이 왜 이러나 싶어서 코루루를 돌아보니 오히려 그녀는 그를 이해한다는 듯 감격에 젖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 감정. 파도처럼 밀려오는 공허함을 저는 잘 알고 있지요.”

코루루는 마치 꿈을 꾸는 것처럼 중얼거렸다.

재언은 감격에 찬 그들을 충분히 이해하고 싶었지만, 시간이 없었다. 마더에게 통보한 시간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간을 먼저 통보한 본인이 늦는 것만큼 창피한 일도 없을 것이다.

재언으로서는 원한의 증오를 지금 각성해 준 건 거의 도박이나 다름없었다. 그래도 그를 각성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 번째로는 엔레이드맨이 그의 뒷배라는 점이었다. 엔레이드맨은 재언이 자식들 중에서 가장 신뢰하는 부하였다.

재언도 그가 하는 말만큼은 무시하지 않고 두 번, 세 번 곱씹을 정도였다. 거기다가 재언이 유일하게 타인의 의견이 필요할 때 의논하는 자식이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그가 먼저 내놓은 조언들은 모두 신재언을 위한 것이었다. 재언의 곁에 놔둘 만한 사람을 엔레이드맨이 아무 생각 없이 고르진 않았을 터였다.

두 번째는 그의 욕망과 증오가 어쩐지 마약왕과 아주 비슷하지만, 다르다는 점이 재언의 흥미를 이끌었다.

재언은 이미 엔레이드맨에 의해 힘과 권력을 쥐게 된 그가 충분히 자신의 욕망을 이룰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럼에도 힘을 원하는 이유가 궁금했다.

거기다가 그의 가족을 죽인 레비아노는 알례리의 손에 파멸을 맞이했고 총에 맞아 죽었다. 아무리 이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아주 유명한 일화’더라도 원한이 가진 권력이라면 레비아노가 어떻게 끝을 맺었는지 모를 리 없었다.

그런데 그는 아직도 원수가 세상에 살아 있는 것처럼 증오를 키웠다. 그에게 아직 풀리지 못한 증오가 있었다는 셈이다.

세 번째는 버드맨 때문이었다. 이건 신재언의 욕심이었지만 버드맨이 다시 바깥세상에 나갈 수 있도록, 평범하게 살아가도록 디딤판을 만들어 주고 싶었다.

그 때문에 마약왕을 다시 받아 주는 실수를 저지르기도 했지만, 그 일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돈과 권력이 있고 사회의 일원으로 자리 잡고 있는 다른 형제가 필요했다.

여러 가지 복합적인 이유로 신재언에 의해 능력을 각성한 원한이 정신을 차린 건 그로부터 몇십 분이 흐른 뒤였다.

다른 자식들은 각성한 뒤 커다란 힘을 얻은 것에 지독한 상실감과 허무함을 느끼고 우울감을 느꼈다.

자신에게 이런 힘이 진작 있었다면 그토록 괴로운 현실을 마주하지 않아도 되었다는 생각으로 한동안 과거의 망령에서 빠져나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원한은 다른 자식들과는 달리 독특한 상황이었던 덕분인지 다른 형제들과 반응이 달랐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지는 상황을 모두 예측하였으며 마음 정리까지 끝낸 상태였다.

“무슨 능력을 각성했지?”

원한의 욕망은 그야말로 욕망. 과연, 욕망 자체를 삼킨 그가 어떤 능력을 각성했을지 제법 궁금해졌다.

“…잘 모르겠습니다… 힘이 솟아나는 건 느껴지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바로 능력을 쓸 수 있었던 녀석들도 있었고 체어맨이나 버드맨처럼 시간이 지나고 능력을 깨우친 경우도 있었지. 너무 조급해하지 마.”

그러자 코루루가 인자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막내야. 이제 너도 우리와 어깨를 맞댈 수 있는 권리를 얻은 거란다. 다른 형제들이 알면 매우 기뻐할 거야. 아버지께서 명령하신 일을 끝내면 너를 우리의 별장으로 초대할게. 위대하신 아버지의 세상을 만들기 위해 형제들이 늘어나는 건 아주 기쁜 일이야.”

그녀는 방금까지도 원한과 그의 조직을 엔레이드맨의 장난감이니 뭐네 비하하며 업신여겼던 태도를 싹 바꿨다. 천의 얼굴을 가진 뮤지컬 배우라는 명성이 괜한 게 아니었다.

“감사합니다, 누님.”

“호호호. 좋아. 아버지, 전 다른 형제들에게 새로운 형제의 탄생을 말해 주러 가야겠어요. 엔레이드맨 오빠도 깨어 있었다면 정말 기뻐했을 텐데 아쉬워요. 그럼 막내야, 나는 이만 돌아가 소식을 전할 테니 내가 올 때까지 아버지를 잘 보살펴드리렴. 어떤 실수도 있어선 안 돼.”

“예, 명심하겠습니다”

원한이 코루루의 말을 경청하고 공손히 대답한 뒤 그녀가 나가자마자 머뭇거리며 재언에게 말을 걸었다.

“엔레이드맨 큰형님께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코루루의 말에서 엔레이드맨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는 것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마더에게 당한 상처가 있어서 지금 누워 있어.”

“…큰형님께서 마더에게 당했다는 말씀이십니까.”

엔레이드맨의 밑에서 몇 년간 함께했던 원한은 그 말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만 끔벅거렸다.

“엔레이드맨은 마더의 친아들이거든.”

재언은 이번 일에 원한도 연관되어 있는 데다 사건 해결에 있어서 중요한 열쇠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이 사실은 다른 자식들도 이미 알고 있는 것이었기에 알려 줘도 무방했다.

다만, 원한은 갑자기 훅 치고 들어온 사실을 처음엔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엔레이드맨 형님이 마더의 자식이라고요?”

“맞아. 엔레이드맨은 마더의 친아들이야. 10년 전 내가 엔레이드맨을 구해서 데리고 있는 것뿐이야. 지금의 박주현은 가짜야.”

재언이 다시 가면을 뒤집어쓰며 말을 이었다.

“그 남자가 어떻게 마더를 속일 수 있었나 궁금했는데 사물의 기억을 읽을 수 있다고… 같잖은 장난질을 쳤어. 중요한 건 그런 남자에게 누군가가 엔레이드맨의 장난감을 줬냐는 거야…….”

그 같잖은 장난질 때문에 엔레이드맨의 정신이 흐트러져 호된 꼴을 당했다.

원한은 재언이 씁쓸하게 중얼거리는 소리에 심장이 철렁함을 느꼈다. 방금까지만 해도 눈앞의 남자를 경외하고 공포와 선망 어린 감정만 가졌다면 지금은 뭔가 달랐다.

다크 카오스가 자신에게 실망한다면, 그래서 그에게 내쳐진다고 생각하니 당장이라도 머리에 총구를 겨냥해 죽고 싶어졌다.

푸른 태양처럼 위대하신 분께서 그깟 쓰레기 같은 놈들 때문에 무거운 한숨을 쉬다니,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거대한 분노가 차올랐다.

‘이놈 이거, 눈깔이 왜 이래? 돌아 버린 것 같은데?’

물론 재언은 화르르 타오르는 원한의 눈빛이 너무나도 부담스러웠다. 헛기침하며 분위기를 바꾸려 애썼다.

“그런 이유로 박주원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 온 건데. 너희 쪽에서 조사해 온 자료가 있다면 전부 알려 주겠어?”

“물론입니다.”

갑자기 원한이 양 볼을 한껏 붉게 물들이며 쑥스럽다는 듯 한마디 덧붙였다.

“아버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런데 이게 끝이 아니었다.

재언이 팔뚝을 문지르며 진정시키는 동안 원한은 임원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부하 중에서 가장 믿을 만한 세 명을 추려 안으로 들어오게 했다.

그러고는 작은 목소리로 부하들에게 무언가를 설명했는데, 재언은 그것이 박주원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건 신재언의 오산이었다.

그들 중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남자가 뒷짐을 지고 원한을 향해 허리를 깊게 숙였다.

“축하드립니다, 형님!”

무슨 구호를 외치는 것처럼 뒤에 있는 두 명이 그를 따라 소리쳤다.

“축하드립니다! 형님!”

“다크 카오스님의 아홉 번째 자식이 되신 걸 축하드립니다!”

뜨겁고 뜨거운 조폭들의 외침에 재언은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인 채 수치심에 몸부림쳤다.

‘제발 그만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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