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근하는 빌런-290화 (290/324)

290화

세간에서는 히어로가 모종의 사건으로 빌런이 되는 현상을 ‘히어로의 몰락’이라고 부른다. 재언은 바로 눈앞에서 S급 히어로가 몰락하는 걸 목격하고 말았다.

어떻게든 그녀를 말려 보려 손을 뻗어 보았지만, 마더는 온 힘을 실어 재언의 손을 뿌리치고 밀쳤다.

“마더!”

“아버지!”

S급 히어로의 강한 힘에 재언은 그대로 밀려나 뒤로 꼴사납게 나뒹굴었다. 코루루가 깜짝 놀라 부축하러 다가갔지만, 재언이 벌떡 일어나는 게 더 빨랐다.

“마더! 제 얘기를 좀 들어 주세요. 엔레이드맨… 박주현은!”

힘껏 소리치며 그녀에게 말을 걸어도 그녀는 도통 들을 생각이 없는 듯했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대변하듯이 마더를 감싸고 있던 찬란한 빛이 까맣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그동안 자신이 지키고자 했던 평범한 사람들이 사랑하는 아들을 사지로 몰아넣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의 절망감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세상의 모든 사람이 엔레이드맨을 학대했던 섬 주민들처럼 전부 악하지는 않았다. 다만 마더는 그런 것까지 고려할 만한 정신 상태가 아니었을 뿐이다.

“과, 과연 아버지이십니다… 저, 저 마더를 몰락시키다니…….”

원한이 주춤거리면서도 ‘히어로의 몰락’에 연신 감탄을 내뱉는 것과 반대로 재언은 죽을 맛이었다.

다른 히어로 중에서도 특히나 마더는 정의의 검, 심판의 칼이라 불리는 ‘The sword of Judgment’의 주인이었다. 흔들리지 않는 정의로움이 그녀의 힘이자 능력이었다.

누구보다 정의로웠던 이가 이렇게 타락해 버리다니.

“형.”

망막에 이상이라도 생긴 것처럼 눈앞이 점멸했다. 오래되어 색이 바랜 TV를 시청하는 듯 시야가 흐릿해졌다.

그 속에서 재언은 어떤 남자의 목소리를 들었다.

“형은 어둠이야… 형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타락할 거야.”

“어둠에 물드는 거야.”

누구일까. 분명 익숙하게 들어 본 목소리인데…….

재언이 주춤하는 사이 검게 물든 정의의 검을 손에 든 마더가 뒤돌아 뛰기 시작했다. 멍하니 있다가 황급히 정신을 차린 재언은 흐릿한 기억을 더듬기보다는 마더를 붙잡는 게 더 먼저라고 생각해 코루루에게 소리쳤다.

“코루루! 마더를 막아!”

재언을 부축하고 있던 코루루가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마더를 향해 빠르게 달려갔다. 달리는 그녀의 허벅지와 팔뚝에 결정 모양의 문신이 번쩍임과 동시에 마더의 앞으로 거대한 얼음의 벽이 나타났다.

하지만 마더는 50대의 육체라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날렵하게 얼음벽을 타고 뛰어 올라갔다. 그에 코루루가 눈썹을 살짝 들어 올리자 얼음벽에서 튀어나온 얼음 결정이 마더의 발목을 잡아 얼어붙게 했다.

강한 힘으로 발목이 잡혀 멈춘 마더는 짧은 신음을 토해 내며 정의의 검을 들어 올렸다. 발목에 달라붙은 얼음 족쇄가 물리적으로 끊어지기까지 단 몇 초도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코루루가 그녀를 따라잡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코루루는 단숨에 얼음벽 위로 날아가 마더의 앞에 요염하게 섰다.

“S급 히어로가 이대로 사라지는 편이 우리에겐 더없이 좋은 기회지만, 위대하신 아버지께서 네게 할 말이 있는 모양이야. 마더.”

코루루는 더 이상 마더를 엔레이드맨의 친모로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마더가 엔레이드맨을 공격한 시점에서 그녀는 부모의 자격을 잃었다.

비록 가면에 가려져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마더를 향한 코루루의 말에는 비웃음과 조롱이 가득했다. 코루루는 손바닥으로 얼음송곳을 만들어 마더에게 겨누었다.

그렇게 두 사람의 대치가 얼마나 지났을까, 재언이 허겁지겁 달려와 마더의 뒤에 섰다.

“마더. 일단 대화를 좀 하는 게 어떨까요. 당신의 몰락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일단 몸을 숨기고…….”

마더는 뒤쪽에 원한과 신재언, 앞에는 흉흉한 얼굴로 코루루가 버티고 있는 상황에서 고개를 푹 숙인 채 미동도 없이 서 있었다.

포기한 것일까. 역시 한순간의 증오를 이기지 못하고 몰락한 것일지도 모른다. 지금 당장은 이 모든 상황이 원망스러운 마음일 테니 말이다.

말없이 고개만 숙인 마더의 모습에 방심한 코루루가 몸에서 힘을 살짝 뺐다. 마더는 그 찰나의 틈을 놓치지 않고 발돋움해 달려들어 코루루의 가슴에 검을 찔러넣었다.

엔레이드맨을 공격했던 그때와 똑같은 상황이었다. 재언이 깜짝 놀라 코루루의 이름을 부르려다가 손으로 입을 막았다.

코루루는 이름만으로도 정체가 무엇인지 충분히 알 수 있는 뮤지컬 배우였기 때문이다. 마더가 어떻게 대응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녀의 정체까지 밝힐 수는 없었다.

코루루는 정의의 검이 자신의 가슴을 향해 파고들어 오자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금세 미묘한 얼굴로 변했다. 아무런 방어 자세도 취하지 않았지만, 코루루는 멀쩡하게 서 있었다.

마더의 정의의 검이 빌런인 코루루를 베어 내지 못한 것이다.

“…마더.”

게다가 마더의 검은 코루루의 심장을 뚫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마더가 손을 놓자마자 환상처럼 사라져 버렸다.

“난… 두 번 다시 내 아들을 공격하지 않겠어.”

재언에게 나직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곤 눈물을 흘리며 터덜터덜 걸어갔다. 재언은 멀어져 가는 마더의 뒷모습만 멍하니 바라보았다.

정의의 검이 검게 물들어 빌런을 공격할 수 없게 되었다. 그 뜻은 반대로 해석하면, 마더의 검은 이제 빌런이 아닌 정의로운 히어로들을 공격하기 위한 것이 되었을지도 모른단 소리였다.

재언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끙끙 앓는 소리를 냈다. 그는 진심으로 이런 결말을 원하지 않았다. S급 히어로 마더가 몰락하길 바랐던 게 아니었다.

“일단 돌아가자.”

달이 지고 있었다.

@

“막내의 탄생은 늘 축복해야 하는 경사이지요.”

체어맨이 부드러운 말투로 새로운 막내를 환영했다. 재언은 심란한 마음을 뒤로하고 원한을 ‘파도치는 절벽 위 별장’으로 데려왔다.

아직 그의 능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기에 빌런 명이 아직 정해지지 않아 호칭이 애매했다. 하지만 모두 막내라고 부르는 것으로 보아 당분간은 그의 호칭을 정리할 필요는 없을 듯했다.

말로만 들어 오던 거대 빌런들을 눈앞에서 마주하게 된 원한은 처음엔 굉장히 긴장하며 부담스러워했다. 하지만 엔레이드맨이 그동안 교육을 잘해 놓았는지 곧 형님, 누님거리면서 편하게 대하기 시작했다.

오히려 버드맨이 거실에 들어오지 못하고 입구에 서성이며 눈치를 보고 서 있었다.

“버드맨, 이리 와.”

재언이 그런 그를 부드러운 말투로 불렀다. 버드맨이 심각하게 낯을 가리는 편인가 싶었는데, 왠지 모르게 원한을 꺼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가 빈말로도 성실해 보이지 않은 외모를 가진 탓일까. 아니면 이전에 지독하게 버드맨을 괴롭혔던 일진들을 투영해 보는 것일 수도 있겠다.

버드맨의 후원자로 원한을 점찍어 두었던 재언은 그가 불편해하는 게 굉장히 신경 쓰였다.

“안녕하십니까, 형님.”

“아…….”

“편하게 한이라고 불러 주십쇼.”

다행히 원한이 눈치 빠르게 움직였다. 재언이 말하지 않았어도 자식 중 가장 신경 쓰는 이가 버드맨이라는 걸 알아차리고 먼저 다가간 것이다.

그는 부드럽게 웃는 얼굴로 버드맨에게 인사를 건넸다. 나이 차이가 크진 않지만, 자신보다 나이가 어린 버드맨에게 원한이 고개 숙여 아래를 자처했다.

그 행동에 버드맨은 아까보다 한결 편한 표정으로 걸음을 옮겨 거실로 들어왔다.

“잘 부탁해요……. 난, 그러니까… 편하게 말해 줬으면 좋겠어요.”

아무리 형제들의 서열이 나이에 상관없이 능력을 각성한 기준으로 정해진다곤 하지만, 버드맨은 자신이 가장 어린 게 신경 쓰인 듯했다. 나이가 가장 중요한 나라에 사는 학생다운 대답이었다.

두 막내의 어색한 인사를 지켜보던 재언은 이 정도면 그래도 버드맨이 많이 노력한 편이라는 걸 알고 안심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타락한 추기경에게 물었다.

“엔레이드맨은?”

“아직 눈을 뜨지 못했습니다.”

오늘도 엔레이드맨을 위한 축복을 기도했는지 타락한 추기경의 새하얀 신부복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래도 상태가 많이 호전되었습니다. 레드-헬-파이어에게 당했을 때보다 나아졌습니다. 직접 확인해 보시겠습니까?”

“그래.”

재언이 고개를 끄덕이며 타락한 추기경을 따라 엔레이드맨이 누워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아버지를 방패 삼아 원한과 인사를 나누던 버드맨이 화들짝 놀라 등을 돌렸다.

버드맨은 지금도 굉장히 위태로웠고 재언이 곁에 없으면 마치 길잃은 아이처럼 어쩔 줄 몰라 하는 둥 불안증세를 보이곤 했다.

능력을 각성한 뒤로 그 누구도 그에게 해를 입힌 적 없건만 그는 아직도 더러운 화장실에 갇힌 채 누군가의 구원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이번엔 반드시 내가 구해 줄게…….”

“막내야, 그런 하찮고 나약한 감정은 필요 없단다.”

“세준아… 네가 그러니까 이상한 취급을 받는 거야.”

홀로 방 안에 누워 있으면 반복되는 기억들이 버드맨의 정신을 갉아먹으며 괴롭혔다. 머리가 욱신거리는 통증과 함께 불안한 감정도 점점 커지던 그때, 원한의 손바닥이 버드맨의 머리 위에 얹어졌다.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든 버드맨에 원한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손을 뒤로 물렸다.

“아,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원한이 변명하듯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사실 버드맨은 원한이 초면이겠지만, 원한은 버드맨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와 직접 만난 적은 없어도 그가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만들며 데뷔식을 치른 빌런이었기 때문이다.

이미 얼굴이 알려진 데다 방송에서 거액의 현상금과 함께 버드맨이 저지른 악행과 사회 부적응자적인 면모들을 온종일 떠들어 댔다.

하지만 원한은 다르게 느껴졌다. 버드맨이 악명과는 달리 위태로운 아이처럼 보였기 때문일까.

원한은 위대하신 아버지 다크 카오스가 그를 왜 신경 쓰는지 알 것 같았다. 그러다가 버드맨의 폭신해 보이는 정수리 위로 불길한 검은 안개 같은 것이 올라오는 게 보여서 저도 모르게 그것을 잡느라고 쓰다듬는 모양새가 되어 버린 것이다.

‘대체 뭐였지, 그 검은 안개는… 불길해 보였기에 잡았는데 바로 사라졌군.’

원한 역시 자신이 무슨 짓을 벌인 건지 의아해하는 사이 버드맨의 혼탁하고 어지러웠던 눈동자에 점차 생기가 돌아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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