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근하는 빌런-291화 (291/324)

291화

“꺄아아악!”

거대화한 괴물 빌런의 습격에 도망치다가 다리가 접질린 한 여성의 위로 건물이 무너져 내렸다. 찢어지는 비명을 지르며 고개를 푹 숙였던 여성은 한참이 지나도 충격이 가해지지 않자 슬그머니 눈을 떠 눈동자를 굴렸다.

이제 보니 커다란 방패가 위에서 떨어진 건물 잔해로부터 그녀가 다치지 않게 막아 주고 있었다.

“아… 아…….”

“어서 도망가세요!”

그녀에게 소리치는 남자의 목소리가 매우 앳되었다.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꾸벅 숙인 여성은 다리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는지 몇 번이나 비틀거리면서도 느린 걸음으로 무사히 사고 현장에서 빠져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아직도 하늘 위에서는 거대 괴수형 빌런이 난동을 부리며 고층 빌딩들을 박살 내는 중이었다.

“선배!”

양손을 교차해 거대한 방패를 만들어 하늘에서 떨어지는 건물 잔해를 막으며 시민들을 보호하던 청년이 위쪽을 향해 소리쳤다. 그러자 에스트리아 박재원이 하늘로 붕 떠올라 날카로운 창을 소환해 괴물 빌런의 정수리에 꽂아 버렸다.

그것으로 서울 도심을 공포로 물들게 했던 빌런의 테러는 건물 세 개만 부서진 작은 해프닝으로 끝이 났다.

곧 히어로 협회 복원팀이 출동할 테니 이 주변의 시민들만 잘 대피시킨다면 내일쯤 모든 게 다시 정상으로 돌아올 것이다.

“최강의 방패. 사람들은?”

“거의 다 대피시켰어요.”

최강의 방패, 최민수가 방긋 웃으며 박재원의 물음에 대답했다.

능력을 각성하면 신체 조직에도 변화가 생긴다. 최민수는 그 덕분에 시력이 좋아져서 안경이 필요 없어지고 키도 더욱 커졌다. 항상 끼고 다녔던 도수가 높은 안경을 벗으니 옹졸해 보였던 작은 눈이 커지고 감춰져 있던 준수한 얼굴이 드러났다.

그뿐만 아니라 히어로 활동을 위해 운동을 꾸준히 한 덕에 풍채도 제법 좋아져 대중들이 그의 외모에 열광하기 시작했다.

많은 기업과 히어로 협회, 혹은 다른 히어로 사무실에서 많은 러브콜을 받은 최강의 방패는 모든 제안을 거절했다. 그리고 에스트리아 박재원의 사무실에 제 발로 들어가 히어로 경험을 쌓는 중이었다.

히어로 에스트리아는 S급이지만 주로 사회적 약자들을 무료로 도와주는 경우가 많아서 S급은 물론 다른 A급 히어로들보다 수입이 적었다. 그래서인지 에스트리아의 사무실엔 그 흔한 사이드킥이 한 명도 없었는데, 최민수가 들어오며 그 자리가 채워졌다.

본인이 직접 잡은 빌런을 히어로 협회에 인도한 박재원이 주변을 살폈다. 그러다가 이런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영업을 재개하는 카페를 가리키며 최민수에게 물었다.

“저쪽에서 음료라도 한 잔 살래? 내가 살게.”

“선배 돈 없잖아요.”

“그 정도 돈은 있거든!”

박재원이 헛기침하면서 소리쳤다. 돈벌이가 좋은 다른 히어로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좋지 않다는 말이지 거지꼴을 간신히 면한다거나 그런 건 아니었다.

아무것도 없는 자신의 사무실 문을 두드린 후배 히어로에게 생활비로 쓸 월급과 음료 사 줄 돈은 있었다.

“방어계열 능력은 사기업에서도 인기가 많잖아. 꽤 높은 금액을 부른 걸로 아는데, 왜 내 사무실로 온 거냐.”

최민수의 등을 강제로 떠밀어 들어온 카페에서 박재원은 메뉴 중 가장 저렴한 복숭아 맛 티를 고르며 물었다. 최민수도 그와 같은 메뉴를 고르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는 일진들에게 찍혀 괴롭힘 당했던, 그때의 움츠렸던 모습이 거짓말인 것처럼 넓어진 어깨를 당당하게 펴고 다녔다. 이제 더 이상 겁쟁이처럼 숨지 않겠다고 다짐했기 때문이다.

“가장 히어로 같은 사람의 밑에서 배우고 싶었어요.”

“…….”

예고도 없이 훅 들어온 칭찬에 박재원은 쑥스러워하며 뒤통수를 긁적였다. 겉모습만 보면 최민수를 괴롭혔던 일진들과 비슷한 양아치 그 자체였다. 하지만 사실 그는 약한 사람에게 약하고 강한 사람에게 강한, 속이 깊은 사람이었다.

“…허허, 근데… 내가 가장 히어로 같지는… 않은데. 흠흠.”

부끄러워하면서도 못내 싫진 않은지 박재원이 흐뭇하게 미소 띤 얼굴로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최민수가 그런 그를 힐끔 보더니 복숭아 티를 한 모금 마시며 무심한 투로 물었다.

“애인이에요? 항상 연락하던데.”

“아, 뭐… 부끄럽게.”

그에 박재원은 머쓱한 듯 웃다가 최민수의 어깨를 팔꿈치로 툭 쳤다.

“그러는 너도 인터뷰 때 화려하게 고백했잖아. 곁에 있고 싶은 사람이 있다고 아주 뜨겁게. 내가 다 낯부끄러웠다고.”

“…네. 제가 가장 힘들 때 절 구해 준 사람이었거든요.”

박재원이 웃음기를 거두고 한마디 툭 던졌다.

“친절한 사람인가 보네.”

“…친절… 으음… 수줍음이 많은 애예요.”

자기 말을 진지하게 들어 주는 사람이 드디어 나타났다고 생각했는지 최민수가 눈동자를 반작이며 고개를 들었다.

“…하루빨리 제대로 된 히어로가 되어서 그 애 앞에 당당하게 서고 싶어요. 어두운 늪에 빠진 그 애를 구해 주고 싶어요. 제 눈에는… 울고 있는 것처럼 보였거든요. 그 애는 제가 누군가의 도움을 간절히 바랐을 때 절 구해 주었으니까요.”

박재원은 뜨거운 고백보다 뜨거운 그의 말을 비웃거나 무시하지 않고 말없이 경청했다.

“그러니까 이번엔 제가 울고 있는 그를 구해 줄 거예요.”

최민수는 자신의 능력이 각성한 그날을 떠올렸다. 볼프강과 대적하는 그의 얼굴이 마치 우는 것처럼 보였다. 절규하는 듯했다.

그렇게 강한 힘을 가지고 있음에도 그는 자신을 고통 속으로 끌어당기는 무언가로부터 빠져나오지 못했다.

‘내가 지켜 주고 싶어. 내가 구해 주고 싶어.’

그 간절한 욕망은 능력이 되어 최민수의 영혼에 각인되었다. 그것이 그를 대한민국의 열한 번째 S급 히어로로 만들어 준 것이다.

박재원은 그의 말에 잠시 생각에 잠긴 듯 꺼진 핸드폰 화면을 엄지로 쓰다듬었다.

“나도 마찬가지야.”

“선배도요?”

“난 빚쟁이였거든. 친구 보증을 잘못 서 줘서 쫓기는 신세가 돼 버렸어. 하필 사채를 써 버려서… 도망치는 와중에 차원 이동을 하게 된 거야. 에스트리아에서 힘을 얻고 돌아왔지만…….”

에스트리아 박재원의 과거는 세간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오직 본인만이 아는 이야기였다.

“부모님과 친구가 사채업자들에게 살해당한 뒤였어. 너무 절망스러워서 죽고 싶었고 죽어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그녀의 노랫소리를 들은 거야. 나를 살려 준, 정말 순수하고 착한 사람의 노래가.”

지금이야 복숭아 티를 한 모금 마시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하지만, 이렇게 되기까지 그에게도 많은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최민수는 굳게 다짐하는 듯한 표정으로 힘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둘 다 힘내요!”

“빌런들이 사랑하는 사람의 일상을 망치지 않게 힘내 보자고.”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이 희망으로 가득한 말을 내뱉으며 주먹을 맞대었다.

@

버드맨은 흐리멍덩했던 정신이 점점 돌아오는 걸 느꼈다. 지금까지 그를 괴롭혀 온 검은 안개가 거두어지는 느낌이었다.

그와 동시에 누군가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건 부모님의 얼굴이기도, 친구들의 얼굴이기도 했다.

그리고 자신을 괴롭혔던 아이들의 얼굴도 보였다. 학살자 버드맨이 깃털로 산산조각 냈을 뿐만 아니라 잔인하게 찢어 죽인 아이들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소년도 있었다.

‘꼭 구해 줄게.’

환청처럼 어떤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버드맨은 겁에 질린 얼굴로 다급하게 이불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바깥에선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파도치는 절벽 위 별장’의 창문을 검은 비가 세차게 두드리고 있었다. 이곳은 늘 푸른색 달이 뜨고 검은 비가 내리며 검은 파도가 치는 곳이었다.

정신적으로 아직 미성숙한 소년이 지내기에는 환경이 우중충하기 짝이 없었다. 그 때문에 신재언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싫어. 아버지께 폐가 되는 것만큼은 싫어. 내가 얼른 도움이 되어야 해. 나도, 얼른… 아버지께서, 이용할 수 있는, 그런… 그런.’

누군가가 강세준을 비웃었다.

누군가가 강세준의 옷을 벗겼다.

누군가가 강세준을 발로 차고 때리고… 그 위로 오물을 쏟았다.

그곳은 PC방이기도, 인적이 드문 주차장이기도, 더러운 화장실이기도 했다.

‘다음엔 내가 반드시 널 구해 줄게.’

“닥쳐, 닥쳐 제발! 닥쳐… 기대하게 하지 마. 그냥 이대로 살게 내버려 둬. 아무도 날 때리지 않아. 아무도 날 괴롭히지 않는다고! 그냥, 날 이곳에 있게 해 줘.”

버드맨이 몸을 잔뜩 움츠린 채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으며 소리쳤다.

예전엔 자신이 이럴 때마다 마약왕 형님이 딱하다는 표정으로 나타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리고 친구라고 생각한 지오반니는 더 이상 머리가 아파지지 않을 것이라며 약을 가져다주었다.

그의 말대로 푸른색 구슬처럼 생긴 그 약을 먹으면 두통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그나마 이번에 새로 들어온 막내라는 사람이 머리를 쓰다듬었을 때 깨질 듯 아팠던 머리가 조금 나아져서 정신이 깨끗해지긴 했었다.

불안증이 조금은 진정되고 멍하니 창밖을 보던 중 하늘에 떠 있는 푸른색 달이 점점 커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버드맨이 머리를 갸웃거리며 자세히 보기 위해 고개를 내민 순간 갑자기 별장 안이 소란스러워졌다.

각자의 서열을 중시하는 형제들이기에 별장에서 소란이 일어나는 일은 매우 드물었다. 최근엔 엔레이드맨이 크게 다쳐서 소란스러웠을 뿐이었다.

버드맨이 비틀거리며 일어나 방문을 살짝 열었다.

코루루의 경악에 찬 목소리가 들렸다.

“네가 왜 여기에! 마약왕!?”

‘…마약왕 형님이?’

마약왕은 위대하신 아버지에게 추방당해 이곳으로 영영 들어올 수 없었을 것이다. 버드맨이 문을 좀 더 열고 바깥 상황을 살폈다.

그런데 거짓말처럼 마약왕이 우아한 몸짓으로 ‘파도치는 절벽 위 별장’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는 느릿하게 옷깃을 툭툭 치는 등 매무새를 정리하더니 고개를 들어 살짝 미소 지었다.

“누님, 오랜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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