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2화
능청스러운 인사에 코루루가 경악 어린 목소리로 소리쳤다.
“마약왕! 네가 어떻게 여기에? 설마 아버지의 명령을 거역하는 거니?”
마약왕이 과장된 몸짓으로 가슴에 손을 얹으며 슬픈 표정을 지었다.
“누님.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제가 어떻게 위대하신 아버지의 말씀을 거역할 수 있겠어요.”
‘파도치는 절벽 위 별장’은 아버지의 허락 없이는 들어오지 못하는 어둠의 성역.
아버지가 가장 신뢰하는 자식, 파수꾼 엔레이드맨이 외부인으로 규정된 자는 절대로 들어올 수 없게 철통같이 지키는 곳이었다.
그러므로 아버지에게 쫓겨나 퇴출당한 자식, 마약왕은 들어올 수 없는 곳이다. 하지만 엔레이드맨이 S급 히어로 마더에 의해 크게 다쳐 결계가 흔들린 틈을 마약왕은 놓치지 않았다.
코루루는 형제들끼리 싸워서는 안 되며 특히나 이곳에서는 전투를 벌이지 말라고 했던 재언의 당부를 떠올렸다. 그런데 파문당한 자식도 아버지가 말한 범주 안에 들어가는지 헷갈려서 당혹스러웠다.
당황한 표정을 애써 숨기며 코루루는 방문을 열고 나와 어정쩡하게 서 있는 버드맨과 소파에 앉아 이쪽을 바라보는 원한을 번갈아 쳐다봤다.
원한은 냉기와 제안의 마녀가 세계적인 뮤지컬 스타 코루루라는 사실을 겨우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런데 마약왕이라고 나타난 남자가 이탈리아의 대부호 베네딕트 알례리라는 것에 정신이 하나도 없는 상태였다.
나름대로 회사를 설립하고 경영해 온 그가 세계 금융시장의 거대한 자금처인 베네딕트 가의 주인을 못 알아볼 리 없었다. 물론 그뿐만이 아니더라도 알례리의 얼굴만큼은 잊지 못했다.
‘알례리가… 마약왕.’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시선을 느낀 알례리가 고개를 돌렸다. 그 또한 원한을 한눈에 알아보고 싸늘한 눈빛을 보냈다가 곧바로 신사적인 미소를 지어냈다.
“과연… 그때 아버지께서 눈여겨보신다고 생각했는데 그 이유가 있었구나. 새로운 우리의 형제로군요.”
원한은 알례리의 웃는 얼굴 뒤에 여전히 존재하는 싸늘함을 읽었다.
“마약왕. 넌 우리가 아니지. 아버지께 버림받았잖아.”
코루루가 끼어들어 알례리의 말을 정정했지만, 그는 대놓고 그녀를 무시하며 고개를 돌려 버드맨을 바라보았다. 그에게 심어 놓은 싹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오, 우리의 귀여운 막내가 아닙니까. 이리 오렴. 오랜만에 만났는데 이 형님이 네 몸 상태를 확인해 주마.”
그 모습에 코루루는 혹시라도 알례리가 막내들에게 무슨 짓을 한다면 공격해서 떨어트려 놓을 생각으로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하지만 마약왕은 우아하게 별장 거실 안으로 들어와 버드맨 앞에 서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눈으로 훑었다. 이윽고 그는 버드맨의 안에 심어 놓았던 씨앗이 흔적도 남지 않고 사라졌다는 것을 깨닫고 야차처럼 얼굴을 잔뜩 일그러트렸다.
“감히… 어떤 놈이냐. 저놈 짓이냐?”
알례리의 사나운 눈빛이 소파에 앉아 있는 원한에게 향했다. 험악해지는 분위기와 알례리의 앞에서 벌벌 떠는 듯한 버드맨의 모습에 코루루는 참지 못하고 앞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
마약왕이 가진 능력 자체가 전투에 특화된 건 아니었지만, 과거를 바꿀 수 있다는 것 때문에 손이 닿으면 골치가 아팠다.
알례리가 퇴출당한 직후, 걱정하는 자식들에게 재언이 이렇게 말해 준 적이 있었다.
“마약왕은 과거를 바꿀 수 있지만, 사람의 운명을 바꿀 순 없어. 그러니까 무슨 말이냐면… 자기가 유리하게 과거를 조작할 뿐. 네가 걱정하는 극심한 변화는 없을 거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무서운 능력이긴 해.”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코루루의 팔다리에 결정 모양의 문신이 드러나는 걸 확인한 알례리가 손가락으로 딱 하는 소리를 내며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갑작스럽게 머리 위에 나타나 자신을 공격하는 힘에 코루루는 얼음송곳을 만들어 막아 냈다.
“하하하, 하하하하. 이 여자가 바로 그 마녀입니까, 보스?”
“정말 아름다운 사람이군. 추악한 너와 비교할 수 없어, 츠유.”
“로에즈 이 망할 놈이…….”
알례리와 코루루 사이에 끼어든 불청객은 머리가 두 개 달린 괴인이었다. 거기다가 여성과 남성의 몸을 부자연스럽게 봉합한 듯 반쪽은 여성, 반쪽은 남성인 신체를 가진 끔찍한 모습이었다.
코루루는 뒤로 한발 물러나 가늘게 뜬 눈으로 마약왕을 쳐다보았다. 아버지께서 마약왕을 쳐 냈을 땐 왜 그렇게까지 했는지 의아한 기분이 들었는데, 역시 위대한 뜻이 있으셨다.
이제 보니 알례리는 완전히 미쳐 있었다.
“마약왕…….”
“안녕하세요, 언니. 우리는 위대한 서커스. 무대를 준비하지 못하는 당신들을 연기할 광대들입니다. 이 츠유는 당신을 위해 만들어졌어요. 그러니까 언니. 우리의 무대를 느긋하게 감상해 주길 바라요!”
“감상평은 남겨 주셔야 합니다. 지옥에서요.”
철끈으로 몸과 연결되었을 뿐인 머리 두 개가 깔깔 웃기 시작했다.
“무대 준비는 끝났어요. 이제 ‘위대하신 그분’을 데려가면 완벽한 극이 완성될 거라고요. 세계는 ‘위대하신 그분’의 발아래 놓이게 될 거예요. 멸망할 거예요! 그분께서 이뤄 냈던 업적처럼!”
잔뜩 흥분한 여자 머리가 비명처럼 소리를 질렀다. 방금까지도 농담을 내뱉던 여유로운 모습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흥분으로 격앙된 얼굴만이 남았다.
그에 불쾌함을 참을 수 없었던 코루루가 결국 머리 두 개 달린 괴인을 향해 얼음송곳을 내던졌다.
알례리는 대치하는 그들을 힐끗 보기만 하고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꼼짝도 못 하고 벌벌 떨고 있는 버드맨을 향해 손을 뻗었다.
알례리에게 대항할 수 있는 힘이 있음에도 버드맨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손을 멍하니 쳐다보기만 했다. 버드맨의 머리에 손이 닿으려는 순간, 두 사람의 사이를 누군가가 비집고 들어왔다.
“형님. 처음 만나 뵈어 인사가 늦었지만… 그 이상으로 이곳에서 나대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아버지께 제 능력을 인정받기 위해선 당신을 말려야 할 테니까요.”
원한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하긴 했지만, 곧 냉정을 되찾고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마약왕이 퇴출당했다는 건 코루루의 반응으로 확실해졌으니 그가 이곳에서 멋대로 행동하게 둘 수 없었다.
그를 가만히 놔둔다면 이제 막 위대하신 아버지의 안배에 놓인 자신이 어떤 평가를 받게 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건방진 놈… 그때 엔레이드맨 형님을 무시하고 널 죽였어야 했는데.”
“이런. 저도 안타깝습니다. 내 가족을 죽인 원흉이 형제가 되어 나타난 것이.”
원한의 눈동자가 깊은 증오와 욕망으로 이글거렸다. 그렇게 별장 안은 알례리와 원한, 코루루와 머리 두 개 달린 괴인이 대치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폭발하기 직전, 일촉즉발의 상황을 깨트린 건 벌컥 열린 거실문이었다. 모두의 이목을 집중시킨 장본인은 이번 일의 가장 중심이 되는 이, 그들의 아버지 신재언이었다.
재언은 다른 자식들을 데리고 마더를 찾기 위해 한참 동안 밖을 돌아다니고 온 참이었다. 그는 히어로 협회와 마더의 사무실, 집까지 다 돌아보고도 마더를 발견하지 못해서 아주 피곤한 상태였다.
“정말 피곤해 죽겠네……. 마더의 행적을 좀처럼 찾을 수가 없었어. 귀신들의 성녀가 악령까지 풀어서 찾았는데도… 대체 어디로 간 거지? 코루루. 막내들 잘 챙기고 있었어?”
크게 한숨을 내쉬며 문을 넘어온 재언은 묘하게 쥐 죽은 듯 조용한 느낌에 위화감을 느끼고 주변을 돌아보았다. 피눈물을 흘리며 타락한 추기경이 먼저 입을 열었다.
“…마약왕. 당신이 왜 여기 있는 겁니까.”
재언은 자신이 없는 사이 벌어진 일에 말문이 턱 막혔다.
‘…세계가 멸망하기라도 했나?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야?’
두 명만 모여도 히어로 협회에서 거품 물고 기절할 빌런들이 한자리에 옹기종기 모여 싸우기 직전의 상황이라니. 지금 당장이라도 뒤돌아서 이 자리를 뛰쳐나가고 싶어졌다.
“오랜만입니다, 형제들이여……. 저 마약왕이 아버지를 모시기 위해 이곳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부디 노여움을 풀어 주세요. 형님 누님들.”
“아버지를 모시고 간다니. 쉬이 흘려들을 수 없는 말이군요. 마약왕.”
인자한 신사인 체어맨마저 반투명한 면사포에 가려지지 않을 정도로 흉포함을 드러냈다. 그에 재언은 겁에 질린 버드맨, 마약왕과 대치 중인 원한을 차례로 살피고 코루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코루루는 얼음송곳을 든 채 머리 두 개 달린 괴인과 대치 중이었다. 바닥이 얼어붙어 있는 것으로 보아 결국 참지 못하고 능력을 쓴 모양이다.
하지만 이곳은 아무런 걱정 없이 전투를 벌여도 될 만큼 평범한 곳이 아니었다. 여기서 조금만 잘못해도 ‘상위급 존재’들에게 표적이 될지도 모르는 위험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모양이네. 코루루도 다친 곳은 없어 보이고… 판이 더 커지기 전에 온 거로군.’
재언은 한숨을 쉬며 코루루에게 다가가 머리 두 개 달린 괴인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괴인이 얼른 웃음을 거두고 공손하게 인사하듯 고개를 숙였다.
저 모습을 보니 자신의 앞에선 함부로 날뛰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약왕. 내 눈앞에 다시는 나타나지 말라고 했을 텐데.”
재언이 날카롭게 말하자 마약왕이 납죽 엎드리고는 무릎걸음으로 다가왔다. 타락한 추기경이 지팡이를 들고 그가 재언에게 더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막았지만, 마약왕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저 오랜만에 본 아버지의 모습에 감격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네… 저 역시 아버지께서 내리신 가슴 아픈 명령을 들으려고 했습니다.”
그의 눈가에는 오랜만에 부모를 마주한 자식처럼 애처로운 눈물이 한 방울 달려 있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팔을 뻗어 신재언의 손바닥을 붙잡아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순식간에 오소소 돋아 오른 소름에 재언이 손을 빼려 하자 그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마약왕. 아버지께 손대지 마라.”
타락한 추기경이 매섭게 다그쳤지만, 마약왕은 재언의 손을 놓아주지 않고 이어서 말했다.
“아버지… 드디어 완성되었습니다. 이제 아버지를 모시는 건 저 마약왕이 하겠습니다. 다른 형제들은 너무 나약합니다……. 그러니 아버지를 신세계로 이끌 수 있는 길잡이는 오로지 저뿐입니다.”
“설마… 엔레이드맨을 그렇게 만든 게, 너냐?”
마약왕은 재언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가슴 아프다는 듯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 얼굴에 재언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너, 마약왕… 진짜 구제 불능이구나.”
과거 마약왕에게 했던 말을 또다시 뇌까렸다. 그날, 마약왕을 살려 보냈던 건 그에게 가진 애정 때문이었다.
그가 돌이킬 수 없는 짓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모른 척한 신재언의 이기심이었다. 그 이기심이 엔레이드맨을 죽을 위기에 처하게 만들고 마더를 몰락시켰다.
마약왕은 이제 더 이상 그때의 마약왕이 아니었다. 타락한 추기경이 그의 사특한 마음을 눈치채고 팔을 뻗으려 하자 마약왕이 그보다 빨리 신재언의 팔뚝을 붙잡았다.
“감히! 어서 아버지를 놔드려라!”
자식들은 마약왕이 ‘절대로’ 신재언에게 손대지 못할 것이라고 자신했다.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마약왕 또한 설령 죽는 한이 있어도 신재언의 뜻에 거스를 수 없고 해를 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마약왕이 어떤 무모한 짓을 벌여 봤자 소용없을 것이라는 믿음은 방심으로 이어졌다.
“아버지. 저와 함께 갑시다! 당신을 가장 곁에서 모실 수 있는 건 나뿐입니다!”
마약왕에게 팔뚝이 붙잡힌 채 어정쩡하게 서 있던 재언은 갑자기 터지는 밝은 빛에 눈을 질끈 감았다.
잠시 후, 빛이 사라진 ‘파도치는 절벽 위 별장’에는 마약왕과 머리 두 개 달린 괴인, 그리고 신재언의 모습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얼음송곳을 든 채 대치 중이었던 코루루와 마약왕을 공격하려 했던 체어맨과 타락한 추기경, 그리고 멀리서 멍하니 이쪽을 보고 있던 버드맨과 원한까지. 그들 모두 몇 초 동안 재언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머리로 이해하지 못했다.
“아버지?”
코루루가 넋이 나간 듯 재언을 불렀다.
“아버지! 아버지!”
그곳에 남겨진 빌런들이 경악하며 절규했다. 신재언이 그대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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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질끈 감았다 뜬 재언은 알 수 없는 검은 공간으로 몸이 옮겨졌다.
갑자기 바뀐 세상에 시야가 빙글빙글 돌았다. 어지러움에 넘어질 뻔한 몸을 간신히 지탱해 섰다.
‘…으, 머리 아파…….’
재언이 머리를 털며 주변을 돌아보자 자신을 둘러싸고 사람들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리는 광경이 보였다. 방금 봤었던 머리 두 개 달린 괴인도 있었다.
대체 이곳은 어디기에 저 끝까지 보이지 않을 정도로 괴인들이 늘어서 있는 것일까.
황당함을 넘어서서 상황 파악조차도 힘들었다.
신재언의 가장 가까운 발치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마약왕이 환하게 웃었다.
“아버지. 신세계의 시작입니다.”
재언이 고개를 돌리자 그의 뒤쪽에 황금빛 의자가 놓였다. 그리고 그의 발아래로 초토화된 미국의 어느 도시가 비쳤다.
그리고 전 세계 여기저기서 빌런들의 테러가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장면을 재언을 둘러싼 화면들이 보여주고 있었다.
촉수가 달린 괴물들이 연기로 자욱한 도시에서 시민들을 공격하며 죽이고 있었다. 괴물 모두가 다크 카오스를 찬양하면서.
<야근하는 빌런 2부 마침.
3부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