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근하는 빌런-293화 (293/324)

293화

3부

웅크리고 있던 죄악들이 세상을 향해 하나둘씩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다크 카오스의 악명이 나날이 높아지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은 언젠간 세상이 혼돈에 휩싸일지도 모른다고 걱정해 왔었다. 하지만 막상 그것이 눈앞에 현실로 닥치자 패닉에 빠졌다.

물론 다크 카오스가 처음 세상에 나타났을 당시에는 많은 이들이 그가 무슨 일을 저지를까 걱정해 긴장하고 경계했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채 몇 년이나 계속되는 평화에 사람들은 안전불감증을 앓던 예전으로 돌아가 버렸다.

그것은 히어로라 해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한껏 나태해진 히어로들은 오합지졸에 불과했다. 도시가 파괴되고 시민들이 학살되는 데도 제대로 된 대응조차 하지 못하며 우왕좌왕했다.

그 난리 통에 괴인을 대동하고 나선 빌런들은 기고만장해져 더 날뛰었다. 그렇게 미국을 포함한 아메리카 대륙을 시작으로 유럽 전역에도 나타나 세계가 혼란해졌다.

그러는 동안 실시간으로 희생자는 막대하게 늘어나고 있었다. 다크 카오스의 갑작스러운 공격은 평화로웠던 세계를 핏빛으로 물들였다.

“고작 사흘이에요, 사흘! 저 망할 빌런 새끼들에게 당한 사망자만 공식적으로 6만 명이 넘어가고 있습니다! 부상자를 합치면 15만 명이 넘고 아직 집계되지 않은 피해까지 30만 명에 달한다고요. 히어로들 상황은?”

“S급 히어로 3명이 사망, A급은 206명, C급 이하는 수치화 불가능입니다.”

현시점에서 피해가 가장 극심한 미국 히어로 협회장은 핏기 하나 없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보좌관의 보고를 들었다.

그야말로 카오스였다.

고작 사흘. 전력을 다한 것도 아닌데 사흘 만에 빌런들은 세계를 혼란에 빠트리고 피해자를 대량으로 낳고 히어로들을 초토화시켰다.

“…우리가 대한민국을 협회의 본사로 지정하고 돈을 쏟아 준 이유가 뭐겠습니까.”

유럽 히어로 협회 회장이 침착한 얼굴로 나직하게 말했다. 그녀의 말에 각국 협회장들의 고개가 일제히 한 곳을 향했다.

그들의 시선 끝에 놓인 빈 의자는 대한민국 히어로 협회 회장, 김의장의 자리였다.

“이런 난세에 앞장서 줄 영웅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까? 대한민국 히어로 협회는 응당 해야 할 일을 해야 할 텐데요. 지금 당장 레드-헬-파이어를 내세워야 합니다.”

그녀의 말대로 그들에게 남은 희망은 대한민국의 레드-헬-파이어뿐이었다. 하지만 레드-헬-파이어는 돈으로만 움직이는 작자였다.

특히 테러범들을 진압하기 위해 국고를 쏟아부었던 중동 히어로 연합회 회장 마하드는 그가 정의롭고 협회를 위해 움직이는 작자가 아니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대한민국 히어로 협회장은 어디에 있는 겁니까? 이 작자는 이런 때조차도 저 잘난 줄 아는가 보군요. 레드-헬-파이어가 아니었다면 그저 그런 소인배일 뿐인 놈이.”

“그는 히어로가 아니니까요.”

유럽 히어로 협회장이 지긋지긋하다는 표정으로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지끈거리는 머리에 미간을 검지로 지그시 눌렀다.

여태까지 나태하게 돈을 좇던 히어로들을 비웃듯 빌런들은 아주 신나게 공격을 퍼부어 댔다. 그 결과 많은 일반인이 죽거나 다쳤다. 겨우 살아남은 사람들도 하루아침에 살 곳이 없어지고 소중한 사람을 잃었다.

빌런들에게 감정적으로 이해를 바라진 않았다. 그게 먹혔다면 빌런이 아닐 테니까.

“이 상태에서 다시 빌런들이 공세를 해 온다면 어디까지 버틸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대한민국에 계속해서 지원 요청을 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레드-헬-파이어 아닙니까.”

“그 남자는 지독한 엔레이드맨을 한 번에 격파한 히어로니까요.”

레드-헬-파이어가 있어야 세계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그들이 나태해질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의 생각과는 달리 대한민국 히어로 협회는 뚜렷할 만한 움직임이 전혀 없었다. 그들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 초조한 투로 고함을 지르는 중이었다.

결국, 도돌이표처럼 반복되는 대화에 유럽 히어로 협회장은 화상 전화 연결선을 뽑아 버리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회장님!”

그녀의 비서 아넷사가 달려왔다. 유럽의 S급 히어로 ‘가시의 여왕’이 핸드폰을 들고 입을 열었다.

“한국으로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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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을 통해 밝은 빛이 조금씩 새어 들어오는 넓고 웅장한 사무실 안을 어떤 남자가 뒷짐을 지고 선 채로 눈동자만 굴려 훑었다. 그의 뒤에는 눈을 가린 채 딸의 손을 잡은 광안(狂眼)의 성녀가 소파에 앉아 있었다.

사무실 안은 고요했다. 바깥세상은 온통 시끄럽기 그지없는데 누구보다도 가장 바쁘게 움직여야 할 사람의 사무실치고는 지독하게 적막만이 흘렀다.

남자의 사무실 유선 전화는 선이 뽑혀 있었고, 끊임없이 울려 대는 핸드폰은 남자가 창밖으로 던진 지 오래였다. 남자는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이죽거리며 입을 열었다.

“멍청한 놈들. 이제와 꽁지가 빠져라 뛰어다니는 꼴이 아주 웃기는군.”

“…회장님. 저희도… 힘을 합쳐 빌런의 공격에 대비해야 하지 않을까요.”

광안의 성녀가 조심스럽게 건넨 말에 김의장이 눈을 가늘게 떴다.

“언제부터 인형 따위가 말대꾸를 할 수 있었지?”

“…….”

성품이 온화하기로 유명한 그녀는 사실 언제부터인지도 모르는 아주 오래전부터 영혼을 갈취당해 왔다. 협회장이 명령만 하면 언제든 그녀의 세포 조각으로 만들어진 클론에 영혼이 옮겨지는 운명이었다.

전(前) 광안의 성녀는 그녀의 부모이자 그녀 자체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전 생의 기억이 없는 그녀의 삶은 영혼으로 이어진다 하더라도 그 끝이 죽음일지 환생인지는 아무도 정의할 수 없었다. 본인조차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너도 곧 준비해 둬라. 몸을 옮길 준비를 하란 말이야, 이 쓸모없는 년. 나이가 들수록 힘이 약해지다니, 제대로 써먹을 수가 없어.”

김의장이 광안의 성녀를 향해 거칠게 욕설을 내뱉었다.

광안의 성녀는 타인의 생명력을 빼앗아 자신의 힘으로 사용한다. 그 죄악은 그녀의 영혼을 상처 입히다 못해 망가뜨렸다.

삶을 살아갈수록 사람들과 부딪치며 존경을 받다 보면 감정을 알게 되어 영혼이 버티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선대 광안의 성녀들 모두 나이 서른을 넘지 못하고 영혼이 옮겨졌다.

“운 좋게 능력을 얻은 거면서… 내 고통은 전혀 모르겠지.”

김의장은 여전히 뒷짐을 진 채 덤덤하게 말을 이어갔다.

“난 능력이 없어. 모두 능력도 없는 이가 어떻게 히어로 협회의 회장이 될 수 있냐고 말하지. 그건 내가 그까짓 능력자놈들보다 강한 의지와 영혼을 가졌기 때문이야.”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그의 얼굴에는 지독한 열등감으로 가득했다.

“내가 부족한 게 무엇일까. 내가 그놈들보다 모자란 게 무엇이냔 말이야.”

이윽고 남자가 만면에 소름 끼치는 미소를 띠었다.

“하지만… 이제 걱정할 것은 없다. 힘을 얻기 위해 난 악마와도 손을 잡았으니까. 곧 ‘그분’께서 날 선택해 주실 거다. 마약왕. 내 패는 전부 보여 줬다. 이제 네가 약속을 지킬 차례야. 하하하! 하하하하!”

날카롭게 말하며 미친 듯이 웃는 김의장의 모습을 지켜보던 광안의 성녀는 라라의 손을 더욱 힘 있게 잡으며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다른 쪽 손에는 투명한 색의 작고 동그란 구슬이 놓여 있었다. 이것은 광안의 성녀가 가진 능력, 메두사의 눈을 통해 빨아들인 생명을 저장하는 물건이었다.

“너 바보야?! 나한테는 그딴 말을 지껄여 놓고 본인은 죽으려고 했단 말이지?”

날카로운 힐책. 노려보는 눈이 매서웠다.

광안의 성녀가 처음으로 시선을 마주치고도 생명을 빨아들일 수 없었던 강자였다.

‘과연 누가… 진정한 악당일까. 나는, 히어로라고 불려도 되는 것일까.’

광안의 성녀는 누군가를 통해 답을 얻기를 원했으나, 그 답이 돌아오는 걸 기다릴 시간은 많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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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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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시각, 대한민국의 서울 한복판.

하수구에서 지상으로 기어 올라온 괴인이 징그럽게 생긴 촉수를 위로 뻗으며 고통이 가득 담긴 얼굴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와 동시에 괴인의 온몸이 얼어붙기 시작했다.

무시무시한 힘을 자랑하는 괴인이 손을 써 보기도 전에 그의 정수리 위로 날카로운 하이힐 굽이 찍혔다. 딱딱한 콘크리트 바닥을 가르고도 남는 힘에 얼어붙은 괴인의 몸은 산산조각이 나 흔적도 남지 않고 사라졌다.

나타날 때마다 S급과 A급 히어로 여러 명이 달라붙어야만 겨우 막을 수 있었던 괴인을 순식간에 처리한 여성이 요염하게 일어나며 한숨을 쉬었다.

“여긴 끝났어요. 하지만 이놈을 조종하는 빌런은 찾지 못했어요.”

그녀의 입에서 고혹적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녀는 짜증스럽다는 듯 헝클어진 푸른색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그녀가 말을 건넨 위쪽에는 붉은색 눈동자를 번뜩이는 광대 가면의 남자와 뒤로 일곱 개의 그림자가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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