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4화
몸통을 붕대로 칭칭 감고 침대에 누운 채 힘겹게 눈을 뜬 엔레이드맨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는 눈을 떴지만, 초점이 흐릿한지 눈살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마더에게 공격당한 지 2주 만에 겨우 눈을 떴다. 아무리 데스 메이커가 손을 썼어도 워낙 상태가 심각했던지라 그동안 도통 정신을 차리지 못했었다.
타락한 추기경이 정신없는 와중에도 오랜 시간을 들여 축복을 걸어 주지 않았다면 아마 지금도 일어나지 못했을 수 있었다.
그래도 무사히 눈을 뜨게 된 것에 형제들 모두가 안도의 한숨을 돌리며 기뻐했다. 위대하신 아버지께서 납치당한 것만 아니라면 모든 게 완벽했을지도 모른다.
“아버지께서… 마약왕에게?”
“맞아요.”
귀신들의 성녀가 분한 듯 입술을 짓씹었다. 음울하고 어두운 기운이 그녀의 전신에서 흘러나왔다.
그녀에게서 그동안 벌어졌던 일들을 듣게 된 엔레이드맨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자신의 실책이었다. 부상을 입고 정신을 잃지만 않았어도 마약왕이 아버지에게 접근하는 일은 결코 없었을 터였다. 그의 함정에 보기 좋게 걸려들어 지금의 상황을 만들어 버리다니.
“엔레이드맨 오라버니. 일단 진정하세요.”
귀신들의 성녀는 벌떡 일어나 침대에서 벗어나려는 엔레이드맨의 몸을 붙잡아 말렸다. 물론 아버지의 안위가 목숨보다도 중요하지만 그러기에는 엔레이드맨의 상태가 여전히 좋지 않았다.
“마약왕 오라버니가 아버지의 명령에 거역했다 해도… 지금 당장 허튼수작을 부리진 못할 거예요.”
“그… 놈을 살려 두는 게 아니었는데. 아버지께서… 그냥 두고 본다고 하셨어도 내버려 두는 게 아니었어.”
엔레이드맨이 가슴께를 더듬거리며 중얼거렸다. 그가 눈을 떴으니 ‘파도치는 절벽 위 별장’의 결계도 원래대로 돌아왔을 것이다.
마약왕이 또다시 침입해 오지는 못하겠지만 이미 일은 벌어졌다. 오직 단 한 번의 기회를 위해 꾸민 계략에 넘어간 다음에 고쳐 봐야 무슨 소용일까.
그의 침통한 심정을 충분히 이해한 귀신들의 성녀가 우울한 표정으로 눈을 내리깔았다.
“게다가 지금 바깥 사정도 엉망이에요.”
그녀의 말대로 지금 바깥은 혼돈의 도가니였다. 마약왕이 만든 괴물들은 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했고 빌런들은 다크 카오스의 이름을 연호하며 온갖 범법 행위를 저질렀다.
여러 도시에서 테러가 빈번하게 일어나 피해가 막심한데 설상가상으로 그동안 숨죽이며 웅크리고 있던 다른 범죄자들까지 합세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시 침대에 누워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던 엔레이드맨이 한숨을 크게 쉬었다.
“…마약왕 그놈이 준비를 많이 한 모양이군.”
“저희는 지금 아버지의 흔적을 찾는 중이에요. 하지만 우리가 쉽게 찾지 못하는 곳에 숨어 버렸는지 머리카락 한 올도 발견하지 못했어요. 그래서 엔레이드맨 오라버니가 눈을 뜰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었어요.”
귀신들의 성녀가 손을 들어 휘젓자 누더기가 된 곰 인형 하나가 나타나 터덜터덜 걸어왔다. 악령이 깃든 무시무시한 인형을 손짓만으로 부릴 수 있는 그녀는 쪽지 한 장을 곰 인형에게 건네주었다.
“오라버니가 눈을 떴다고 다른 형제들에게도 전달할게요.”
“아니, 필요 없어.”
잠시 고민하던 그는 결국 무거운 몸을 일으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옷걸이에 걸어 놓은 옷을 대충 걸치며 어리둥절한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는 그녀에게 말했다.
“일단 녀석에게 간다. 위대하신 아버지를 위해서라면 녀석도 우리의 협력이 필요할 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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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헬-파이어는 등에 촉수를 단 채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괴인을 힐끔 보고 고개를 까딱거렸다. 괴인의 발아래에서부터 헬파이어가 피어올라 단단한 육체뿐만 아니라 영혼까지 태워 버릴 듯 무시무시한 속도로 번졌다.
무엇이든 순식간에 잿더미로 만드는 무시무시한 위력, 불타는 고통이 끔찍하다는 헬파이어였다. 그런데도 괴인은 고통에 아무렇지도 않은 듯 피눈물을 흘리며 레헬에게 다가왔다.
레헬이 결국 위로 훌쩍 떠오르게 만들 정도로 괴인은 발광을 멈추지 않았다.
괴인이 움직일 때마다 일반 성인 남성의 허벅지 두께만큼 두꺼운 촉수가 사방으로 휘둘러졌다. 자동차는 찌그러지고 콘크리트 바닥이 움푹 파였다. 당연하게도 촉수에 닿는 건물은 종이처럼 무너졌다.
“그륵, 다크 카오스님… 다크 카오스님께, 영광을, 새로운 신세계를… 크륵.”
사실 고통을 느끼지 못한 게 아니라 강력한 의지로 버티는 듯했다. 이윽고 거대한 고통에 몸부림치는 괴인의 육체를 마지막까지 완벽하게 불태운 레헬이 고개를 들었다.
그의 헬파이어 능력은 평범한 사람이나 능력자들에게 사용한다면 단 2초 만에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만들 수 있었다.
그런데 이 괴물들은 몇십 초까지 버티고 주변을 초토화할 만큼 발광하기까지 했다. 내구력이 어마어마하다는 소리였다.
레헬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주위를 살폈다. 괴인과 빌런이 겁도 없이 그의 주변으로 슬금슬금 몰려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차이를 가늠할 수 없는 거대한 힘을 마주했을 때 인간은 공포와 경외심을 느끼고 뒤로 숨기 바쁘다고 했다.
하지만 놈들은 오히려 푸른 안광을 번뜩이며 레헬에게 물러서지 않고 덤벼들었다. 마치 모닥불 속으로 뛰어드는 불나방 같은 모습이었다.
‘그냥 이 일대를 태워 버릴까.’
피난민이든 테러에 휘말린 불쌍한 시민들이든 솔직히 자신이 알 바가 아니었다. 귀찮은 날파리 몇 마리 손쉽게 구워 버릴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귀찮게 하나하나 상대해야 하는지 고민이 들었다.
슬슬 치밀어 오르는 짜증을 이기지 못한 레헬이 히어로답지 않은 험악한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려던 때, 그의 앞에 환한 빛이 터졌다.
“꽤나 귀찮은 모양이야, 레드-헬-파이어.”
찬란한 빛으로 사특한 자들의 눈을 멀게 한 타락한 추기경이 피눈물을 쏟으며 지팡이를 휘둘렀다. 성자의 손짓에 망령이 된 성기사가 백금색의 검을 휘둘러 삿된 자를 따르는 괴인들을 하나둘씩 베어 넘겼다.
망령의 손속에는 자비심 따위 없어서 목이 잘려도 꿈틀거리며 일어나는 괴인들의 육체를 무자비하게 다져 놓았다.
타락한 추기경이 이 일대를 정리하는 동안 붕대를 칭칭 감은 엔레이드맨이 모습을 드러냈다. 손 위에 있던 헬파이어를 거두며 레드-헬-파이어가 창백한 얼굴을 한 그에게 말을 걸었다.
“재언 씨는?”
“그 일에 대해서 얘기하고 싶은 게 있다. 조용히 이쪽으로 자리를 옮기지.”
엔레이드맨이 고갯짓으로 허공에 나타난 문을 가리켰다. 체어맨이 문을 열자 여기저기 불타고 무너진 도시 풍경과는 어울리지 않은 안락한 방 안이 보였다.
그에 레헬이 고개를 끄덕이고 천천히 걸음을 옮겨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완전히 방 안으로 들어간 것까지 확인한 엔레이드맨은 타락한 추기경에게도 고갯짓한 뒤 문을 넘어갔다.
“돌아오세요. 바실리오.”
타락한 추기경이 성기사를 불러들여 자신의 그림자 속으로 가둔 뒤 문을 넘어가기 직전, 뒤를 돌아봤다. 피눈물을 흘리는 얼굴로 한참 동안 뒤쪽을 살피던 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의 새하얀 옷자락이 모습을 감추고 문이 사라진 후, 그곳으로 한 소년이 날아와 착지했다. 소년은 고개를 들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자신이 찾던 기척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것을 확인하고 다른 곳으로 미련 없이 걸음을 옮겼다.
어린 소년의 그림자에 타락한 악마의 그림자가 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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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헬-파이어는 히어로다.
그의 사고방식이 아무리 히어로에 적합하지 않다 해도 그는 히어로였다. 지금 같은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사람들을 지키고 악인을 물리쳐야 마땅했다.
그런데 레헬은 지금, 빌런들과 마주 보고 느긋하게 다리를 꼰 채 앉아 있을 뿐이었다. 그가 나서기만 하면 분명히 많은 이를 살릴 수 있음에도 말이다.
그는 도움이 필요한 시민들의 절규를 똑똑히 들었을 텐데도 딱히 움직이려는 생각이 없었다. 되레 능청스러운 말투로 빌런들에게 말을 걸기까지 했다.
“꼴이 말이 아니네. 마더에게 당한 게 어지간히 충격이 컸나 봐? 덕분에 재언 씨가 이쪽으론 시선도 안 돌렸어.”
“…마더에게 당한 게 왜 충격인지 모르겠군. 중요한 건 아버지께서 마약왕에게 납치당해 행방불명된 일이다.”
형제들은 엔레이드맨의 말에서 위화감을 느꼈지만, 그보다 더욱 중요한 일이 있었기에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고 고개만 열심히 끄덕였다.
다른 누구도 아닌 위대하신 아버지의 일을 히어로 따위에게 부탁하는 처지가 꼴사납다고 생각하면서도 그깟 자존심은 그들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물론 마약왕이 아버지께 해를 끼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신재언의 신변에 이상이 생기거나 조금이라도 상처를 입힌다면 다른 자식들과 마찬가지로 차라리 스스로 목숨을 끊을 놈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럼에도 지금의 마약왕은 위험하고 제정신이 아니었기에 하루라도 빨리 신재언을 찾아야만 했다.
“최대한 협력할 테니 아버지를 찾는데 힘을 보태라. 레드-헬-파이어.”
“흐음.”
세계 최강의 히어로와 악명 높은 거대 빌런 여덟 명. 결코, 섞이지 못할 것 같아 보이는 그들은 이미 손을 잡은 전적이 있었다.
그때와는 무게감이 전혀 다르지만 말이다.
“아버지를 무사히 데려올 때까지 손을 잡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