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근하는 빌런-295화 (295/324)

295화

원한의 원수는 마약왕 베네딕트 알례리였지만, 그의 목숨을 구해 주고 지금의 권위를 준 사람은 엔레이드맨 큰형님이었다. 엔레이드맨은 겉모습은 어리지만 무자비하고 잔인한 사람이었다.

“큰형님,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처음 엔레이드맨이 눈을 떴을 때 원한은 자부심 가득한 표정으로 엔레이드맨을 찾았다.

사실 엔레이드맨이 원한을 살려 줬지만, 그가 신재언의 선택을 받을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자신도 그렇게 생각했었기에 이용가치가 좋은 장난감이라도 되고자 했다.

그러나 원한은 당당히 인정받았고, 그들의 형제로 위대하신 분에게 선택받았다.

하지만 원한은 아직까지 각성한 자신의 능력을 파악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태연할 수 있었던 것은, 엔레이드맨과 다른 형제들에게 느끼는 터질 것 같은 애정이었다.

처음 보는 이들에게서 느껴지는 넘치는 듯한 애정과 아버지에 대한 목마른 신앙심은 그가 전처럼 평범하게 살 수 없다는 증거였다. 또한 그가 다크 카오스의 자식이 됐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엔레이드맨은 형제들과 얘기를 나누다가 원한을 보고 고개를 돌렸다.

“네가 정말 아버지의 선택을 받을 줄 몰랐다. 잘했어.”

엔레이드맨의 말에 뿌듯함을 느꼈던 것도 잠시, 원한은 눈앞에 벌어지는 광경에 충격을 받아 입을 벌렸다.

그의 앞에 느긋하게 앉아 있는 히어로의 모습에 도저히 상황을 파악하기 힘들었다. 거대 빌런이라 불리는 다크 카오스의 자식들을 앞에 두고도 히어로가 공포에 질리긴 커녕 느긋하게 그들을 힐끔 쳐다보기까지 했다.

‘…왜… 왜, 이 자와…….’

처음으로 눈앞에서 본 자는 눈이 돌아갈 정도로 아름다운 미인이었다. 눈꼬리가 내려가 순한 눈매에 어울리지 않게 시선은 매우 서늘했다.

눈, 코, 입의 조화가 아름다워 매우 준수했다. 풍채도 좋고 동작 하나하나에는 강자의 여유가 쌓여 있었다.

S급 히어로면서 모델까지 겸직하고 있어 얼굴이 잘 알려져 빌런들의 주 표적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오히려 그 얼굴을 알아보고 도망가는 빌런들이 훨씬 많은 남자, 세계 최강의 히어로 레드-헬-파이어였다.

엔레이드맨은 다크 카오스의 행방과 안위를 위해 그 세계 최강의 히어로에게 손을 잡자고 얘기했다.

대체 왜? 히어로와? 세계 최강의 히어로와?

원한이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고 어버버 거리며 옆에 있던 체어맨에게 물었다.

“…체어맨 형님. 왜 레드-헬-파이어에게……. 저자는 히어로 아닙니까? 그것도…….”

엔레이드맨 큰형님과 사이가 매우 안 좋은…….

원한이 황당함을 이기지 못하고 묻자 체어맨은 막내에게 부드러운 형처럼 차근차근 설명해 줬다.

“레드-헬-파이어는 위대하신 아버지의 연인이기 때문이란다.”

“…네?”

“저놈은 성가시기 짝이 없는 히어로 놈이지만- 아버지를 위해 손을 잡는 것도 나쁘지 않은 생각이지.”

원한은 그들에게 되묻지 않았다. 어떤 말도 안 되는 얘기에도 납득하며 순종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도저히 체어맨의 얘기를 이해하지 못했다.

‘파수꾼’이라 불리는 엔레이드맨이 마더의 친자식이며 그것 때문에 크게 부상을 당한 것도 상당히 충격이었다. 그런데 지금 받은 충격은 그때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누가 누구의 연인이라고요? 위대하신 아버지와… 누가?”

“눈앞에 있는 레드-헬-파이어 말이다.”

어……?

그게 맞나?? 세계 최강 히어로라고 불리는 레드-헬-파이어와 빌런들의 왕 다크 카오스가… 연인이라고?

이 자리에서 오로지 원한만 이해하지 못하고 눈만 끔뻑거렸다.

@

사로잡힌 공주, 아니 다크 카오스를 구하기 위한 파티가 급하게 짜였다.

급하게 짜인 것 치곤 하나하나가 거물이었지만 그걸 일일이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아니 신경 쓰는 사람은 한 사람 있긴 했지만, 겉으로 드러내진 않았다.

코루루는 자신이 봤던 것들을 가감 없이 레헬에게 알려 줬다. 본디 레드-헬-파이어는 껄그러운 놈이었지만 얼결에 몇 번 손발을 맞췄다고 처음처럼 마냥 어색하진 않았다.

마약왕이 조금만 제정신이었어도 히어로와 자발적으로 손을 잡는 일 따윈 없었을 텐데 통탄스러웠다.

“마음에 걸리는 건 머리 두 개 달린 놈들의 말이에요. 그놈들은 절 자세히 알고 있었어요. 그러니까, 그냥 세상에 알려진 것 외에 더 자세하게요. 그리고 이런 말을 했어요. 무대를 준비하지 못하는 형제들을 대신할 광대들이라고……. 무대 위에서 제 대신할 역할이라고요.”

“…마약왕놈. 재미있는 짓을 꾸몄구나.”

엔레이드맨은 헛웃음을 지으면서 이를 갈았다. 그놈이 무슨 짓을 하건 엔레이드맨은 하등 신경 쓸 필요조차 없었지만, 거기에 위대하신 아버지께서 끼게 되면 얘기는 달라졌다.

마약왕은 넘어선 안 될 선을 넘었고, 신재언은 납치당했다.

엔레이드맨은 레헬에게 물었다.

“히어로 협회에선 어떻게 대응하고 있지?”

레헬은 느긋하게 핸드폰을 확인했다.

뭔 일만 생기면 득달같이 레헬을 찾아 대던 놈들이 유난히 조용했다. 되레 다른 나라 히어로 협회에서 레헬에게 무수히 많은 연락을 시도하고 있었다.

재앙급의 테러들이 여기저기 전 세계에서 터지고 있을 때 히어로들을 소집할 협회가 조용하니 S급 히어로들도 서로 뭉치지 않고 개인적인 구조활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협회도 찝찝하고, 당장 마약왕이 작정하고 숨은 곳을 찾을 수도 없으니 방법은 하나였다.

“일단, 한 놈씩 잡아서 고문하다 보면 한 명쯤은 입을 열겠지.”

“쉽지 않을 겁니다. 이미 마약왕에게 수작질을 당한 모양인지라, 어지간한 고통에도 내성이 생긴 모양이더군요.”

“이미 내장부터 녹기 시작한 괴인을 잡는 게 아니라, 놈들을 조종하는 빌런을 잡으면 그만이지.”

“피부를 벗기고 그 위로 쇳물을 부어 보도록 하죠. 아아- 조금만 더 시간이 여유로웠다면 이 체어맨이… 아주 천천히 즐겨 줬을 텐데요. 살이 벌레에 파 먹히는 고통을 그놈들이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군요.”

성자 에렌 성이 말했다.

“사특한 자들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그의 머리 위로 동그란 후광이 비췄다. 성스러운 모습으로 피눈물을 흘리는 타락한 추기경은 어린양을 위해 기도하는 고고한 성자처럼 보였으나, 그 내막은 사기(邪氣)로 가득 차 있었다.

어두운 골목길, 괴인들의 시체가 산처럼 쌓이기 시작했다. 하나같이 생김새가 똑같았다. 푸른 피부에 눈, 코, 입이 뭉개졌고, 덩치는 거대해 2m가 넘었다. 등에는 촉수들이 자라 모습이 매우 징그러웠다.

피부는 강철처럼 두꺼워 상처를 내기 쉽지 않았고 이성을 잃은 괴물처럼 대화가 통하지 않았다. 그들이 하는 말이라곤 오로지 다크 카오스의 찬양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들을 상대하며 약간의 정보가 쌓였다. 괴인들은 이성이 없고 빌런들의 조종을 받고 있으며, 목을 베어도 죽지 않는다.

피부가 단단해 능력이 통하지 않았으며 괴인 자체는 능력자가 아니었다. 따라서 능력을 무효화시켜 주는 아이템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전 세계적으로 동시다발적인 테러가 일어났고, 대부분 1차 방어에 성공했다. 하지만 죽은 괴인들의 수보다 피해자 수가 훨씬 더 많았다.

다시 2차 공세가 이어지면 더 많은 사상자와 피해를 피할 수 없을 터, 전 세계적으로 뉴스가 보도되고 S급 히어로를 비롯해 A급 히어로들까지 강제 소집되었다.

여기까진 뭐 일반인들에게 알려진 정보일 뿐이고 내막을 들여다보면 난장판이었다. 일단 히어로 협회 본사인 대한민국 협회가 침묵하고 있을뿐더러 유럽의 협회장은 자취를 감췄다.

남은 자들은 다크 카오스와 협상을 요구했으나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다. 첫 공격을 막아 내는 데 성공했다 뿐이지 대부분의 괴인과 빌런들은 하수구 깊은 곳으로 몸을 숨겨, 밤이 되면 민가를 습격했다.

그런 상황에서 S급 히어로들 마저 죽어 나가자 각국에선 되려 S급 히어로를 보호하기 시작하는 아이러니 한 일까지 발생했다.

당연히 많은 기업이 문을 닫고, 사람들은 대피소로 몸을 숨겼다. 부자들은 방공호에 박혀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러니 레헬과 남은 자식들이 움직이기 아주 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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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혼란에 빠트린 다크 카오스 본인은 지금 제법 호화로운 방에서, 노트북을 들고 앓는 듯한 신음소리를 흘렸다.

마약왕은 신재언의 명령에 불복할 수 없다. 그러니 신재언에게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부하들을 시켜 편의를 챙겼다.

자식들과 부모님, 애인 다음으로 중요한 회사 지침이라도 보지 않으면 내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렇게 회사 홈페이지까지 접속하는 데 겨우 성공한 신재언은 슬그머니 눈치를 보며 바깥으로 연락을 취하려고 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하긴 마약왕의 능력을 생각하면 이런 수작이 통할 리 없었다.

일단 무급 휴가 신청서만이라도 내자고 생각했던 신재언은 홈페이지에 대문짝만 하게 실려 있는 공지를 읽으면서 눈가를 파르르 떨었다.

[빌런들의 테러에 출근이 불가능하니 ‘재택근무’]

빌런에게 피해를 입은 경우는 3일 유급 휴가, 그 외에는 연차 사용까지 하고도 출근이 이뤄지지 않을 시 결근 처리다.

“진짜 세상이 멸망해도 일단 출근부터 하라고 할 것 같네. 이 정도면 대한민국이 문제인 거야 이 기업들이 문제인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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