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근하는 빌런-296화 (296/324)

296화

재언이 크게 한숨을 쉬며 노트북을 닫았다. 자식이었던 빌런에게 납치 감금당한 것도 빌런에게 피해를 입은 범위에 끼워 주는지 모르겠다.

이 정도 결근은 귀엽게 봐줄 만한 수준이 되어 버린 혼란스러운 상황이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어쨌든 업무가 가능한 사원들로 회사를 굴리겠다고 대놓고 말하는 한국화된 기업은 조금 무서웠지만 말이다.

노트북을 닫자마자 대체 어디서 들어온 건지 책상 위로 파란색의 촉수가 슬그머니 기어 올라왔다.

‘너무 황송하지만… 잠시만 실례하겠습니다. 앗, 저는 신경 쓰지 마세요. 저는 그냥 지나가는 촉수일 뿐입니다. 제게 신경 쓰지 말아 주세요. 제발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는데 촉수의 중얼거림이 귓가에 생생히 들리는 듯했다.

징그럽게 생긴 촉수에게서 왜 그런 느낌을 받는지 영문을 모르겠다. 재언의 눈빛과는 상관없이 촉수는 소심한 움직임으로 노트북을 감싸 안더니 쫄쫄거리며 문을 향해 기어갔다.

“…….”

재언은 황당함에 말도 안 나와 눈가만 파르르 떨며 촉수가 움직이는 방향대로 시선을 옮겼다. 자신 외에 아무도 없는 넓은 방이 문득 눈에 들어왔다.

호화롭다.

TV 프로그램에서 본 적이 있는, 하룻밤에 몇 천만 원이나 한다는 고가의 호텔만큼이나 호화로웠다. 인터넷은 물론 세상과 연락할 수 있는 수단이 모두 차단되었을 뿐 방 안에는 즐길 거리로 가득했다.

재언이 평소에 즐겨 보는 영화는 물론, 그의 취향을 도대체 어떻게 잘 아는지 그동안 보거나 읽고 싶어 했던 영화와 소설책들이 빽빽하게 한쪽 벽면을 차지하고 있었다.

언제부터 이 넓은 방에 자신을 감금시킬 계획을 짜고 있었던 것일까. 이 정도면 어느 소설에 나오는 집착 주인공 뺨을 쳐도 모자랄 것이다.

그러면서도 알례리는 재언의 앞에 얼굴을 한 번도 내비치지 않았다. 눈앞에 있으면 무슨 명령이라도 내리든지 할 텐데.

머리가 상당히 좋은 편인 알례리가 그것도 예상하지 않았을 리 없었다. 그러니 웬만한 상황이 아니고서야 재언의 앞에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하아…….”

재언이 낮게 한숨을 쉬었다. 처음에 이곳으로 납치되었을 때 허를 찌르는 알례리의 대범한 행동에 얼떨떨해져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알례리가 아무리 망가졌다 해도 자신의 말을 거역하지 않을 거라는 자만이 방심으로 이어졌다. 아마 다른 자식들도 마찬가지로 방심하다가 알례리를 놓쳤을 터.

게다가 이런 큰 사고까지 칠 줄이야.

“아… 갑자기 위장이 아프네.”

알례리가 벌여 놓았을 사건을 짐작하기만 해도 명치 쪽이 욱신거렸다. 한마디로 화병에 걸렸다는 소리였다.

세계를 혼란에 빠트렸다는 악명으로 자자한 위대하신 다크 카오스는 사고만 치고 다니는 불효자 때문에 화병을 얻어 드러눕게 생겼다. 이 세상에 자식만큼 속 썩이는 일도 없다더니 딱 그 꼴이었다.

‘물론 내가 직접 낳은 것도 아니지만.’

아무튼 피가 이어지지 않고 자신보다 나이까지 많은 자식 때문에 위장에 구멍이 날 것만 같았다.

재언은 고급스러운 소파에 앉아 주름진 미간을 꾹꾹 눌렀다. 안 그래도 나이 앞자리에 3이란 숫자가 붙기 시작하면서 이마에 주름이 잡힐까 봐 신경 썼다. 가급적 눈살 찌푸리는 짓을 최대한 자제하려 노력했건만 따지고 보면 멀쩡하게 펴고 다닌 날이 더 적었다.

“…후.”

그리고 알례리가 한 가지 잘못 생각한 게 있었다. 신재언을 정말 지루하지 않게 해 주려면 고상한 책이나 영화들이 아니라 운동기구들로 놓아 주었어야 했다는 점이다.

그게 비록 이 호화로운 방과는 어울리지 않는 칙칙한 기구들이라 해도 말이다.

이대로는 몸이 찌뿌둥해서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순 없겠다고 생각한 재언이 방문을 열었다. 예상대로 문 앞에는 ‘눈먼 고결한 화랑’이 서서 재언을 쭉 감시하는 중이었다.

말로는 모신다고 하면서 감금이나 다름없었다.

‘눈먼 고결한 화랑’은 알례리에게 붙은 한국의 히어로였다. 능력은 A급이며 1년 전 모습을 감췄던 그가 세상 앞에 나타났을 땐 이미 몰락해 있던 상태였다.

능력은 히어로였을 때보다 강해져 있었는데, 재언은 그의 몰락에 마약왕이 존재했으리라 확신했다.

“…‘위대하신 분’이여. 필요한 게 있으시면 제게 말씀해 주십시오. 제 능력과 권한이 닿는 한 무슨 말이든 당신을 따를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가 두 손을 배꼽 위로 포개며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그의 등에 붙어 있는 기다란 검이 눈에 띄었다. 그가 가지고 다니는 검, 월영도는 ‘의지의 검’이라는 이름 그대로 검 자체가 의지를 가지고 눈이 멀어 있는 주인을 대신하여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따라서 허리춤이 아닌 주인의 등에 ‘자기 의지’로 떠 있는 것이다. 재언은 저 검이 지금은 얼마나 날카로워졌을지만 생각하면 벌써 머리가 아팠다.

“마약왕을 불러 주시겠어요?”

“…‘위대하신 분’이여. 제게는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위대하신 분의 말씀을 따르는 것은 제가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제 상관의 명령에 불응하여 이곳에 데려오는 것은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개소리 같은데, 또 묘하게 설득이 되네.’

직장인의 애환이다. 상급자를 함부로 오라 가라 할 수 없는 부하직원의 마음을 이해하는 자신의 처지가 더욱 슬퍼졌다.

이걸로 몇 번째인지 모를 마약왕 소환 시도가 무산되고 다시 방 안으로 들어가려던 재언은 문득 눈을 감고 있는 눈먼 고결한 화랑을 쳐다보았다. 마약왕이 이 남자에게는 무슨 수작질을 부렸을까 궁금해졌다.

“마약왕이 당신의 욕망을 채워 주었습니까? A급 히어로였던 눈먼 고결한 화랑. 당신이 가진 욕망은 무엇이죠?”

그러자 그가 눈을 감은 채 곧바로 대답했다.

“저를 미혹하려 하셔도 소용없습니다. 눈이 멀었기 때문에 당신의 눈을 쳐다볼 수 없어 마음의 허점이 드러날 일도 없습니다.”

“…….”

어이가 없었다. 누가 누굴 미혹하려고 한다는지 모르겠다. 일단 이놈도 말이 통하지 않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하긴, 알례리 녀석도 말이 안 통하는데 그 부하들은 오죽할까.

재언은 일단 한걸음 물러서기로 했다. 여기서 더 대치하고 있어 봤자 좋을 게 없었다.

‘…지금이야 뭐 갑자기 뒤통수 때린 걸로 선공에 성공했다 쳐. 그다음은? 전 세계 S급 히어로들이 연합하면 그다음은 어떻게 하려고? 마약왕에게 레드-헬-파이어를 상대할 계책이 있긴 한 건가?’

작은 탁자 위에 올려놓았던 담배를 손에 들고 한 개비 입에 물었다. 창문 밖에서 보이는 하늘은 온통 붉었고 눈동자가 달린 붉은 달이 선명하게 떠 있었다.

이전에 ‘어머니교’의 교단에서 본 것과 똑같았다. 그 뜻은 마약왕과 어머니교의 교주가 손을 잡았다는 소리였다.

창문 밖으로 도망쳐 봤자 상위급 결계 능력자인 엔레이드맨도 없으니 다시 잡혀 들어올 게 뻔했기에 도망칠 방법이 없었다.

“세상에는 계책으로도 잡을 수 없는 무지막지한 힘이 있지. 알례리, 레드-헬-파이어는 네가 100가지 계획을 세우면 그 100번을 모두 힘으로 찍어 누를 수 있는 능력자야. 내 애인이라서 과대평가하는 게 아니고……. 내가 왜 그를 계속 피해 다녔는지 너도 이제 곧 알게 될 거다.”

재언이 담배에 불을 붙이며 창문을 열었다.

‘…근데 진짜 만약에 히어로들이 다 멍청한 놈들만 모여 있는 거라면… 그럴 리 없겠지?’

-우…….

-우우…….

-우우우…….

-다크 카오스님… 우우…….

밖에서 무언가가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하나같이 광기로 물든 목소리였다.

지금 상황에서 힘없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뾰족한 방법도 없었으니 이 불쌍한 시민을 누군가가 구해 주길 바라고 있어야겠다.

절대로 밖에 돌아다니는 괴인들이 무서워서 못 움직이는 게 아니었다.

재언은 붉은 하늘을 바라보며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대고 중얼거렸다.

“…그리고 운동기구 좀 놔 줘.”

며칠 동안 제대로 된 운동을 못 했더니 복근이 줄어드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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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 히이이익!”

눈앞에 거대한 사마귀가 나타났다. 그것은 울창한 빌딩 숲에서도 확연히 보일 만큼 커다랗고 사람 머리 정도는 한 번에 부숴 버릴 정도로 무시무시한 집게를 가지고 있었다.

“히이익!”

비명을 지른 남자가 눈물 콧물 잔뜩 빼 가며 도망쳐도 결국 그는 지옥에서 벗어나가지 못했다. 이윽고 거대한 사마귀가 날카로운 집게를 들어 남자의 몸을 두 동강 내고 머리를 아작아작 씹어먹었다.

그 광경을 구경하던 어린 소년이 손바닥에 놓여 있는 돔 형태의 반투명한 도형을 털어 없애며 바닥에 내려왔다.

그러자 사마귀가 순식간에 사라지고 흉측하게 난자당한 남자의 시신은 상처 하나 없이 깨끗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다만 그의 영혼은 이미 죽은 줄 알고 몸에서 빠져나가 더 이상 돌아오지 못할 뿐이었다.

“이런 피라미들만 잡아 봤자 건질 것이 없어. 더 위에 있는 놈들을 잡아 족쳐야 해.”

엔레이드맨이 중얼거리며 바닥에 널브러진 남자의 어깨를 발로 밀었다. 시신이 힘없이 옆으로 돌아갔다.

죽은 이는 알례리가 부리는 수족 중 한 명이었지만, 잡고 보니 건질 게 하나도 없는 놈이었다. 그가 다시 한번 더 자신의 실책을 반성하며 한숨을 쉬었다.

“야. 레드-헬-파이어. 듣고 있어?”

담배를 입에 물고 있던 레헬이 그의 말에 핸드폰을 든 채 성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향하는 목표가 같아서 같이 움직이고 있지만, 레헬이 가진 정보가 은근히 적어서 다들 실망하던 참이었다.

대한민국 히어로 협회가 지금까지도 침묵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흐음…….”

레헬이 예쁘장한 얼굴을 쓰다듬으며 숨을 내쉬었다. 자신의 히어로명을 극도로 혐오하는 그의 반응치고는 영 이상했던 터라 엔레이드맨은 그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엔레이드맨은 위대하신 아버지, 신재언을 위해서라면 적의 발을 핥는 것쯤은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지만 가급적 그의 곁에 가까이 다가가기를 꺼려 했다.

하지만 레드-헬-파이어가 보고 있는 것이 무언가 중요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스스럼없이 다가갔다.

그는 레헬의 손에 목이 잡힐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레헬이 보던 핸드폰 화면을 훔쳐보았다. 곧이어 엔레이드맨은 황당함에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히어로 협회란 놈들은 다 멍청이밖에 없나 본대?”

히어로의 면전에서 히어로 협회를 신랄하게 욕하는 엔레이드맨의 모습에도 레헬은 오랜만에 이 찌질이와 마음이 맞았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이제 곧, 드디어 곧 이룰 수 있을 텐데 엉뚱한 놈이 채가면 재미없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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