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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근하는 빌런-297화 (297/324)

297화

레헬은 자신의 앞을 막는 자들을 모조리 죽여 버릴 수 있을 만큼 힘이 강하고 세상을 파괴하는 것에는 능숙하지만 누군가를 지키고 찾는 일에는 영 재능이 없었다.

레헬의 청순하고 순한 눈매에 감추어진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가 원래대로 다시 돌아왔다.

“…지금 당장 마약왕이 공격을 개시할지도 모르는데 자기들끼리 영역 다툼이나 하고 있다니. 정말 우습군. 히어로란 놈들은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돈이나 밝히고, 대한민국 히어로 협회는 방관하고. 세상에서 가장 멍청한 놈들이 협회의 대가리를 맡는 모양이야?”

엔레이드맨이 한껏 비웃는 표정으로 팔짱을 낀 채 다리를 꼬고 앉았다. 의자는커녕 주변에 앉을 곳도 없었지만,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허공에 둥둥 떠 있으면서도 충분히 편안한 자세가 가능했다.

빌런인 그는 마약왕이 보낸 빌런과 괴인으로부터 일반 시민들을 구할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마약왕의 의중을 파악하고 위대하신 아버지의 소재를 아는 게 그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아버지를 찾으려다 얼떨결에 히어로 레드-헬-파이어와 1차 테러를 막아 낸 자신들에 비해 멍청한 전 세계 히어로 협회 놈들은 서로 협력할 의지가 조금도 없어 보였다.

히어로 협회 본사가 있는 대한민국에서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질 않기 때문인지 다른 나라도 움직이지 않았다. 오히려 피해가 극심한 다른 나라에서 아무리 타국에 SOS를 보내도 모두가 S급 히어로를 숨기는 데 급급할 뿐 아무도 나설 생각이 없는 듯했다.

레헬이 나서기만 하면 움직일지도 모르긴 하지만 그는 세상을 구할 의지가 전혀 없어 보였다.

긴장감이 흐르는 두 사람의 옆으로 무언가가 데굴데굴 굴러왔다. 푸른색 피부를 가진 괴인의 머리가 그들의 발치에까지 이르렀다.

성기사와 함께 다가온 타락한 추기경이 피눈물을 흘리며 죽은 자들을 위한 기도를 올렸다.

“아아, 지옥 속에서 억겁의 고통을 받는 가련하고 불쌍한 어린양들이여. 이제는 길을 잃지 말고 편해지시기를…….”

언뜻 들으면 성실한 교인처럼 생각할 만큼 기도문을 읊고 있는 타락한 추기경의 뒤로 체어맨과 코루루를 비롯한 나머지 자식들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냈다.

“엔레이드맨 오빠. 이런 잔챙이들은 아무것도 몰라요. 얼리고 녹이고 고문을 해 봤지만 도통 입을 열 생각이 없어요. 이성이 없는 것 같아요.”

코루루가 날카롭고 신경질적으로 말하며 분풀이로 발아래 놓인 괴인의 머리를 발로 찼다. 그녀는 기본적으로 신재언의 앞에선 애교가 많고 형제들에게 사근사근한 편이지만, 조금만 힘든 일이 있어도 패악을 부리거나 짜증을 내곤 했다.

“자, 어여쁜 우리 귀여운 동생. 더 화를 내 봤자 좋을 게 없습니다.”

체어맨이 코루루의 어깨를 쓰다듬으며 그녀를 뒤로 물렸다. 그가 우아하게 양손을 포개며 이어 말했다.

“엔레이드맨 형님. 제 생각도 마찬가지랍니다. 이 체어맨의 고문에도 녀석들은 입을 열지 않더군요. 괴인들 모두 이성이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같이 잡힌 빌런들은 전율이 일 정도로 비명을 질러 주긴 했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빈껍데기들뿐.”

체어맨의 반투명한 면사포 뒤에 가려진 얼굴이 더욱 흉측하게 일그러졌다. 그의 표정은 마치 온 힘을 다해 모셔왔던 신(神)을 잃어버린 자의 표정이었다.

형제들을 가장 알뜰하게 살피며 늘 정중하고 신사 같은 이였지만 이 상황을 버티기 힘들어하는 건 그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이 이상으로는 시간 낭비입니다. 다른 형제들도 점점 예민해지고 있습니다, 형님. 이제 결단을 내리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의 뒤에 선 다크 카오스의 자식들은 서슬 퍼런 안광을 번뜩이고 있었다. 그들은 중심을 잃고 이성이 무너진 괴물이 되기 직전이었다.

그 모습에 엔레이드맨이 팔짱을 끼고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약왕에게 신재언을 빼앗긴 지 일주일이 훌쩍 넘어가고 있었다. 형제들의 인내심이 거의 바닥에 이르렀을 터, 더 이상 질질 끌어 봤자 이쪽의 사기만 떨어진다.

“마약왕 또한 귀여운 동생이긴 했지만, 이번엔 선을 넘었습니다. 형제의 피부를 벗겨 내는 일은 정말 마음이 아프겠지요.”

체어맨이 가슴에 손을 올리며 침통하게 중얼거렸다.

“…마약왕 형… 님…….”

가장 뒤쪽에서 형제들의 대화를 듣던 버드맨이 마약왕을 떠올리며 날개로 입을 막았다. 금방이라도 토기가 올라올 것만 같았다.

그가 기억하는 마약왕은 언제나 친절한 가족이었다. 그는 버드맨이 당한 일에 진심으로 분노해 주었다. 늘 자신을 챙겨 주었고 아들인 지오반니와 친구가 되어 달라고 하며 진정한 형제로서 대했다.

하지만 이번에 다시 만났던 마약왕은 버드맨을 한낱 장기 말처럼 생각하는 서늘한 눈빛을 보내 왔다.

‘착각이었겠지……. 하지만… 마약왕 형님이… 아버지를 데려갔어. 그건, 아무리… 형님이라도 용서할 수 없어. 나도 다른 형제들처럼, 얼른 말해야 해. 마약왕 형님을 같이 죽여 버리겠다고… 말해야 해……!’

날카로운 분위기의 형과 누나들을 보며 버드맨이 입을 달싹였다.

‘얼른, 나도… 나도 따라가야 해. 아니면 버림받아. 아니면, 내 존재가치를… 인정받지 못해……! 또 버림받긴 싫어. 또… 또 혼자 남겨지긴 싫어.’

날개깃을 잘근잘근 씹는 버드맨의 낯빛이 점점 더 하얗게 질려갔다.

“내가 널 구해 줄게.”

‘구해 줘. 제발… 도대체 언제!?’

혼자서는 빠져나갈 수 없는 늪 안으로 육체가 계속해서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그 순간, 빨려 들어갈 것 같았던 머릿속이 갑자기 청량해지더니 방금까지 느꼈던 극도의 불안감이 안개가 걷히듯 서서히 사라졌다.

버드맨이 고개를 들어 올리자 그의 정수리 위에서 어정쩡하게 손을 들고 있는 원한과 눈이 마주쳤다.

원한은 원래 나이보다 더 들어 보이도록 머리를 위로 올리고 안경을 써 왔는데, 오늘은 머리를 내리고 안경을 벗은 채였다. 이렇게 보니 버드맨과 나이가 비슷한 또래 같았다.

“…어.”

“…….”

갑작스럽게 버드맨과 눈이 마주친 원한이 티 나지 않게 작은 한숨을 쉬었다.

원한이 듣기로 버드맨은 지금 ‘파도치는 절벽 위 별장’에서 벗어나 형제들과 함께 움직이는 것이 아주 오랜만이라고 했다. 업적을 이루는 일에 함께하게 되었으니 목적을 이뤘다며 신나 해야 하는 게 맞았다.

그런데 오히려 그는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애꿎은 깃털만 잘근잘근 씹었다. 날개에 있는 깃털들이 엉망으로 뽑히고 상처가 나 조금씩 피가 흐를 정도였다.

그러나 신재언의 일로 정신이 없는 형제들은 버드맨의 상처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아니 오직 한 명, 원한만이 어딘가 불안해 보이는 버드맨을 힐끔 살폈다. 이전에 사라졌다고 생각했는데 기분 나쁜 검은 안개 같은 것이 다시 버드맨의 머리 위로 올라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새들은 우울증에 걸리면 깃털을 뽑는다던데, 딱 그 꼴이군.’

원한은 나름대로 냉정한 눈으로 버드맨의 상태를 파악했다. 부하들에게 조사해 오라고 시킨 덕분에 학살자 버드맨의 과거사를 대충이나마 알게 되었다.

학창 시절 또래 친구들에게 지독한 학교 폭력을 당했었다고 했다. 어느 정도로 괴롭힘을 받았는진 자세히 알려진 게 없지만, 버드맨을 가까이서 보니 상태가 매우 심각했다.

일단 뻗은 손을 움직여 버드맨의 머리 위로 올라오고 있는 검은색 안개를 없애 버린 뒤 무자비하게 뜯기고 있는 날개를 부드럽게 잡았다.

“!!!”

버드맨이 깜짝 놀라 몸을 움찔했다. 멀쩡하지 못한 자신의 날개와 원한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아… 난… 이건, 아니에요……. 전… 싸울 수 있어요.”

“압니다.”

원한이 단호하게 버드맨의 말을 끊었다.

“지금 당장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의 말은 일이 해결된 나중에는 말하겠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버드맨은 당장 눈앞의 것만 해결하자고 생각했는지 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히어로를 동경했던 버드맨은 볼프강이 되고 싶었다. 그 어그러진 욕망은 버드맨을 괴롭혔다.

하피로서 S급 히어로가 되어 많은 차별과 역경을 딛고 성공한 버드맨의 진정한 히어로.

버드맨의 깃털은 일반적인 하피의 깃털과는 달랐다. 강철보다 단단하고 날카롭게 변할 수 있는 버드맨의 능력 그 자체였다. 버드맨과 볼프강의 능력은 깃털을 강화하는 것.

극한의 상황에서 증오를 눌러 삼키면서도 따라가고 싶었던 볼프강, 그것이 바로 버드맨의 욕망이었다.

.

.

.

“그래서 어떻게 하죠?”

귀신들의 성녀가 저주받은 인형을 바닥에 내려놓으며 물었다. 인형 안에 갇힌 악령은 이 집 저 집 돌아다니며 산 사람들을 겁주다가 결국에는 살해하기까지 한 악독한 놈이었다.

물론 지금은 귀신들의 성녀에게 붙잡혀 심부름꾼 노릇이나 하고 다녔지만 말이다. 여기저기 바쁘게, 여덟 명의 형제들을 찾아다니며 움직이느라 발 쪽에는 솜이 터질 정도였다.

그런 인형의 스카프에 종이를 끼워 넣은 귀신들의 성녀는 얼른 출발하라는 듯 인형의 엉덩이를 발로 찼다.

허겁지겁 인형이 달려가는 것을 보며 귀신들의 성녀가 우울한 얼굴을 지었다.

“그 멍청한 괴인들을 고문해도 소용이 없었는데 어떻게 정보를 더 알아내요? 체어맨 오빠의 고문에도 눈 하나 깜박하지 않았던 놈들이에요.”

그녀의 말에도 충분히 일리가 있었지만, 레헬은 가볍게 대꾸했다.

“그 잔챙이들은 무시하고 그보다 더 위에 있는 놈들을 족쳐 버리면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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