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근하는 빌런-298화 (298/324)

298화

“그 위에?”

세계의 종말이 다가온 것처럼 빌런과 괴인들이 속출하는 바람에 서울의 강남 한복판은 개미 한 마리도 없이 썰렁했다. 이 일대의 주민들은 히어로 협회에서 준비한 대피소로 몸을 피한 상태였다.

“이대로 한 번에 끝낼 테러였으면 애초에 움직이지도 않았을 거야. 이번에 2차 공격을 시작한다면 그곳이 어디가 될까?”

레드-헬-파이어의 시선을 따라 여덟 명의 빌런들이 고개를 틀었다. 그들의 시선이 도착한 곳은 강남의 지하철이었다. 대피소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곳이었다.

“거기서 놈들을 지휘하는 녀석을 붙잡아다가 대화를 나눠 보면, 뭐 쓸모 있는 정보 하나쯤은 얻을 수 있겠지.”

코루루가 끼어들어 물었다.

“만약 쓸모 있는 정보가 하나도 없다면?”

“내가 가장 잘하는 게 뭔지 알아?”

사람 불태우는 거?

아니면 빌런들의 목숨을 가지고 노는 것?

“화기를 조종할 수 있는 거야. 극한의 고통을 느끼게 하면서도 죽이지 않을 자신이 있지. 이걸로 제법 많은 놈의 입을 열게 했거든. 있는 말 없는 말 전부 쥐어짜게 해 주면 돼. 무식하게 가죽을 벗기고 소금을 뿌리지 않아도 세상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경험을 줄 수 있으니까.”

‘저놈 히어로 맞아? 우리 중에서 가장 빌런 같은 놈인데?’

코루루가 질린 표정으로 한 걸음 물러났다. 지금이야 얼굴을 마주하고 서로 대등한 척 상의하고 있다지만 사실 적수로 만났을 땐 그가 얼마나 무시무시하고 잔인한지 알기에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게다가 코루루는 그에게 한번 덤벼든 적도 있어서 더욱 그랬다. 같은 편인 척 방심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온 힘을 담아냈던 공격은 단 한방으로 무너지고 크게 다치기까지 했다.

외상에 내상까지 입어 전부 엉망이었다. 코루루가 분한 마음에 씩씩거리고 있자 엔레이드맨이 그녀의 상처를 보며 화를 냈었다.

“이 정도로 끝난 걸 다행으로 알아라!”

그것도 죽을 만큼 힘들었는데 레헬이 봐준 거였다니 믿기 어려웠다. 그때 당시에 아버지인 신재언의 반응도 크게 다르지 않았기에 코루루는 속으로 끙하고 신음을 앓았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단 말이야. 아버지를 위해서 손을 잡고 있긴 한데, 애초에 이 남자가 그런 감정을 느낀다고? 처음 아버지의 곁에 있을 때부터 불길했어. 이번 일이 끝나면 다시 해 볼까?’

코루루가 한 걸음 더 물러났다. 인적 없는 거대한 도시에 코루루의 구두 굽 소리만이 따각 울렸다.

그녀는 턱을 쓰다듬으면서 생각을 이어 갔다. 그냥, 이 남자를 아버지의 곁에 두어선 안 된다고 직감이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마약왕에게 대응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 얍삽한 동생이 무슨 꿍꿍이를 펼쳐올지 모르는 지금, 그 모든 것을 압도할 힘이 필요했다.

마약왕이 무슨 짓을 꾸미든 여덟 명의 형제들만 있다면 세상 전부를 상대한다고 해도 겁날 것이 없지만, 지금은 목숨보다 귀중한 아버지의 안위가 걸려 있었다.

‘…기묘해. 이 남자는 정말 기묘하단 말이지…….’

그래도 이 남자와 손을 잡는 게 과연 옳은 선택인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꺼림칙해하는 코루루의 어깨를 따뜻한 손길로 쓰다듬는 체어맨도 같은 생각을 하는 듯했고 옆에서 기도하며 피눈물을 흘리는 타락한 추기경도 다를 바 없어 보였다. 엔레이드맨 또한 형제들이 내뿜는 불온한 기운을 읽었지만, 일부러 모른 척했다.

“그러면 다음 공격 때를 기점으로 잡지. 마약왕이 지금은 아버지께 손을 대진 못할 테지만, 시간이 지나면 녀석이 어떻게 돌변할지 모른다. 아버지께 조금이라도 위험한 상황이 벌어질지도 모르는데 도박을 걸 수는 없어. 녀석도 그걸 아니까 일부러 무리하게 움직인 거다.”

“거기서 아버지를 납치해 갈 줄은… 우리 중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으니까 말이죠.”

타락한 추기경이 쓴웃음을 지었다. 아버지를 납치해 가는데도 두 눈 뜨고 볼 수밖에 없었던 자신들이 어찌 부끄럽지 않을 수 있을까.

그렇게 다크 카오스의 자식들은 마약왕의 계획을 오로지 힘으로 찍어 누를 수 있는 히어로가 필요했다. 그리고 레헬은 자기 손과 발이 되어 줄 상대를 찾고 있었으니 어찌 되었든 결과적으로는 서로가 서로에게 이용 가치가 있었다.

그 이후, 그들이 숨을 죽이며 기다리는 동안 히어로 쪽에서도 큰 변화가 일어났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대한민국 S급 히어로들이 독자적으로 힘을 합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에스트리아 박재원이 자신의 사이드킥과 함께 다른 S급 히어로들에게 함께 움직이자며 끈질기게 제안한 것이 결국 통했다고 한다.

그 소식을 들은 코루루는 혼란스러워 보였지만 조용히 창밖만 응시했다.

오히려 옆에 있던 귀신들의 성녀가 뒤를 돌아보며 눈을 찌푸렸다. 히어로 협회라고 하니 생각하기도 싫은 위선자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바람을 타고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싶었으나 그녀는 죽은 망령들이 곡소리를 내는 것이라 생각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어떤 소식에서도 마더의 행방은 여전히 찾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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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언은 단단하고 높은 서랍장에 매달린 채 100을 세고 숨을 돌리면서 바닥에 내려왔다. 할 일도 없으니 운동이나 하자고 마음먹은 이후로 벌써 3시간이 넘게 여러 가구를 이용해 운동하는 중이었다.

자세를 바꿔 팔굽혀펴기를 시작하려는 찰나, 문이 열리며 거구의 사내가 안으로 들어왔다.

어제는 히어로였던 눈먼 고결한 화랑이 있더니 지금은 초면인 사내가 나타났다.

키가 190cm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는 군복을 입고 있었다. 눈매가 날카롭고 입을 일자로 굳게 다물고 있으니 위압감이 장난 아니었다.

노크도 없이 무작정 방으로 들어온 남자는 맨바닥에 엎드려 팔굽혀펴기하려는 재언을 부릅뜬 눈으로 쳐다봤다. 그런 남자를 본 재언은 어색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렇게 무작정 예의 없이 찾아온 사람은 눈앞의 남자가 처음이었다. 예의 차리는 것과 자유는 별개의 문제라고 마약왕의 부하들은 재언에게 아주 깍듯하게 굴어 왔었기 때문이다.

키 차이로만 따지면 재언은 남자와 그렇게 큰 차이가 나진 않았지만, 군복 위로 보이는 두꺼운 근육 때문인지 덩치가 상당했다.

그렇게 얼마나 서로를 쳐다보고 있었을까. 남자는 부릅뜬 눈을 더욱 치켜세우더니 커다란 목소리로 소리쳤다.

“안녕하십니까!”

“…….”

‘내… 귀. 내 귀 어디 갔지? 지금 귓구멍에서 피가 흐르는 것 같은데 괜찮나?’

고막이 나간 것 같았다. 왼쪽 귀를 통해 오른쪽 귀로 꽂히듯 들어온 남자의 목소리에 눈꺼풀 안으로 별이 보인 듯했다. 단지 고함만으로 사람의 넋을 빼놓을 수 있다니, 남자는 여러 의미에서 아주 대단한 능력을 가진 이였다.

이전에 군인 신분이었는지 남자는 절도 있는 몸짓으로 경례하며 이어서 소리쳤다.

“오늘 다크 카오스님을 모시게 된 헬 하운드 모리스라고 합니다!”

“아… 네… 모리스 씨…….”

재언은 고막을 울리는 모리스의 목소리에 한참 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온몸이 근육질로 힘이 세 보이는 남자는 사실 목청이 더 좋을지도 모르겠다.

“다크 카오스님의 명성은 옛날부터 감명 깊게 들었습니다! 보스께서 다크 카오스님을 위해 저를 무대의 일원으로 받아 주셨습니다.”

“아… 뭐라고요?”

하도 고막이 찢어져라 소리친 탓에 남자의 목소리가 조금만 작아져도 무슨 소리를 하는지 잘 안 들리는 부작용이 생겨 버렸다. 모리스의 눈매가 꼴사납게 해롱거리는 신재언을 보고 살짝 꿈틀거렸다.

사실 모리스는 마약왕이 급하게 영입해 온, 그야말로 그들 사이에서 막내의 위치에 있는 자였다. 그러다 보니 다크 카오스의 명성은 잘 알지만, ‘위대하신 그분’을 보는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아버지의 심기를 거스르지 마. 만약 그런 놈이 있다면… 가장 잔인하게 죽여 버릴 테니까. 실험대에 누워 녹아 없어지고 싶지 않다면 ‘위대하신 아버지’께 납작 엎드리는 게 좋을 거다.”

마약왕의 충고를 떠올린 모리스가 마뜩잖은 눈으로 재언을 내려다봤다. 몸이 좋고, 얼굴은 잘생겼다. 하지만 겉보기에는 딱 그뿐인 남자였다.

‘…이런, 한심한 놈이… 위대하신 그분이라고?’

모리스가 고함을 지르니 정신을 못 차렸고 노려보는 눈빛에 당황해하면서 어색하게 웃었다. 그건 겁쟁이들이 모리스를 보고 겁먹을 때나 짓던 표정이었다.

‘인정할 수 없군. 이런 남자가… 이런 남자가!’

모리스는 눈을 번뜩였다. 물론 보이는 게 다가 아니라는 건 잘 안다. 예쁘장한 얼굴로 무시무시한 힘을 숨기고 있는 레드-헬-파이어라는 히어로도 있지 않나. 그는 귀를 막은 채 해롱거리는 재언을 아래위로 샅샅이 훑었다.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보지 않는 이상, 지옥에서 올라온 나는 절대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성격이 저돌적이고 앞뒤를 잴 줄 모르는 그는 다크 카오스가 숨겨진 상상 이상의 힘을 가지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이런 나약해 보이는 놈이 전설적인 빌런들의 왕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얼굴만 잘생긴 기생오라비 같은 놈이!’

그는 남아프리카 지역에서 활동하던 악명 높은 용병으로 좋게 말하면 호전적이고 나쁘게 말하면 무엇이든 힘으로 찍어 누르는 습성이 강한 사람이었다. 결국, 그가 돌연 신재언을 향해 돌진했다.

“억!?”

재언은 이곳에서 자신을 덮칠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않았는지 그대로 모리스와 함께 바닥에 나뒹굴었다. 호랑이 같은 기세로 덤비긴 했어도 모리스는 당연히 다크 카오스가 조금은 버틸 것이라고 당연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재언은 종이 인간처럼 힘없이 밀려서 뒤로 넘어졌다. 모리스의 육체 역시 재언의 위로 맞춘 듯이 포개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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