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근하는 빌런-299화 (299/324)

299화

“아야야.”

이게 무슨 일이람…….

남자가 미친 황소처럼 자신의 가슴팍을 어깨로 들이받았다는 것까지는 알겠다. 귀엽게 툭 치는 수준이 아니라 무게를 잔뜩 실어서 돌진해오는 힘에 뒤로 넘어질 정도였다.

가까스로 머리가 바닥에 부딪히는 걸 면했지만 힘이 실린 엉덩이와 허리에 상당히 무리가 갔다.

거기다가 남자는 먼저 공격한 주제에 잔뜩 충격받은 얼굴로 재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서로 마주 보고 누워 있는 모양새가 아주 묘해서 상당히 기분이 더러웠다.

마약왕의 부하라는 놈이 이렇게 대놓고 공격할 줄은 몰랐던 재언은 남자의 자존심에 크게 타격을 받았다.

마약왕에게 납치당할 때는 방심했다고 나름의 위안으로 삼았었는데, 또다시 이런 식으로 부주의함을 드러내다니. 이제는 무슨 이유를 달아도 구구절절한 변명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여러 의미로 잔뜩 기분이 상한 재언과는 다른 이유로 모리스는 표정 그대로 큰 충격을 받는 중이었다. 그는 지금까지 겪어 온 전장에서 죽을 고비도 여러 차례 넘겼었고 자신보다 강한 힘을 가진 상대도 여러 번 마주했었다.

그런데 몸을 일으켜 본 눈앞의 남자는 전혀 강해 보이지 않았다.

이런 놈이 다크 카오스라는 빌런명을 가지고 있다니. 저런 이가 날고 긴다는 빌런들의 왕으로 군림한다는 것 자체가 세상이 자신을 속이고 있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모든 상황이 트루먼 쇼 같았다.

성격이 뜨거운 감자보다도 불같고 급한 모리스는 결국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재언은 그가 스읍, 하고 숨을 들이마시는 걸 보자마자 잽싸게 손을 들어 올려 귀를 막았다.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그가 지르는 소리를 생으로 들었다간 고막이 터질지도 모른다.

“왜 이렇게 약한 거냐!”

역시나 예상대로 터져 나오는 사자후에 재언은 속으로 감탄했다.

‘와… 귀를 막아서 다행이네. 이 정도면 진짜로 고막이 터졌을 거야.’

이레일과 비슷한 능력을 가진 건 아닐까 의심할 정도로 모리스의 사자후는 엄청났다. 무슨 목소리만으로 공기를 이렇게까지 흔들 수 있는지 질릴 따름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은 다크 카오스라는 별명을 원한 적이 없었다. 빌런들의 왕이 되고 싶었던 것도 아니다. 그냥 평범하게, 얇고 긴 생을 살고 싶었을 뿐이다.

물론 모리스는 그런 재언의 억울함을 알 리 없었다. 남아프리카에서 용병으로서 한 끗 날리며 여러 강자를 힘으로 굴복시켜 온 폭력 성향이 강한 남자는 그저 짐승처럼 눈을 번뜩일 뿐이었다.

“이렇게 약한 놈이 다크 카오스라니. 난 인정할 수 없다, 인정할 수 없어! 왕은 강해야 해. 세상에서 가장 강해야 한다고!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힘만이 세상을 지배한다. 힘으로 찍어 눌러서 꼼짝도 못 하게 공포를 줘야 한단 말이다!”

남자는 점점 목소리가 잦아들긴 하지만 여전히 방 안이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런데 이런 나약한 놈이 다크 카오스라고? 웃기지도 않는군! 보스는 제정신인가? 네놈이 보스에게 무슨 술수를 부린 게 분명해!”

재언은 귀를 막은 채 모리스의 외침을 듣고 있다가 갑자기 짜증이 치솟는 걸 느꼈다.

이런 놈들이 어떤 인간인지 경험으로 잘 알고 있다. 힘으로 상대를 찍어 누르기 좋아하는 삼류 양아치들이었다.

“네 욕망은 힘인가 봐?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힘을 가장 원해? 아니면 그 힘으로 누군가를 짓밟고 싶은가? 너보다 힘이 약한 사람들을?”

한껏 짜증이 난 기색을 숨기지 않으며 재언은 모리스를 노려보았다.

마약왕은 뭐 이런 놈을 데려와서 부하로 두고 있는지 모르겠다. 아니면 마약왕이 자신을 엿 먹이기 위해 이곳에 가둬 놓고 저놈과 만나게 한 것일까.

“힘으로 누군가를 짓누르는 걸 좋아하는 모양이야. 약한 자에겐 굴복하기 싫은 것도 네 욕망이 본능에 가깝기 때문일 거고.”

무슨 동물도 아니고 본능에 살고 있냐는 뜻으로 한껏 비아냥거렸다. 그러면서도 재언은 혹시나 녀석이 다시 덤벼들어 올까 봐 분주하게 눈동자를 굴리며 도망갈 구석을 찾았다.

그런데 입을 꾹 닫고 말없이 재언을 쳐다보고 있던 모리스가 갑자기 넋이 나가 비명을 질렀다.

“으, 으아아악!”

재언을 앞에 두고 뒤로 넘어져 엉덩방아를 찧더니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비명을 질렀다. 그런 모리스를 쳐다보며 재언은 몸을 일으켰다.

‘뭐야? 왜 저래?’

그러다 삐끗한 허리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재언은 어정쩡하게 일어난 자세 그대로 고개를 숙인 채 신음을 삼켰다.

아무래도 모리스와 몸통 박치기를 하면서 바닥에 부딪힌 허리가 조금 잘못된 모양이었다. 역시 나이가 들수록 몸 관리는 필수였다.

재언이 쓸데없는 생각을 하면서 허리와 엉덩이 부근을 주먹으로 톡톡 두드리면서 모리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귀신을 마주하기라도 한 것처럼 얼굴이 하얗게 질린 모리스가 재언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엉덩이 걸음으로 슬금슬금 물러났다.

아까까지만 해도 터질 것 같은 고구마처럼 눈까지 충혈되어 재언을 향해 화를 내던 사람이 지금은 무슨 해파리처럼 변해 있었다.

‘…외모는 무슨 귀신 잡는 해병대처럼 생겨 가지고… 혹시 진짜 귀신이라도 봤나?’

순간적으로 오싹해진 느낌에 재언이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폈다. 그리고 다시 모리스에게 시선을 주었는데, 그는 이미 밖으로 나가고 없었다.

황당한 마음에 재언은 열려 있는 문을 바라보며 자신도 모르게 한마디 내뱉었다.

“뭐, 뭐야?”

허망한 그의 목소리만이 넓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

.

.

비명을 지르며 방에서 빠져나온 모리스는 한참 동안 달리다가 뒤를 돌아봤다. 금방이라도 잡힐 것 같다는 공포심이 그를 사로잡았다.

그는 방금까지도 신재언을 나약해 빠진 놈이라고 단정 지었다. 그가 자신들을 농락한 게 분명하다고 분노하며 폭언을 쏟아붓던 그때, 어둠 속에서 무언가와 눈이 마주쳤다.

분명 우위를 점하고 있었던 건 자신이었다. 이대로 주먹을 내질러 신재언이 눈물 콧물을 빼게 얼굴을 피떡으로 만들어 줄 자신이 있었다.

악독하기 짝이 없는 보스인 마약왕의 명령만 아니었다면 이런 다크 카오스쯤이야 한 번에 굴복시킬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분명 자신이 재언의 위에 올라타 우위를 점령했건만 기묘한 한기가 느껴졌다.

푸른색 눈동자가 모리스를 향했다.

“네 욕망은 힘인가 봐?”

그것은 마치 모리스의 영혼까지 꿰뚫을 듯한 말이었다.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힘을 원해?”

그것은 유혹이기도 했으며,

“아니면 그 힘으로 누군가를 짓밟고 싶은가?”

조롱이기도 했다. 하지만 모리스는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그 순간, 묘한 기시감을 받는 그의 머릿속에 이곳에 오기 전 마더교의 교주가 했던 충고 섞인 말이 떠올랐다.

“모리스. 넌 저돌적이고 앞뒤를 모르는 녀석이지. 하지만 그래도 보스가 널 선택한 이유가 있을 거다. 분명 위대하신 그분을 위한 무대를 완벽하게 이어 나갈 수 있는 묘수라는 얘기지. 나도 네가 뭘 할지 기대되기는 하지만… 한 가지 충고하자면 그와 눈을 똑바로 마주쳐서 좋을 게 없다.”

“힘으로 누군가를 짓누르는 걸 좋아하는 모양이야.”

다크 카오스의 말이 이어질수록 두 사람 사이에 거대한 우주가 모여들었다.

“약한 자에게 굴복하기 싫은 것도 네 욕망이 본능에 가깝기 때문일 거고”

모리스는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거대한 우주의 ‘무언가’들이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느낌을 받았다.

아니, 그것은 진짜였다. 그 눈동자는 흥미이기도, 호기심이기도, 혹은 사랑과 애정이기도 했다. 혹은 원망과 시샘을 담은 듯했다.

우주의 거대한 것들의 시선은 모리스가 아닌 신재언에게 향했다. 그런데 그는 이미 그들의 존재를 알고 있는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마치 그들을 확인하듯 푸른 눈동자를 굴렸다.

그가 다시 모리스를 쳐다보는 순간 모리스는 영혼이 빠져나가는 것 같은 괴상하고 섬뜩한 느낌을 받았다.

“으아아악!”

결국, 거대한 압박감을 이기지 못한 모리스가 뒤로 꼴사납게 나뒹굴었다. 그런 모리스의 이상한 행동에도 재언은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재미있다는 눈빛으로 천천히 일어날 뿐이었다. 느긋하게 허리에 손을 올린 채 방금까지도 기세등등하게 소리치던 모리스를 내려다봤다. 시시하지만 흥미로운 것을 바라보는 시선이었다.

모리스는 그대로 살해당하는 것 같은 감각을 맛봤다. 이대로 가다간 정말로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재언이 잠시 눈을 감고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모리스의 위로 움직여 오던 거대한 우주가 사라지고 평범하고 화려한 방 안이 눈에 들어왔다.

‘봐… 봐준 건가? 나… 날 살려 준 건가?’

모리스가 참았던 숨을 몰아쉬었다. 이대로 도망가려는 본능을 간신히 억누른 건 신재언이 자신을 진짜로 살려 준 것인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미쳤군… 무, 무서운 능력이다. …날 정말 죽일 생각이었다면 죽였을 거야. 다크 카오스라는 빌런명이 괜히 생긴 게 아니었어. 이제 내 목숨은 그에게 달렸다.’

모리스가 덜덜 떨면서 마음을 다잡는 동안 허리를 짚은 채 눈을 감고 있던 재언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모리스는 그의 시선이 문밖으로 향하는 걸 확인하자마자 그대로 비명을 토해 내며 도망쳤다. 달리면서도 저 푸른 눈의 괴물이 뒤를 쫓아오는 느낌에 견딜 수가 없었다.

“아… 허리야…….”

물론 재언은 삔 허리를 잡으며 엉거주춤한 자세로 소파에 기대고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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