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화
첫 만남은 최악이었지만, 그 후로 모리스의 태도가 180도 변했다. 재언의 눈치를 보며 설설 기기 시작한 것이다.
자신보다 약한 사람을 얕잡아 보고 강하게 나가면서 강한 사람에게는 찍소리도 못하고 따르는 듯했다. 고릴라보다도 단순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었다.
‘…근데 대체 내가 뭘 했다고?’
그래, 그런 놈이라는 건 잘 알겠는데 지금의 태도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다짜고짜 신재언에게 덤벼들고 소리 질렀던 건 어쨌든 그가 보기에 신재언이 약하다고 판단해서였을 것이다.
그리고 재언은 그 사실을 시원하게 인정했다. 왜냐면 자신은 약한 게 맞으니까 말이다. 그 사실에는 수치심도 들지 않고 당당했다.
능력이라고 해 봤자 이젠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럭키 가이’와 자신을 보호해 줄 자식이 없으면 무용지물인 ‘증오를 각성시켜 주는 능력’ 뿐이었다. 아마 지금도 모리스와 1:1로 붙는다면 3초 만에 나가떨어질 가능성이 높았다.
“다크 카오스님. 목마르십니까? 제가 당장 가서 물을 떠 오겠습니다. 혹시 시장하진 않으십니까? 밥을 준비해오죠.”
“…….”
재언은 갑자기 비굴하게 웃으며 조금만 움직여도 자신에게 집중하는 모리스를 대하기가 점점 힘들어졌다.
‘움직이셨다! 분명 무슨 위대한 뜻이 있으신 거겠지?!’
직접 이 말을 입 밖으로 내뱉진 않았지만, 그가 생각하는 내용이 저절로 귓가에 들리는 듯했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자신을 죽일 듯이 기세등등하던 남자가 왜 저렇게 비굴하게 변했는지 잘 모르겠다. 지금은 마치 여타의 다크 카오스 추종자들처럼 마냥 떠받드는 태도로 바뀌었다.
‘이놈 왜 이래? 오히려 내가 당하지 않았나? 이쪽은 지금 허리까지 삐끗해서 움직일 수도 없는데.’
자신은 모리스에게 무슨 짓을 했다기보단 당한 쪽에 가까웠지 않았나. 황소처럼 들이박는 힘에 꼴사납게 바닥에 뒹굴었고 허리까지 삐었다.
객관적으로, 냉정하게 생각해 봐도 신재언이 아주 처참하게 당한 수준이었다. 그런데 모리스는 마치 재언이 그에게 완승한 것처럼 굴었다.
마치 두목 고릴라가 된 기분에 마냥 좋아하고 있을 수만은 않았다.
“저기… 갑자기 왜 이러시는지?”
삐끗한 허리에 무리가 가지 않게 누운 채로 어디서 구해 왔는지 찜질팩을 대령하는 모리스에게 결국 참다못한 재언이 물었다.
“제가 멍청해 다크 카오스님의 진정한 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 모리스, 드디어 보스의 말을 뼈저리게 새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
그의 대답에 재언은 한숨을 쉬면서 고개를 돌렸다. 역시나 이놈도 여전히 말이 안 통했다.
“바깥 상황이나 좀 알려 줘. 여기에 갇혀 있으려니 답답해 미치겠어.”
결국, 모리스에게서 제대로 된 대답을 포기한 재언이 바깥의 정보나 얻을 생각으로 물었다. 꼴을 보니 자신이 뭘 물어봐도 미주알고주알 다 대답해 줄 분위기였다.
예상대로 모리스는 자기가 아는 내용 전부를 재언에게 알려 주었다. 한참 그의 말을 듣던 재언이 눈을 커다랗게 떴다.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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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곳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테러들은 대부분 각국의 수도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건 대한민국의 수도인 서울도 마찬가지였다.
한국은 그래도 S급 히어로들이 다른 나라들보다는 연합하는 게 빨랐던 덕분에 피해자가 비교적 적었다.
하지만 추가 테러의 위험으로 인해 서울 시민들의 대피소행이 강제로 실시되었다. 당연히 서울 시내 출입도 완전히 통제 상태였다.
빌런들의 테러를 대비해 만들어진 대피소 겸 방공호는 대한민국에 총 140곳. 그중 서울시 강남구에 있는 대피소는 무려 세 개. 그중 규모가 가장 큰 곳이 바로 강남역이었다.
유례없는 다크 카오스의 공격에 방공호로 대피한 사람들은 처음엔 잔뜩 겁먹었지만, 차츰 시간이 지날수록 짜증으로 바뀌었다.
모든 사람이 넓기만 하고 개방된 공간에서 옹기종기 모여 숙식을 해결해야 했기 때문이다. 화장실 같은 세면시설이 인원보다 턱없이 부족한 것도 이유였다.
“이제 그만 집에 가도 되지 않아요? 더 이상 테러가 일어나지 않는다면서요. 지방에 사는 지인은 아예 집에서 편하게 쉬고 있다고 했어요!”
“하지만 사장님. 아직 테러가 끝난 것이 아닙니다. 언제 또 쳐들어올지 몰라요. S급 히어로들이 맘 놓고 싸울 수 있게 대피소에 계시는 게 안전합니다.”
A급 히어로들은 쉴 새 없이 따져 오는 시민들을 다독이느라 절절맸다. 당장은 빌런들이 공격을 멈춘 덕분에 바깥이 평화로웠던 것도 이 상황을 악화시키는 데 한몫했다.
게다가 미처 대피소로 피하지 못했던 사람들이 집에서 여유롭게 지내며 인터넷 커뮤니티에 글을 쓰기 시작한 게 큰 원인이었다.
괜한 고생을 하는 것 같다며 대피소 내에서 하나둘씩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하며 불만이 속출했다. 그로 인해 강남역 대피소를 지키던 히어로들만 진땀을 뻘뻘 흘리게 되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말하면 이해하는 척이라도 했던 사람들은 하루가 지나자 마음을 단단히 먹었는지 소리를 더욱 높였다. 결국, 히어로들이 시민들을 감금하고 있다며 우기기까지 했다.
“멀쩡한 집을 놔두고 왜 여기서 이런 생고생을 해야 하냔 말이에요?! 지금 밖에 빌런들이 있어요? 히어로들만 하릴없이 돌아다니고 있잖아요. 벌써 2주가 지났어요. 지금까지 감감무소식인 거면 공격이고 뭐고 없을 것 같은데요.”
“…죄송합니다만, 아직 봉쇄가 풀리지 않아서…….”
“못 참아요! 지금 여기에 있다간 그냥 다 죽게 생겼어요. 답답해 죽게 생겼다니까요! 어차피 나가서 빌런들한테 죽는 거나 여기서 죽는 거나 매한가지예요.”
소리를 친 시민이 동의를 구하듯 뒤를 돌아 옹기종기 모여 이쪽을 살피는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저쪽의 분위기도 히어로에게 좋은 쪽으로 흘러가진 않는 듯했다.
A급 히어로는 잠시 말문이 막혀 눈치를 보다가 한숨을 쉬며 뒤를 돌았다. 지하 깊숙이 지어 놓은 방공호를 나와 한참을 걸어 빠져나오자 바깥에서는 S급 히어로 에스트리아 박재원이 살벌한 표정으로 주변을 순찰하는 중이었다.
에스트리아 박재원은 2주 동안 제대로 잠도 못 자고 이곳 대피소를 철통같이 지키는 중이었다. 저 모습을 보고도 사람들이 그를 욕하며 감금 중이라고 원성을 높일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A급 히어로가 혀를 쯧쯧 차며 에스트리아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에스트리아. 이제 슬슬 한계예요. 시민들도 안에서 매우 답답한 모양이에요. 그리고 다른 곳은 이미 대피소에서 사람들이 나왔다고요. 인터넷을 끊은 것도 아니고 여기 있는 사람들도 다 그 상황을 알고 있을 테고 더 이상 잡아 두는 건 힘들 것 같습니다.”
잠시 말을 끊은 A급 히어로가 짧게 침묵하다가 물었다.
“협회에서는…….”
에스트리아가 고개를 흔들었다. 날티 나게 생긴 그의 눈매가 작게 찌푸려졌다.
“아직 아무 지시도 없습니다.”
“이거 참… 레드-헬-파이어님은?”
“그 자식도요.”
“…사실 그분만 계시면 무서울 것도 없을 텐데 말입니다.”
그의 말에 에스트리아가 한숨을 쉬면서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봤다. 조용한 하늘이 마치 폭풍전야 같아서 불길했다.
하지만 그 역시 더 이상 뿔난 시민들을 묶어 놓을 수 없다고 판단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오늘 밤만… 오늘 밤만 지나면 대피소에서 사람들을 귀가시킵시다. 그리고 히어로들이 더 확실하게 순찰하는 걸로 하고요.”
“고생이네요. S급 히어로들도…….”
특히 에스트리아는 불량하게 생긴 것과 달리 진짜 위급하고 없는 사람들을 무보수로 도와주는 위인으로 유명했다.
지금도 남들에게 찬양받는 것도 아니고 금전적으로 아무런 이득도 없는데 2주씩이나 밤을 새워서 지키고 있지 않은가. 그렇게까지 고생하는 그를 향해 사람들은 되레 욕이나 하고 앉아 있는데.
A급 히어로가 다시 돌아가고 다시 강남역 주변을 순찰하고 돌아온 에스트리아가 늦은 점심을 먹기 위해 물을 한 모금 축일 때였다.
역 안쪽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그러더니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시민 몇 명이 지상으로 올라왔다. 물을 마시다 말고 깜짝 놀란 에스트리아가 그들을 향해 한달음에 달려갔다.
“여러분들. 들어가세요. 아직 위험합니다.”
그에 가장 선두에 있던 젊은 남성이 톡 쏘는듯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밑에선 도저히 답답해서 못 있겠습니다. 그리고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위험에서 지킨다느니 어쩌느니 했으면서……. 태평하게 물이나 마시고 계시네. 이쪽은 화장실도 몇십 분이나 줄 서서 가느라 물도 제대로 못 먹는데.”
에스트리아는 머쓱한 표정으로 물병을 든 손을 내렸다. 처음에는 날티 나는 외모에 S급 히어로라는 그가 어려워서 주춤했던 사람들은 그의 물렁물렁한 성격을 귀신같이 읽어 내고 더욱더 강하게 나가기 시작했다.
“지금 여기 개미 새끼 한 마리 지나가는 소리도 안 들리는데 이제 그만 보내 줘도 되지 않습니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2주나 여기 갇혀 있었어요.”
사실 지금 바깥이 빌런의 공격으로 난리가 났거나 대피 이후로 위험한 순간을 한 번이라도 겪었더라면 시민들도 이렇게까지 막무가내로 나오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서울은 너무나도 조용했고 제대로 씻지도, 생리현상을 처리할 수도 없는 곳에서 2주를 보냈다. 평화로운 순간이 이어지는데 버틸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에스트리아는 그들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면서도 오늘 하룻밤만 더 참아 달라고 설득하기 위해 우물쭈물했다.
그런데 그때, 돌연 그의 눈매가 날카롭게 변했다.
“뭐, 뭐야?”
갑자기 바뀐 분위기에 사람들이 당황하는 것도 잠시, 에스트리아가 귀걸이에 걸려 있던 깃털을 잡아, 거대한 방패를 만들었다.
곧이어 그의 앞으로 거대한 푸른색의 촉수가 빠른 속도로 날아 들어왔다. 그와 동시에 높은 빌딩과 나무 사이에 숨어 있던 푸른 피부의 괴인들이 하나둘, 아니 수십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호호호. 역시 사람들은 어리석어. 그렇지 않니, 로에즈?”
“정말이지… 이렇게까지 나 여기 있어요~ 하고 알려 주다니 고맙기 짝이 없어. 우리가 손쓸 일을 덜었잖아. 그렇지, 츠유?”
괴인들 사이로 머리가 두 개 달린 사람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