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2화
“듣기 거북한 소프라노네……. 너무 짜증 나고 거슬려서 못 참겠어.”
우아한 몸짓으로 모습을 드러낸 냉기와 제안의 마녀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면서 중얼거렸다.
갑자기 나타난 그녀를 본 에스트리아의 표정이 멍해졌다.
에스트리아는 갑자기 나타난 이가 냉기와 제안의 마녀라는 것을 깨닫자마자 아연실색했다. 머리 두 개 빌런을 상대하는 데만 ‘심연의 심장’이라는 아이템을 쓸 정도로 고전했다.
여기에 다크 카오스의 자식 중 한 명인 거대 빌런, 냉기와 제안의 마녀까지 상대하는 건 도저히 무리였다.
그의 사이드킥 최강의 방패가 와도 그녀의 상대로는 역부족이었다.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긍지와 강한 방어 능력을 가진 최강의 방패는 실전 경험은 한없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뭘 얼빠지게 쳐다보고 있어?”
냉기와 제안의 마녀가 에스트리아에게 날카롭게 말하며 가면을 고쳐 썼다. 머리를 쓸어 넘기는 그 일련의 동작이 누군가를 떠올리게 했다.
하지만 에스트리아는 그럴 리 없다고 중얼거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오히려 저런 악독한 마녀에게서 가련한 한 떨기 꽃 같은 코루루를 떠올린 자신을 반성했다.
“어째서 당신이?”
“난 저놈들이 필요하거든. 히어로 따위에게 뺏길 순 없으니까 도와주는 것뿐이란다.”
냉기와 제안의 마녀가 쌍두 빌런을 향해 턱짓하자 그들 중 호전적인 성격을 가진 츠유가 이를 갈면서 위협적으로 물었다.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언니? 날 잡겠다고……? 히어로 따위와 손을 잡겠다고? 당신이?”
“하하하. 그걸 얘기하기엔 이미 선을 넘지 않았니?”
냉기와 제안의 마녀는 살기가 가득한 츠유의 말에도 주눅 들지 않고 제 가면을 쓰다듬으며 팔짱을 꼈다. 가면에 가려져 표정은 보이진 않았지만, 목소리에는 비웃음이 가득했다.
“그리고 누가 네 언니야? 난 너 같은 동생 둔 적 없는데.”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공기를 스산하게 얼렸다. 냉기와 제안의 마녀의 발목에서부터 결정 모양의 문신이 빛을 내며 점점 위로 퍼졌다.
그녀는 아직도 넋을 놓은 채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에스트리아의 모습에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언제까지 넋이나 놓고 있을 거야?! 정말 못 쓸 남자잖아!”
“뭐?”
에스트리아가 그래도 영 정신을 차리지 못하자 마녀는 결국 화를 내며 다가와 그의 옆구리를 발로 찼다.
‘심연의 심장’을 두르고 있었음에도 높은 굽이 있는 구두가 옆구리에 작열하는 고통을 선사했다. 옆구리가 뜯겨 나가는 아픔에 에스트리아는 몸을 움츠렸다.
하지만 그녀의 발차기가 결국 그를 살렸다. 머리가 두 개 달린 괴인이 휘두른 낫에서 푸른색 섬광이 터지는 것과 동시에 그녀와 에스트리아가 있던 자리가 녹아내렸다.
“용서 못 해요. 용서 못 해. 용서 못 해. 히어로 따위와 손을 잡다니. 당신에겐 자존심도 없는 건가요? 아아, 이런 사람을 연기해야 한다니. 저 츠유는 정말 굴욕적이에요…….”
츠유가 음울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충혈된 눈으로 피눈물을 쏟으며 그녀가 낫이 든 손을 부르르 떨었다.
“보스의 말이 맞았어요, 언니. 당신들은 ‘위대하신 그분’을 모실 자격이 없는 머저리들이에요. 그냥 운이 좋아서 그분 곁에 있을 수 있었던 것뿐이면서…….”
그러자 남자 머리, 로에즈가 우웩, 하고 토하는 시늉을 하며 혀를 길게 내밀었다.
“이 미친 것. 눈 돌아간 것 좀 봐. 보스에게 머리가 뜯기는 건 내가 아니라 너겠는걸?”
하지만 로에즈의 비아냥에도 츠유는 그의 말이 들리지 않는다는 듯 움직였다.
이 와중에도 에스트리아는 냉기와 제안의 마녀를 믿어야 하는지 아직도 고민 중이었다. 그녀가 왜 자신을 도와 저 괴물들을 상대하려 하는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어쨌든 대치하고 있는 두 빌런이 다크 카오스를 찬양하고 다닌다는 점에서 똑같았다.
다크 카오스의 여덟 자식 중 한 명인 냉기와 제안의 마녀. 그녀가 가지는 이름과 힘은 사회에 커다란 혼란을 주고 무고한 시민들이 손해를 입었다.
그녀가 가는 곳은 얼어붙었다. 얼어붙은 몸을 붙잡으며 울부짖다가 심장까지 어는 고통 속에서 죽음을 맞이한다고 했다.
에스트리아는 그녀의 악명에 치를 떨곤 했다. 악독한 마녀, 절대로 용서할 수 없는 악당이었다.
그녀는 무고한 시민들을 죽이면서 그 위에 불을 질러 즐겁게 춤을 추고 손뼉을 치며 노래 부르는 빌런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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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가 말은 잘하네요. 자기 애인이 위험에 처하니까 바로 도와주러 간 거면서.”
저 멀리서 귀신들의 성녀가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언니가 끼어들지 않았다면, 에스트리아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겠죠. 이미 지금도 자기 몸에 무리가 가는 짓을 하고 있잖아요. 코루루 언니는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거고.”
“…에스트리아 박재원과 코루루 누님이 사귀고 있었습니까?”
“유명하지 않아요? 신문에도 났었는데.”
“…그냥 스캔들일 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특히 코루루 누님의 정체를 알았을 땐 더더욱 스캔들이라고…….”
원한이 떨떠름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다가 무언가를 깨달은 듯 레헬을 힐끔 쳐다봤다. 하긴, 빌런들의 왕 다크 카오스가 사실 레드-헬-파이어와 비밀 연애 중인데 그 자식이라고 S급 히어로와 사귀지 말라는 법은 없지 않은가.
흐린 눈빛으로 아버지와 형제들의 은밀한 비밀을 알아 가는 원한을 포함한 그들 중에서 누구도 코루루가 실패하고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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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기와 제안의 마녀와 에스트리아는 불편하기 그지없지만, 일단 공공의 적을 상대하기 위해 임시 휴전하는 모양새로 나가기로 했다. 아니, 사실은 일방적으로 에스트리아 쪽에서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는 혹시라도 자신을 교란하기 위한 작전은 아닐까 의심했다. 마녀를 경계하면서도 주변에 있는 다른 괴인들을 살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다행히 괴인에게 끌려간 몇몇 사람을 제외하면 모두 대피소로 무사히 도망친 모양이었다.
“마약왕… 괴물을 만들어 냈네.”
‘…무슨 소리지?’
그녀가 중얼거리는 낮은 목소리가 어딘지 모르게 익숙했다. 하지만 그 답을 고민하기도 전에 츠유의 공격이 매섭게 다가왔다.
거대한 낫을 휘두르는 주제에 눈으로 좇기 어려울 만큼 빠른 속도였다. 멀리서 보면 한 번만 휘두르는 것으로 보이겠지만, 마녀와 에스트리아는 총 두 번의 공격을 피해야만 했다.
마녀가 재빠르게 뒤로 물러서며 츠유의 주변을 얼렸다. 온몸이 얼어붙는 느낌에 감각이 둔해질 텐데도 츠유는 눈을 붉게 번뜩이며 집요하게 마녀를 노렸다.
세 사람의 공방은 지루하게 이어졌지만, 짧은 시간에 서로의 탐색이 끝이 났다. 츠유가 집요하게 냉기와 제안의 마녀만 노리는 동안 에스트리아도 판단을 끝냈다.
둘 다 최악의 빌런임에는 분명했다. 하지만 한쪽은 눈앞에서 시민들을 납치한 괴인을 조종하는 빌런이었고 다른 한쪽은 그래도 나름 자신을 돕고 있는 빌런이었다.
일단 머리 두 개 빌런을 처치해 시민들의 안전을 우선하는 게 먼저였다. 망설임이 사라졌다.
“!!!”
S급 히어로와 그에 필적하는 거대 빌런이 손을 잡자 츠유의 얼굴이 점차 일그러졌다. 발아래가 얼어붙어도 낫을 휘두르는 열기로 녹이는 그 순간에 에스트리아의 창이 찔러 들어왔다.
“츠유. 위험하니까 그만 물러나자고!”
로에즈가 다급하게 소리쳤지만, 츠유는 듣지 않았다. 마녀가 발을 내리찍으며 주변 반경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 얼려 버렸다.
숨 쉬는 것마저 고통스러운 극한의 추위가 몰려왔다. 에스트리아는 빠르게 두 손으로 입과 코를 막았다.
다행히 폐까지 얼어붙을 것 같은 지독한 냉기는 에스트리아를 피해 머리 두 개 달린 괴물의 몸을 꽁꽁 얼어붙게 했다.
‘…이 공격이 나를 향했다면… 막기 힘들었을 테지.’
오싹하고 무서운 능력이었다. 순식간에 얼어붙은 쌍두 빌런을 보며 에스트리아는 기침을 토해 냈다. 슬슬 ‘심연의 심장’을 사용하는 몸에 한계가 찾아오는 모양이었다.
그가 창을 휘두르며 귀걸이에 남아 있는 깃털을 떼어 던졌다. 그러자 창이 활로 변해 그의 손에 안착했다. 빌런의 심장을 겨냥해 존재하지 않는 활시위를 있는 힘껏 당겼다.
“이, 이이, 이이익!”
얼어붙은 몸을 필사적으로 움직이려고 하며 츠유가 분한 듯 앓는 소리를 냈다. 하지만 마녀는 그들에게 자유를 허락하지 않았다.
오히려 두 겹 세 겹 이상의 얼음벽을 만들어 그들의 몸을 꼼짝도 할 수 없게 얼려 버렸다. 인간이 숨 쉴 수 없을 만큼의 기온에 츠유가 날카로운 비명을 삼켰다.
그리고 에스트리아의 화살이 그녀의 심장을 꿰뚫으려는 그 순간.
“츠유. 그러니까 네가 안 되는 거야.”
소극적으로 츠유를 말리던 로에즈가 혀를 차며 그녀를 타박했다.
그는 츠유를 혐오하지만, 어쨌든 두 사람은 한 몸에 붙어 있는 공생관계였다. 츠유가 죽는다면 그도 죽는다. 그녀가 살아 있어야 자신 역시 살 수 있다.
로에즈가 움직이며 어두운 기운이 증폭되자 마녀는 눈을 가늘게 떴다.
마약왕이 준비한 자들이 맞나 싶을 만큼 실력이 허무하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숨겨 둔 힘이 있는 모양이다.
이윽고 가냘픈 그들의 몸뚱이에 점차 근육이 붙기 시작했다. 동상을 입어 콜록거리는 츠유의 머리 대신 로에즈의 머리가 길게 움직였다.
“그들을 너무 얕봤잖아. 어차피 저것들을 상대해도 뒤에 더 무서운 녀석들이 대기 중이라고. 우리가 아무리 ‘위대한 그분’의 선택을 받았다고 해도 저 녀석들을 다 상대하기는 무리야. 일단 도망간다. 실험체는 다 모았어.”
“어딜!”
활을 재차 겨누며 한 걸음 내딛던 에스트리아는 로에즈의 눈이 번뜩인 순간 무의식적으로 마녀의 어깨를 붙잡고 보호하듯 품에 안았다.
눈이 멀 정도로 번쩍이는 빛이 터졌다.
가물가물해진 시야에 눈을 찌푸렸던 에스트리아가 시야를 되찾았을 땐 머리 두 개 빌런은 이미 모습을 감춘 뒤였다. 그리고 품 안에 있었던 그녀 역시 이미 없어져 있었다.
그때 타이밍 좋게 저 멀리서 최강의 방패가 달려왔다.
“선배님!”
아이템을 모두 해제한 에스트리아는 멍하니 서서 흐르는 피를 닦았다. 아직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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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이구!”
귀신들의 성녀가 돌아온 코루루의 등짝을 손바닥으로 찰싹찰싹 때렸다.
“언니! 그 녀석들을 잡아야 하는데, 남자친구 품에 안겨 있느라 정신 못 차린 거죠!”
“아니야!”
동생의 매운 손길을 얌전히 느끼면서도 코루루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