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3화
코루루가 잔뜩 억울한 얼굴로 양팔을 번쩍 들고 있었다. 힘든 척, 약한 척 눈썹을 팔자로 만들고 그렁그렁한 눈빛을 해 보였지만, 엔레이드맨은 전혀 봐줄 생각이 없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타락한 추기경이 인자한 얼굴로 눈을 감은 채 옆에서 코루루의 편을 들어 주었다.
“냉기와 제안의 마녀도 지금 많이 반성하고 있는 것 같은데 봐 드리죠.”
그에 냉랭한 분위기로 코루루를 쳐다보고 있던 엔레이드맨이 표정을 풀고 한숨을 쉬었다.
사실 자신도 ‘파수꾼’이라는 별칭에 맞지 않게 마약왕의 손에 놀아나 다쳐 아버지를 빼앗기고 말았다. 자신이 코루루를 혼내 봤자 누워서 침 뱉기였다.
고개를 끄덕여 풀썩 자리에 앉는 엔레이드맨의 눈치를 보던 코루루는 팔을 내리고 슬그머니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한참 동안 벌을 서고 있었던 탓에 뻐근해진 어깨를 주무르며 엔레이드맨의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자리에 없는 원한과 버드맨을 제외한 다른 형제들을 둘러보던 엔레이드맨은 코루루가 앉자마자 가장 궁금했던 걸 물었다.
“그래. 그놈과 싸웠을 때 어땠지?”
“강했어요. 힘을 가늠해 보려고 대충 싸운 것도 있었지만, S급 히어로와 같이 싸웠다고요? 그런데 그걸 몇 합이나 버티고 도망까지 갔어요.”
코루루가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녀는 연신 머리를 쓸어 넘기며 무언가 걸리는 점이 있는 듯 매우 찝찝하다는 얼굴이었다.
“그동안 마약왕이 보여 주었던 부하답지 않게… 굉장히 강했어요. 그리고 뭔가 아직 더 남아 있는 것 같은데 뭐가 뭔지 아직은 모르겠더라고요.”
“도대체 마약왕 오라버니가 원하는 게 뭘까요?”
답답한 얼굴로 대화를 듣던 귀신들의 성녀가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창백한 낯빛으로 눈살을 찌푸리며 말하는 모양이 마약왕의 진짜 의도를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투였다.
“지금 마약왕 오라버니가 하는 짓들은 정말 의미 없는 짓들이에요. 고작 이따위 테러로 세계를 아버지의 발아래 두겠다는 소리는 아니겠죠? 아버지를 통해 이루고 싶은 욕망이 무엇인지 저는 이해하지 못하겠어요.”
“누가 그걸 이해할 수 있겠니.”
코루루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녀는 자신의 뒤에 들어온 마약왕을 아껴 주려 나름대로 노력했지만, 도저히 정이 붙지 않아서 힘들었다.
생각에 잠긴 채 둘의 대화를 듣던 엔레이드맨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날카롭게 말했다.
“이제 그 해답을 들으러 직접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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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골목길 안으로 어떤 남자가 힘없이 내팽개쳐졌다. 그 뒤를 따라 들어가며 귀신들의 성녀가 팔짱을 끼고 있는 코루루에게 장난스럽게 말을 걸었다.
“코루루 언니와는 다르게 막내들이 한 건 했나 보네요.”
“나도 저런 피라미는 눈 감고 잡을 수 있거든!”
코루루가 억울한 듯 소리치며 뚱한 표정을 지었다. 둘의 장난스러운 분위기와는 다르게 버드맨은 진지한 얼굴로 기절한 남자의 몸에 빼곡히 박혀 있던 깃털을 회수했다.
볼프강과 비슷한 깃털 강화 능력은 그가 마음만 먹으면 어떤 날카로운 칼날보다도 위협적이었다.
“죽었니?”
코루루의 질문이 무색하게도 팔다리가 온통 피투성이인 남자의 몸뚱이가 꿈틀거렸다. 놀랍게도 숨이 붙어 있는 것뿐만 아니라 생명에 지장이 없어 보였다.
차라리 신이 그를 가엾게 여긴다면 버드맨이 실수로 남자의 심장을 꿰뚫어 자비로운 죽음을 맞이할 수 있게 해야 할 정도로 말이다.
“안 죽었어요.”
늘 위태로워 보이던 버드맨의 안색이 오늘따라 훨씬 좋았다. 신재언의 납치로 가장 불안해할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오히려 버드맨의 눈빛에는 점차 생기가 돌아오고 있었다.
학생이었을 때 성적이 상위권이었다더니 총기까지 엿보였다. 아직도 눈밑에 다크서클이 짙게 내려와 있는 채였지만, 다른 형제들이 그러했듯 드디어 우울증을 털고 일어날 듯해 기대가 컸다.
버드맨의 우울증은 다른 형제들도 어찌할 바를 모르게 할 정도로 길고 깊었다. 모두 걱정하는 마음으로 멀리서 지켜보기만 했었는데, 아무래도 이번에 새로 형제가 된 원한이 한 건 해 준 모양이었다.
자신이 신재언의 선택을 받은 이유를 정확히 이해한 원한이 버드맨의 곁에서 챙긴 효과가 드디어 드러나는 듯했다.
“잘했다. 버드맨.”
“네…….”
엔레이드맨이 어깨를 두드리며 칭찬해 주자 버드맨의 뺨이 살짝 상기되었다. 한 건 해낸 막내들의 활약에 분위기가 아까보다도 한껏 부드러워졌다.
그 분위기를 힘입어 체어맨이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막내는 아직 어떤 능력을 각성했는지 모르나요?”
체어맨의 말이 끝나자마자 버드맨과 원한의 고개가 동시에 돌아갔다.
“아…….”
무의식적으로 체어맨의 질문에 대답하려던 버드맨이 한참 고민하다가 자신에게 한 질문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 어색하게 웃었다.
“…제가 아직도 막내라고 생각했어요.”
그 기분을 충분히 이해한다는 듯 귀신들의 성녀가 웃으며 끼어들었다.
“나도 그랬어.”
신재언은 귀신들의 성녀를 받아들인 뒤 자식을 늘리는 기준을 더욱 엄격하고 까다롭게 잡으며 신중을 기했다. 덕분에 귀신들의 성녀는 1년이 넘도록 막내로 지냈었다.
비록 형제들은 서로를 힘으로 누르거나 차별하진 않았지만, 알게 모르게 형제 사이에서는 서열이 존재했다. 그랬기에 당시 귀신들의 성녀는 자신이 오랫동안 막내인 게 불만이었다.
물론 지금은 아래로 둘이나 생겼다며 제법 의젓하게 행동했지만 말이다. 귀신들의 성녀가 변했다면서 코루루가 가끔 불만을 터트릴 정도였다.
“그다음 막내가 들어올 때까지 막내라고 부르니까.”
“하하하.”
원한은 사람 좋게 웃으며 귀신들의 성녀의 말에 반응하다가 체어맨의 질문에 대답했다. 새로 들어온 막내는 다른 형제 중 눈치가 가장 빨랐다.
“네. 아직 무슨 능력인지는…….”
“확실히 느린 편이긴 하군요.”
이번엔 타락한 추기경이 인자한 미소를 띠며 끼어들었다.
“그러나 걱정하지 마십시오. 전지전능하신 아버지께 선택받은 것입니다. 분명 엄청난 힘을 손에 넣었을 터, 의심하지 말고 믿을지어다…….”
타락한 추기경이 신재언을 향해 기도문을 읊기 시작하자 그의 머리 위로 후광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의 눈에서 또다시 피눈물이 쏟아졌다.
“자아, 그러면 이자에게 물어볼 것이 많으니까 돌아가도록 할까요?”
“사특한 자의 죄를 사하여 주시고, 어긋난 길을 간 어린양을 인도해 주시길…….”
어두운 골목길 안에서 문이 달칵 열리는 소리가 들렸고, 그곳에는 핏자국만 덩그러니 남았다.
@
쾅!
단단한 철문이 찌그러지며 그 안으로 괴인이 들어왔다. 현관문조차 종잇장처럼 구겨 버리는 괴인의 앞을 평범한 나무 문이 막을 수 있을까.
괴인은 나무로 된 방문 안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울음소리에 눈을 굴리며 그쪽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쾅!
다시 한번 더 커다란 소리가 들리고 방문이 부서지며 묵직한 소리가 울렸다. 희미하게 들리는 울음소리는 멈추지 않고 계속되었다.
괴인이 부서진 문을 지나 한걸음 들어가 방 안을 살폈지만, 아무것도 없이 텅 비어 있었다. 하지만 어디선가 새어 나오는 울음소리는 여전했다.
괴인의 잔뜩 충혈된 눈이 방 한쪽에 있는 장롱을 향했다. 울음소리의 근거지는 저 장롱 안이었다.
“흑흑… 읍… 으읍…….”
울음을 겨우 삼키려 해 봐도 저도 모르게 새어 나오는 소리까지는 막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괴인의 몸이 더욱 부자연스럽게 꺾였다.
“다크… 카오스님… 다크 카오스님을… 경배해라… 다크 카오스님…….”
“끄읍… 흐윽… 흡…….”
계속해서 새어 나오는 울음소리를 들으며 괴인이 푸른색 손으로 장롱문을 벌컥 열었다.
“……?”
장롱 속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저 작은 라디오 하나가 괴인을 반기고 있을 뿐이었다. 상황 파악이 제대로 안 되는 괴인의 관자놀이에 거대한 총구가 겨누어졌다.
“후우… 이 썩은 빌런 놈들아. 히어로를 얕보지 마!”
탕!
여성이 쏜 총은 괴인의 머리를 정확히 관통했다. 팔다리가 잘리고 목이 떨어져 나가도 도통 죽을 줄 모르는 괴인이 한순간에 쿵 소리를 내며 바닥에 추락했다.
여성은 괴인이 쓰러진 채 더 이상 움직이지 않고 숨을 거두자 총을 팔로 바꾸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자신의 팔을 무기로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가진 A급 히어로 ‘폭발의 저격수’였다.
“이놈들의 약점은 뇌입니다. 뇌를 폭파하면 확실하게 죽는 모양이에요. 다만, 명심해야 할 건 놈들의 뼈는 일반 사람보다도 훨씬 두껍고 질긴 피부를 가지고 있어요. 머리를 한 번에 터트리지 못한다면 빠르게 도망쳐야 할 겁니다.”
괴인의 약점을 알아낸 각국 히어로 협회에서 빠르게 대응책을 퍼트려 주어서 다행이었다. 아니었다면 속수무책으로 당했을 것이다.
한숨을 돌린 여성은 퍼뜩 무언가가 생각났는지 다급하게 발코니 창문을 열어 밖으로 나갔다. 발코니 난간에 어린 소녀가 겨우 매달려 있었다.
잔뜩 겁을 먹었는지 눈물을 뚝뚝 흘리는 소녀를 끌어 올려 품에 안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에게 안겨 훌쩍이던 어린 소녀가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고개를 들었다.
“언니…….”
“아, 이제 걱정하지 마. 부모님은 어디에 있니? 일단… 대피소로.”
그녀의 말을 끊으며 소녀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게 아니라… 하늘이…, …붉어.”
폭발의 저격수가 소녀의 말에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 말대로 하늘이 무척이나 붉었다. 붉은 하늘에 떠 있는 거대한 보름달이 눈을 깜박이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를 상대하기도 벅찼던 푸른 피부의 촉수가 달린 괴인들이 거리를 가득 메운 채 어딘가로 향하고 있었다.
폭발의 저격수는 경악하면서도 혹시라도 괴인들에게 발각될까 두려워 창문에서 멀리 떨어져 구석으로 숨었다.
‘이게…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왜, 왜 갑자기 여기가…….’
이건 분명히 결계였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만, 거대한 결계 안으로 들어온 게 분명했다.
하지만 폭발의 저격수는 이런 괴물들이 득실거리는 결계 내부로 들어올 만한 낌새는 전혀 느끼지 못했다.
그렇다는 건 딱히 어떤 무언가를 목표로 한 결계가 아니라는 것이다. 자신들은 단순하게 이곳에 있었을 뿐인데, 얼결에 휘말린 게 분명했다.
그녀가 덜덜 떨며 어린 소녀를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며 숨을 몰아쉬었다. 호랑이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고 했는데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빌런들에게 살해당하게 생겼다.
공포에 질린 그녀의 귓가로 무언가가 저벅저벅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은밀하게 움직이는 듯한 작은 소리는 공포심으로 오감이 열린 그녀에게는 천둥보다도 큰 소리가 되어 돌아왔다.
그 소리는 점점 그녀가 숨어 있는 곳으로 다가오더니 결국 방의 입구에 도착하고야 말았다.
“헉… 이게 뭐야?”
낯선 남성의 목소리였다. 폭발의 저격수는 이를 악물고 튀어 나가 방 안으로 들어오려는 침입자를 끌어안고 그의 위에 올라타 팔을 총으로 만들고 겨누었다.
“잠깐만요. 항복, 항복. 혹시 히어로예요?”
푸른색 눈동자를 가진 사내가 자신을 덮친 그녀를 보더니 눈을 크게 뜨고 양팔을 들어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