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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근하는 빌런-304화 (304/324)

304화

이제 막 여섯 살이 되었다는 어린 소녀는 침착한 척했지만, 공포에 질려 눈물을 글썽거렸다.

“제 이름은 송은영이에요……. 엄마는 히어로인데, 저보고 집에 얌전히 있으라고 했어요.”

“대피소에 가는 게 좋았을 텐데.”

“엄마는 대피소가 더 위험할지도 모른다고 했어요. 누가 와도 절대 문을 열지 말고 장롱에 숨어 있으라고.”

폭발의 저격수는 소녀의 말에 한숨을 쉬면서 남자를 쳐다보았다. 알고 보니 이 남자 역시 저 붉은 결계에 휘말린 무고한 사람인 듯했다.

그녀는 적대할 수 없는 온화한 기운을 가진 초면인 남자를 저도 모르게 신뢰하게 되었다. 남자는 푸른색 눈동자가 담긴 눈을 휘어 웃으며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이런 괴물들이 도대체 어디서 튀어나올 수 있나 했는데……. 이런 거대한 결계 속에 숨어 있었다니, 히어로 협회에서 애먹을 만했네요.”

폭발의 저격수가 바깥을 바라보며 엄지손톱을 짓씹었다. 지금 당장 이 사실을 히어로 협회에 알려야만 했다.

이윽고 그녀의 시선이 위쪽을 향했다. 거대하고 웅장한 유럽풍의 거대한 저택이 하늘에 둥둥 뜬 채 아주 느리게 움직이는 중이었다.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고 거대한 결계로 움직이는 성이라니. 다크 카오스의 흔적을 히어로 협회에서 찾을 수 없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그래도 이걸 세간에 알리기만 하면 반격의 시작점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기 위해선 일단 이곳에서 무사히 빠져나가는 게 우선이었다.

그녀는 아래에서 돌아다니는 셀 수도 없이 많은 괴인을 눈으로 좇았다.

그녀는 세상을 혼돈으로 물들이려는 다크 카오스의 전력이 어느 정도일지 상상조차 할 수 없어서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사방이 괴인으로 들끓는 다크 카오스의 본거지에 의도치 않게 들어와 버렸어도 그녀는 겁먹은 티를 낼 수 없었다. 민간인 두 명이 자신만을 바라보고 의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괜찮으세요?”

“네… 잠시 현기증이 나서요.”

폭발의 저격수는 파랗게 질린 얼굴을 소녀가 볼 수 없게끔 힘주어 끌어안았다.

일단 이곳에서 제일 겁먹은 사람은 연약하기 짝이 없는 어린아이일 터였다. 그리고 자신은 목숨이 다해도 이 어린 생명을 반드시 지키고 살려야 할 의무가 있었다.

“…움직이는 본거지는 분명 시간이 지나면 이곳에서도 지나가게 되겠죠. 그때까지만 버티면 우리는 구조 요청을 할 수 있어요.”

“결계가 지나간 자리라고 해도 원래 초대받지 않은 사람은 그 안으로 들어올 수 없었을 겁니다. 저들이 그냥 지나가 주길 바라는 수밖에요.”

푸른 눈의 남자가 눈썹을 살짝 내리며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남자는 마치 ‘자신’ 때문에 지금 상황에 휘말리게 된 두 사람에게 죄책감을 느끼는 듯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폭발의 저격수는 성인 남성인 그가 자신에게 의지하게 된 것이 미안해하는 것이라고 제멋대로 판단했다.

“다크… 카오스님… 다크 카오스님…….”

그때, 제법 가까운 곳에서 괴인의 넋 놓은 울음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란 폭발의 저격수는 번쩍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소녀와 푸른 눈의 남자를 데리고 화장실 안쪽으로 도망쳤다.

지척을 지나가는 괴인의 기척에 등골이 송연했다. 괴인 한 명을 상대하는 것도 기습이 아니면 무척 벅찬 일인데, 여기서 소란을 일으키면 아래에 있는 괴인들의 이목이 쏠릴 것이 뻔했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한데 이곳이 정말 다크 카오스의 본거지가 맞는다면, 그 무시무시한 거대 빌런들도 있을지도 모른다.

‘어떻게 해서든 이곳을 무사히 빠져나가야 해……. 하지만 나 혼자서도 힘든데 능력도 없는 민간인들, 그것도 한 명은 어린아이를 데리고 잘 숨어 있을 수 있을까?’

폭발의 저격수는 뒤를 돌아보더니 입술을 꽉 깨물었다. 나쁜 생각이 머릿속을 스친 탓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흔들어 생각을 털어 냈다.

‘이 아이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어도 좋다고 생각한 지 고작 몇 분이나 지났다고!’

그녀는 좁은 화장실 안에 옹기종기 모인 일행을 한 번 돌아보다가 바깥 기척을 유심히 살폈다.

“다크… 카오스님… 다크 카오스님께 경배를…….”

발을 질질 끄는 듯한 치덕거리는 소리가 더욱 가까워졌다. 긴장감과 공포심에 두근거리는 심장이 유난스러웠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괴인은 마치 무언가를 찾는 듯 느릿하게 움직이다가 점점 멀어졌다.

폭발의 저격수는 소리가 들리지 않게 슬그머니 문을 열고 고개만 빼꼼 내밀어 바깥 상황을 살폈다.

팔을 총으로 바꾼 그녀는 아무것도 없는 걸 확인했으면서도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그러다가 푸른 눈의 남자가 말을 거는 순간 숨 막히는 긴장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제 간 것 같죠?”

“네……. 그래도 위험하니까 움직이는 건 자제하도록 해요.”

그녀가 목소리를 낮춰 소곤거리자 남자도 덩달아 숨을 죽였다.

“은영아, 이리 와 무섭진 않니?”

그녀는 두 사람 사이에 껴서 오들오들 떨고 있는 아이를 품에 안고 달래면서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까지 확인한 다음 화장실 타일 바닥에 주저앉았다.

“저… 이름이 어떻게 됩니까? 어쩌다가 여기까지 오게 된 거예요?”

“아, 아직 제 소개를 안 했군요. 죄송합니다. 상황이 이런지라… 제 이름은 신재언입니다.”

고개를 올려 쳐다보는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신재언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남자가 부드럽게 미소를 띠었다.

눈을 휘어 웃는 남자의 미소에 폭발의 저격수는 마음이 조금은 진정되는 느낌을 받았다. 이상하게 그와 이야기하고 있으면 묘하게 안심이 되어 저도 모르게 마음을 풀어 버리고 말았다.

마음이 진정된 덕분인지 패닉 상태에서 벗어난 그녀는 훌쩍이는 은영이를 고쳐 안으며 비장한 표정을 지었다.

‘아… 곤란하네.’

재언은 머쓱하게 웃으면서도 속으로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저 히어로의 표정을 보고 있자니 그녀가 속으로 무슨 다짐을 하고 있는지 알 것만 같았다. 무고한 민간인들을 무사히 데리고 빠져나가야겠다고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사실 폭발의 저격수와 송은영이라는 소녀는 100%, 아니 200% 확실하게 신재언 때문에 말려든 게 분명했다.

결계에 휘말린 두 사람을 마약왕이 그냥 넘어갈 리 없었다. 하지만 재언은 그걸 보고만 있을 수는 없는 일이라 어떻게 정체를 숨기고 움직일 수 있을지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참으로 난감하고 곤란한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차라리 히어로 없이 어린아이만 있었다면 모른 척 데리고 다녔을 것이다.

그렇다면 틈을 보아 은근슬쩍 밖으로 내보낼 텐데. 히어로 앞에서 자신이 빌런들에게 극진한 대접을 받는다면 뭐라고 생각할까.

‘어쨌든 사이가 좋다고 태평하게 생각하지만은 않겠지!’

재언이 여기까지 내려와 지금 이 좁은 화장실에 얌전히 앉아 눈치를 보는 이유는 오늘 아침에 있었던 일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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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시간이 지날수록 방 안에서 지내는 걸 매우 힘겨워 했다. 그건 운동을 못 해서도, 갇혀 있다는 답답함 때문도 아니었다.

“안녕하십니까!”

물론 아침마다 고막을 괴롭게 하는 모리스의 우렁찬 목소리는 사람을 우울하게 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재언을 우울하게 만드는 원흉은 그의 손에 들려 있는 음식이 담긴 트레이였다.

향이 좋은 고급 홍차와 연어 샐러드, 버터에 구운 식빵이 있었다. 재언은 그의 입을 다물게 하기 위해 침대에 어정쩡하게 누워 손을 흔들었다.

뻐근한 어깨를 휘휘 둘리며 빠르게 차려지는 식탁 차림새를 보며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애국심이 강한 입맛은 사흘에 한 번 이상 든든한 쌀밥과 찌개를 먹어야 속이 풀어진다. 그런데 감금된 지 한 달이 가까워지는데 한식은커녕 쌀을 입에도 대지 못했다.

‘새로운 고문 방식이 아닐까?’

재언은 연어 샐러드를 우적우적 씹으면서 중얼거렸다.

“마약왕. 내게 원하는 게 있다면 적어도 앞에 나와서 말이라도 해 보지 그래? 적어도 내가 들어주기는 할 거 아냐.”

이러다가 반찬 투정하는 사람처럼 밥도 안 먹을 거라고 생떼를 부릴지도 모르겠다.

저번에 한식을 먹고 싶다고 했더니 된장찌개에다 토마토 통조림을 넣은 괴식을 마주하고 나선 뭘 해 달라고 요구하는 것도 무서워서 할 수가 없었다.

재언의 신경질적인 중얼거림에 대한 대답은 본인이 아닌 다른 곳에서 나왔다.

“위대하신 분이여. 보스가 어찌 감히 위대하신 분께 무엇을 원하겠습니까?”

모리스가 가슴을 주먹으로 치며 소리쳤다.

“저희는 그저 다크 카오스님께서 우리가 만들어 낸 무대의 연극을 봐주셨으면 하는 겁니다! 곧 무대가 완성됩니다. 그때 손뼉 치면서 재미있게 관람해 주신다면, 그것만으로도 영광입니다!”

마지막에는 아주 격정적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아주 저 같은 놈들만 잘 모아 놨구나!’

“신세계의 시작입니다! 다크 카오스님께서 지배하는 세계가, 진정한 세계가 되는 것입니다! 다크 카오스님께 불충한 녀석은 이 모리스가 사지를 찢어 죽일 것입니다!”

지극히도 사이비 신도 같은 소리를 지껄이며 모리스가 사나이의 뜨거운 눈물을 줄줄 흘리며 감격했다. 대체 왜 저렇게 변했는지 재언은 영문을 몰라서 황당했다.

‘이 자식도 되게 웃기네! 네가 나한테 가장 불충했었거든!’

첫 만남에 황소처럼 들이박았던 건 홀라당 잊은 것일까. 제 좋을 대로 생각하는 모리스를 밖으로 쫓아낸 뒤 재언은 이마를 문지르며 생각에 잠겼다.

‘…혼자선 도망갈 수 없다는 건 잘 알지만, 이렇게까지 마약왕과 만나지 못하리라곤 생각을 못 했어. 꼭두각시를 원하는 걸까? 아니면 아직도 무슨 꿍꿍이가 남아 있는 건지…….’

한참을 곰곰이 생각하던 그가 결심한 듯 고개를 들어 올렸다. 만나러 오지 않는다면 올 수밖에 없도록 만들면 되지. 재언의 답은 간단했다.

‘가출한다.’

감금 중인 사람이 나가는 건 가출이 아니라고 정정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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