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근하는 빌런-305화 (305/324)

305화

‘그전에 이곳에 대한 정보를 많이 알아내야 한다.’

“지금 이 저택은 계속 움직이고 있는 건가?”

“네. 문제가 있지 않다면 계속 움직입니다. 그리고 움직이는 거대한 저택을 교주의 결계가 둘러싸고 있는 겁니다. 그야말로 움직이는 요새이죠.”

모리스의 친절한 설명에 재언은 창문 너머의 하늘을 쳐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옆에서 감격에 벅차오른 고릴라가 부담스러운 눈빛을 보내는 걸 애써 무시하면서 말이다.

검지로 창가를 톡톡 치던 그는 턱을 괴고 고개를 숙이며 불쑥 삐져나오는 웃음을 손바닥으로 가렸다.

‘과연… 마약왕… ‘파도치는 절벽 위 별장’을 따라 하고 싶었던 모양이군. 쉽진 않았겠지. 이런 어마어마한 일을 준비하는데 평범한 장소를 고를 린 없을 테고.‘

하지만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곳은 평범한 사람은 절대로 발을 디딜 수 없는 장소.

검은 비가 내리고, 파도 아래에는 ‘인간이 아닌 존재’가 잠들어 있는 세계의 끝. 찾아올 수 있는 인간이 극히 드문 불굴의 성지였다.

마약왕이 모방하고 싶어도 그런 장소를 찾아내는 것부터가 불가능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자신만의 움직이는 성을 만든 것이다.

게다가 그 편이 마약왕에게는 오히려 나을 수도 있었다. 어느 한 곳에 정착하지 않고 돌아다니니 히어로 협회에서도 마약왕의 근거지를 찾아내기 어려울 테니 말이다.

‘…좋은 건가?’

하지만 그것은 다른 자식들이 마약왕을 찾아내기 더 힘들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안 그래도 스트레스도 심한 버거운 상황에서 희망마저 줄어드는 듯해 눈물이 날 것 같아서 촉촉해지는 눈가를 꾹꾹 눌렀다.

“모리스는 부모님이 살아 계시나?”

사실 재언은 자신이 무의식적으로 모리스에게 말을 놓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재언이 이 사실을 눈치챈다면 어쩌다 분위기를 탄 것이 아무래도 입에 붙은 것 같다며 펄쩍펄쩍 뛸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모리스는 빌런 왕으로서 아랫사람을 대하는 훌륭한 태도라고 생각했다. 재언을 역시 위대하신 분이라고 생각하는 그의 착각은 날이 갈수록 깊어지는 중이었다.

‘…저 자식 뭐 또 이상한 생각하는 것 같은데?’

아무리 이상한 놈이어도 여기 있는 놈 중에선 그나마 가장 정보를 많이 주는 사람이었다. 물론 제대로 된 정상적인 대화를 나누지 못하는 고릴라 같은 놈이지만 말이다.

물어보지 않은 것까지 나불댄 덕분에 알게 된 정보로는 모리스가 마약왕이 데려온 이들 중 가장 마지막이라는 것이다.

그는 처음에 한 번도 만나 본 적 없는 다크 카오스를 맹신하라는 명령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고 했다. 그걸 말하면서도 힐끔 자신을 쳐다봤다.

그런 모리스를 보며 재언은 진심으로 그같이 완벽하게 본능적으로 사는 사람은 처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그의 그런 성격 덕분에 마약왕에게 덜 감화한 것이 아닐까 싶었다.

“네… 살아계십니다.”

모리스가 재언의 질문에 대답한 뒤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덧붙였다.

“하지만 이미 15년 전에 의절했습니다.”

“아하…….”

재언은 창밖으로 시선을 고정한 채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그래도 효도하세요.”

부모에게 효도하라고 덕담하는 악당이라니.

그것도 신재언이 그저 그런 악당이던가. 손가락질 한 번으로 세상과 대치할 수 있는 빌런들의 왕이었다.

그가 진정으로 원한다면 마약왕이 지금 개고생해 가며 이 난리를 피우는 수고로움을 덜었을지도 모른다. 악당의 왕이라는 자가 내뱉는 말치고는 세상 가장 건전한 내용이었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이런 상황을 만든 마약왕이 꼴도 보기 싫지만, 재언은 그의 얼굴을 직접 마주하고 몇 가지 따지고 싶은 게 있었다.

일단 엔레이드맨을 함정에 빠트려 공격했던 점이다. 그것만큼은 절대 용서할 수 없었고 그의 양손을 잘라 ‘손에 닿는 물건의 과거를 바꾸는 능력’을 봉인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리고 마약왕이 이렇게까지 느긋하게 움직이는 이유가 궁금했다. 납치할 때만 해도 세상 급한 척은 다 하더니 몇 주가 지나가도록 찾아오지도 않고 방 안에 가둬 두고만 있었다.

마치 고립된 신재언의 정신을 흔들어 놓고 기운이 빠질 때까지 기다리는 것만 같았다.

“건방지게…….”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나오는 대로 중얼거리던 재언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

그는 방금 자신이 무슨 소리를 내뱉었는지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 그저 이마를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면서 한숨을 삼킬 뿐이었다.

이곳에 납치당한 뒤로 이따금 기억이 혼란스러워지는 상황을 겪은 게 한두 번이 아니어서 기분이 더러웠다.

그러니 마냥 갇혀서 마약왕이 원하는 대로 힘이 빠진 호랑이가 되어 영문도 모르고 끌려다니는 것보단 그가 나타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 작정이었다.

애국심이 넘치는 입맛도 고려해 달라고 부탁할 겸. 겸사겸사.

.

.

.

모리스가 알려 준 정보를 토대로 재언은 ‘움직이는 요새’의 위치를 대략적이나마 파악할 수 있었다. 그가 말한 대로 한동안 넓은 평지만 있었던 바깥 풍경이 지금은 어떤 도시의 상공을 지나는 중이었다.

엔레이드맨만큼은 아니지만, 이 거대한 저택을 움직이게 하는 결계 능력자의 실력이 제법 대단한 모양이다.

모리스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아니, 솔직히 납치당한 쪽은 자신이고 저쪽은 납치범들이다. 미안하게 생각하지 않으려 애썼다.

어차피 여기서 탈출하다가 들켜 봤자 설마 모진 고문을 하겠는가, 밥을 굶기겠는가.

‘죽이기야 하겠어.’

나빠져 봤자 감시만 더 강해질 것이라는 낙천적인 판단이 섰다.

재언은 부모님, 특히 어머니 쪽의 영향을 많이 받아 세상을 긍정적으로 보려고 애썼다. 스스로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됐을 때 좌절하지 말고 부드럽게 넘기라는 말을 뼛속 깊이 새기면서 살아왔다.

재언의 어머니는 하프 하피인 신재언이 세상에서 받는 차별과 모진 눈초리에서 그나마 자유롭게 살 방법을 알려 주었다.

그렇게 마약왕의 움직이는 저택을 유유히 빠져나온 재언은 의도치 않은 상황을 마주하고 당황했다.

자신이 탈출하는 과정에서 히어로 폭발의 저격수와 어린 소녀인 송은영이 휘말렸다는 걸 알고 도저히 긍정적인 사고를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재언의 눈빛이 어둡게 변했다.

‘마약왕은 이 두 사람을 죽이겠지. 내가 살려 보내라고 해도 거짓말을 할 게 분명해.’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 게 인생이라 했던가…….

재언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믿지도 않는 신을 찾았다. 마약왕은 자식 중에서 유일하게 신재언에게 거짓말을 하는 방법을 터득했다.

무엇이든 처음에만 어렵다는 말도 있다. 거짓말도 처음 한두 번만 힘들지 습관이 된다면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내뱉을 수 있다.

평범한 사람도 그러할진대 마약왕에게는 더욱 쉬운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신재언의 앞에선 복종하고 순종적으로 대답하는 것조차도 모두 만들어진 가면일 것이다.

재언이 홀로 생각에 잠겼을 때 바깥 상황을 살피던 폭발의 저격수가 말을 걸었다.

그녀는 흐르는 머리카락을 정리하면서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 재언이 이 두 사람을 어떻게 하면 살릴 수 있을까 고민하는 것처럼 그녀 역시 비슷한 생각인 듯했다.

“…녀석들… 움직일 생각이 없는 것 같아요. 아마 우리의 존재를 눈치챈 것일 수도…….”

둘의 존재를 눈치챈 것보단 신재언이 탈출했다는 걸 알아차렸을 가능성이 더 높았다. 아마 이제부터 눈에 불을 켜고 찾아다닐 테니 한곳에 오래 숨어 있으면 위험할 수도 있었다.

폭발의 저격수 또한 같은 생각을 했는지 품에 안고 있던 송은영을 재언에게 건네주었다.

“한곳에 머물러 있다가는 발각될 확률이 높아요. 당장은 안전해 보이겠지만…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지 모르는 상황이니까 움직여야겠어요.”

재언은 그녀에게서 송은영을 받아 한쪽 팔로 받쳐 들고 고개를 끄덕였다.

능력자인 폭발의 저격수가 돌발 상황에서도 능력을 곧바로 발휘할 수 있도록 자신이 어린 소녀를 보호하는 게 나았다.

바깥으로 나가기 전, 두 사람은 자세를 낮추고 숨을 죽여 소리에 집중했다.

그녀가 예상한 대로 푸른 피부에 촉수를 가진 괴인들이 무언가를 찾는 듯 건물 안에서 정처 없이 돌아다녔고 허공에 둥둥 떠서 움직이던 저택은 우뚝 멈춰 서 있었다.

지금까지는 그들이 있는 층에 괴인들이 아직 돌아다니지 않다는 걸 확인한 세 사람은 조심스럽지만 재빠르게 밖으로 나와 계단을 통해 아래쪽으로 내려갔다. 그 순간, 타이밍도 좋게 바로 위쪽에서 쿵쿵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방금까지 세 사람이 숨어 있었던 곳이었다. 몇 분이라도 더 나가는 걸 머뭇거렸다면 괴인들에게 들켰을지도 모르겠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그들은 계속해서 아래쪽을 향해 내려갔다. 사이사이 괴인이 나타나면 계단 옆 창고나 집으로 들어가 지나갈 때까지 숨어 있는 걸 반복했다.

문이 잠겨 있어도 폭발의 저격수가 손가락을 열쇠 모양으로 바꿔 열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하지만 상황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결계 안의 건물이나 물건이 상할수록 결계 주인이 눈치챌 확률이 높았다. 이건 결계 능력에 관한 기본 정보일 테니 폭발의 저격수도 알고 있을 문제점이었다.

그것을 증명하듯 푸른 피부에 촉수가 달린 괴인들이 포위망을 점점 좁혀 오고 있었다.

설상가상 신재언의 품에 안겨 있던 송은영이 졸린지 두 눈을 깜박이며 칭얼거리기 시작했다. 등을 토닥이며 달래 봐도 어린아이의 졸음은 이길 수 없었다.

폭발의 저격수 뒤를 따라가던 신재언이 결국 입을 열었다.

“아래로만 내려가선 안 될 겁니다. 이 결계는 영역을 나가면 빠져나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능력자가 만든 출구로만 나갈 수 있게 만들어졌을 겁니다.”

신재언이 어렵지 않게 저택에서 빠져나온 것이 그 증거였다. 마약왕이 아무런 대비도 없이 재언을 납치해 데려온 것은 아닐 터였다. 게다가 재언이 느끼기에 이 결계는 지나치게 익숙했다.

자신이 생각한 게 맞다면 마약왕을 돕고 있는 이 결계는…….

“그걸 어떻게 아는 거죠?”

재언의 말을 듣던 폭발의 저격수가 눈을 가늘게 떴다.

“…옛날에 어쩌다가 휘말린 적이 있거든요. 결계 속으로 들어오는 건 쉽지만, 나가는 건 쉽지 않을 겁니다.”

어머니교에 무단 잠입했을 때 겪었던 그 결계와 똑같았다.

“아래로 내려가는 것보단 위로 올라가는 게 나을 거예요. 출구는 분명 저 위에 떠 있는 저택에 있을 테니까.”

어쩌다 보니 또다시 저 저택으로 돌아가게 생겼다. 투명할 정도로 깨끗한 푸른색 눈동자를 바라보던 폭발의 저격수는 가늘게 뜬 눈으로 재언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재언은 그녀의 두 눈에 의심이 어리는 걸 새근새근 잠이 든 송은영을 끌어안고 위쪽을 바쁘게 살피느라 미처 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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