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근하는 빌런-306화 (306/324)

306화

내려왔던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다시 위쪽으로 올라가며 재언은 앞서 걷는 폭발의 저격수의 눈치를 힐끔 봤다. 혹시라도 수상하게 여길까 봐 방금까지 말을 최대한 아꼈다.

이러다가 정말 마약왕에게 다시 붙잡혀 둘에게 문제가 생길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어서 어쩔 수 없이 나섰는데 다행히도 그렇게 큰 의심을 사진 않은 모양이었다.

하긴,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런 결계 함정에 빠지는 것처럼 독특한 경험을 한 번쯤은 해 볼 수 있지 않겠는가.

말도 안 되는 논리로 혼자서 합리화를 하던 재언은 문득 아파트 복도 창문에서 보이는 저택에 시선을 주었다.

‘…갈 수 있을까?’

히어로, 그것도 A급 히어로 한 명이 일반인 두 명을 데리고 돌파할 수 있었다면 그곳이 ‘요새’라 불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마약왕이 그렇게 쉽고 우스운 녀석은 아니었다.

히어로 협회는 물론 신재언마저도 이렇게 애를 먹고 있으니 말이다. 아득한 시선으로 위쪽을 보며 재언은 남몰래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진퇴양난이 이런 기분이구나.’

저래도 문제, 이래도 문제였다. 잡히는 것 또한 시간문제일 것이다.

하지만 자신 때문에 이 사람들이 마약왕의 손에 잡혀 험한 꼴을 당한 뒤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도저히 포기할 수가 없었다.

꽃다운 청춘에 아무 죄 없이 스러져 갈 삶을 못 본 척하기에는 재언의 양심이 너무나도 살아 있었다.

“…나 쉬…….”

“어?”

“오줌 마려워요.”

아이의 작은 목소리가 들리자 고개를 숙였던 재언이 난감한 얼굴로 폭발의 저격수를 쳐다보았다. 때마침 그녀와 눈이 마주쳤는데, 그녀가 화들짝 놀라더니 빠르게 다가와 재언의 품에 안긴 송은영을 낚아채듯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남이 보면 위험한 유괴범에게서 아이를 지켜 내는 히어로로 봤을 테지만 아이는 편안해하기는커녕 오히려 더 울상을 지을 뿐이었다.

“뭐예요?”

“은영이가 화장실에 가고 싶다고 해서요.”

폭발의 저격수가 그 이야기를 듣고 재언에게 등을 보이고 서서 아이에게 작게 물었다.

“화장실이 가고 싶니?”

“네. 오줌 마려워요.”

“…아.”

그녀는 머쓱한 표정으로 재언을 돌아보며 고개 숙였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까 갑자기 멈춰 서서 애한테 말을 거는 모습을 보고 오해했어요. 불쾌했다면 사과드릴게요.”

“아닙니다. ‘이런’ 상황이잖아요.”

재언이 어깨를 으쓱하며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녀를 이해한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이런 상황에서 어디서 나타난지도 모르는 남자를 무조건 신뢰하는 것도 어리석은 선택이다. 재언은 폭발의 저격수가 보여 주는 희미한 경계심이 오히려 마음에 들었다.

“은영아. 화장실 가고 싶어?”

“응.”

“그런데 어쩌지? 여기엔 화장실이 없어. 언니가 가려 줄 테니까 저쪽에서 해결할까?”

일분일초라도 지체하면 위험해질 수도 있는 긴박한 순간에 화장실을 찾아서 볼일을 끝마칠 때까지 느긋하게 기다릴 수가 없었다.

이곳은 빌런들이 우글거리는 결계 안이었고 지금도 위아래에서 괴인들이 움직이는 소리가 둔탁하게 들려왔다. 녀석들이 일반 사람보다도 오감이 둔해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이지, 아니었다면 진작에 들키고도 남았을 것이다.

“…아니야. 참을 수 있어.”

이미 참을 만큼 참아 잔뜩 울상인 얼굴이었지만, 아이는 아파트 복도에서 볼일을 보고 싶진 않았는지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그 마음을 충분히 이해한 폭발의 저격수가 재언을 힐끔 쳐다봤다.

아무리 결계 속에서는 무슨 짓을 해도 현실에 반영되지 않는다고 해도 그것을 이해하기에는 어린아이였다. 지금까지 울며 보채지 않은 게 기특했다.

화장실에 가고 싶다고 떼쓰는 건 아니지만, 재언과 폭발의 저격수는 의젓한 아이의 태도에 마음이 약해졌다.

“일단… 제가 밖에서 망을 보고 있을 테니까 은영이를 화장실에 데리고 가는 건 어떻습니까. 우리가 이쪽에서 아무리 떠들어도 녀석들은 못 들으니까요. 뭐 얼마나 걸리겠어요. 얼른 볼일을 끝내고 다시 움직입시다.”

“네…….”

어쩔 수 없이 설득당한 폭발의 저격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계단 가까이에 있는 집을 하나 건너뛰고 302호의 현관문을 따고 안으로 들어갔다.

재언은 현관문을 완전히 닫지 않고 약 5cm 정도 열어 둔 채 문 앞에 섰다. 이내 폭발의 저격수가 송은영을 데리고 화장실로 들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재언은 고개를 들어 복도 창문 너머의 바깥 풍경을 유심히 쳐다봤다. 어머니교에서도 봤던 붉은색 하늘에 거대한 달.

다크 카오스와 부부 사이라고 떠들어 대던 어머니교의 교주와 마약왕이 무슨 생각으로 손을 잡은 것일까.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재언은 문득 위쪽에서 걸음을 질질 끄는 소리가 갑자기 뚝 끊겨 들리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이상한 기분에 슬그머니 옆쪽으로 눈동자를 굴렸다.

‘으악 깜짝이야!’

하마터면 뒤로 발라당 넘어질 뻔했다. 푸른 피부의 촉수 괴인이 커다란 눈을 깜빡이지도 않고 바로 지척에 서서 재언을 내려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까스로 비명을 속으로 삼킨 재언은 고개를 돌려 괴인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대체 언제부터 여기 있었는지 물끄러미 쳐다보는 시선이 더욱 소름 끼쳤다.

파충류의 비닐이 달린 피부나 푸른색 촉수가 쉼 없이 꿈틀거리는 등이 너무나도 징그러웠다.

“다크… 카오스님… 다크 카오스님을… 찾아라.”

폭발의 저격수가 겪었던 괴인은 이성을 상실해 인간만 보면 본능적으로 달려들어 공격했다는데 지금은 조금 달랐다. 명령받은 일에는 충실하기 짝이 없는 모양이었다.

괴인이 눈알을 굴리면서 중얼거렸다.

“다크… 카오스님… 갑시다… 다크 카오스님을… 찾아라.”

그래도 괴인은 일방적으로 재언을 데려가려고 하거나 공격하지 않고 눈만 상하좌우로 굴렸다.

재언은 아직 화장실에 있을 두 사람을 떠올리며 검지로 입술을 막았다. 그렇게 일단 괴인을 조용히 시키고 복도 저편으로 손가락을 가리키며 괴인에게 떠나 달라고 부탁했다.

참으로 웃긴 상황이었다. 괴인들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그렇게 조심스러워했는데, 막상 들키자 괴인을 쫓아내는 꼴이라니.

“다크… 카오스님을… 찾아라…….”

단어 한마디마다 힘겹게 끌며 말하던 괴인은 결국 신재언이 손가락질하는 방향으로 느릿하게 걸어갔다.

“하지만… 다크 카오스님의… 명령을, 최우선…….”

터벅- 터벅-.

느릿하게 걷는 괴인의 뒷모습을 보며 재언은 기가 찬 듯 헛웃음을 지었다.

‘…마약왕 이 자식이 기고만장해져서 날 놀리네……. 어차피 결계 밖으로는 도망갈 수 없다는 걸 아는 건가? 이거 뭔 늙은 아버지와 놀아 주는 어린 자식도 아니고. 나이도 마약왕이 더 많은데!’

재언은 짜증스러움에 머리를 쥐어뜯었다. 마약왕이 이 정도로 말을 안 들을 줄 전혀 상상도 못 했었다.

능력을 각성시킬 때만 해도 폭력이 싫어 마피아 일가에서 뛰쳐나온 성실한 남자로 보였었다. 억울하게 권력다툼에서 밀려 형제에게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을 잃고 증오하던 남자가 아니었던가.

…하지만, 그것마저 거짓말이었다면?

거짓말과 연기에 능숙한 놈이다.

증오를 각성시켜 주는 능력은 상대방의 증오에 따라 강대한 힘을 얻을 수 있지만, 그와 비례해 신재언에게 복종해야 하는 무언의 힘 또한 강해졌다.

그러니까 능력을 각성해 주는 신재언의 명령에 거역하거나 공격할 수 없는, 일종의 구속이었다. 그런데 마약왕은 신재언을 속이고 거짓말을 했으며 납치까지 저질렀다.

재언이 자신의 능력을 맹신한 탓에 마약왕의 거짓말을 빠르게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그 때문에 무수히 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쳤다.

그의 얼굴이 어둡게 변했다. 추측건대 마약왕은 ‘아버지를 위한 일’이라는 암시를 자신에게 걸어 그것을 맹목적으로 믿게 되어 신재언을 속여 온 것은 아닐까 싶었다.

‘마약왕의 능력을 각성시켜 주는 게 아니었는데.’

세상이 혼란에 빠진 지금에 와서 해 봤자 늦었지만, 하루에도 몇 번이고 하는 후회였다.

그러면서도 재언은 아직 ‘마약왕을 죽이지 않은 것’에는 절실하게 후회하지 않았다.

“…뭐해요?”

“아.”

상념에 빠진 재언을 현실로 끌어올린 건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였다.

화장실에 들어가기 전까지만 해도 잔뜩 울상이었던 송은영은 폭발의 저격수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와 신재언의 품에 안기기 위해 달리려고 했다. 그러나 폭발의 저격수는 그런 아이의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은영아. 언니가 안아 줄게.”

그 말에 재언이 어리둥절한 투로 대답했다.

“하지만 비상사태엔 당신이 나서야 하니 제가 안는 게 좋지 않을까요?”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송은영을 들어 올려 품에 안았다. 누구에게 안기든 상관없었는지 아이는 그녀의 품으로 쏙 들어갔다.

하긴, A급 히어로 정도가 되면 능력에 맞춰 신체도 강화된다. 게다가 폭발의 저격수는 그야말로 온몸이 무기인 사람이었다. 못해도 일반인이나 다름없는 신재언보다 힘도 좋고 튼튼할 것이다.

그래도 자신이 드는 게 낫지 않나 의문이 들었지만, 재언은 어정쩡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혼자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데, 아까는 느끼지 못했던 불편한 시선이 뒤쪽에서 느껴지기 시작했다. 묘하게 기분이 찝찝해지는 시선이었다.

그것은 위쪽까지 올라오고 나서 더 이상 탈출구를 찾지 못했을 때 더욱 커졌다.

“더 이상 갈 곳이…….”

막다른 길에 몰린 재언은 3초라는 시간 동안 열 번 정도 고민에 빠졌다. 어찌어찌 괴인들을 멀리 보내 놓고 마약왕의 저택으로 다시 돌아가는 길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당연하다. 마약왕이 느긋하게 재언이 되돌아갈 길을 짜고 있었던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쉽지 않은 게 더 이상하다.

재언이 뒤를 돌아보니 폭발의 저격수가 눈을 굴리며 신음을 흘리는 게 보였다. 무수히 많이 고민하던 재언은 결국 그녀에게 손짓했다.

“저거 보여요?”

“…네?”

“저쪽에. 뭔가 천 같은 게 나풀거리지 않습니까?”

재언이 가리킨 곳은 허공에 둥둥 떠 있는 저택의 어느 한 곳이었다. 창문 밖으로 길게 늘어져 나온 무슨 줄 같은 것이었다.

저건 재언이 탈출하기 위해 이불을 엮어서 던진 것이었다. 잘 보이지 않지만 어떻게 보려고 하면 볼 수 있을 테니 심각하게 의심하진 않을 것이다.

재언은 되도록 속 편하게 생각하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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