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근하는 빌런-307화 (307/324)

307화

재언이 우연히 발견한 척한 수상하기 짝이 없는 천을 타고 세 사람은 올라가기로 했다.

‘모리스를 쫓아내고 바깥 상태를 살펴 가면서 비싸 보이는 침대 시트와 이불을 몽땅 가지고 탈출에 성공한 건데… 여기를 다시 오게 된다니 세상 참…….’

속으로 투덜거리며 재언은 어색하게 만들어 놓은 자신의 작품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저는 은영이를 업고 올라가야 하니 재언 씨가 먼저 올라가 주세요.”

원래는 히어로가 먼저 앞서야 하는 것 아닌가. 무고한 시민을 총알받이로 만들어도 되나.

만약 재언이 정말로 우연히 연루된 무고한 시민이었다면 기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재언은 이 로프가 어디로 이어지는지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오르는 도중에도 빌런들의 공격을 받지 않는단 것 또한 마찬가지였다.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재언은 여기를 먼저 오르겠다고 하는 것과 겁을 먹는 것 중 무엇을 해야 평범한 사람처럼 보일지 서글픈 고민에 잠겼었다.

이내 신재언이 먼저 출발하고 그 뒤를 이어 폭발의 저격수가 송은영을 등에 업은 채 따라왔다.

천 로프를 타고 올라가는 내내 재언은 자신이 운동을 열심히 해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남이 보고 있는데 끙끙거리면서 오르면 모양새가 얼마나 꼴사나울지 상상만 해도 끔찍했기 때문이다.

물론 폭발의 저격수가 일반인이 끙끙거리며 올라간다고 꼴사납게 생각하진 않겠지만, 재언은 상당히 신경이 쓰였다.

한참 동안 벽에 바닥을 딛고 위로 올라가던 중 재언은 아래쪽에서 갑자기 유리 깨지는 소리에 깜짝 놀라 움직임을 멈췄다. 굉장히 청량하게 울리는 쨍그랑 소리였다.

재언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래를 살펴보자 방금까지만 해도 뒤를 바짝 쫓아 올라오던 폭발의 저격수와 송은영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폭발의 저격수?”

손에서 힘을 빼 살짝 아래로 내려가니 멀쩡했던 창문 중 하나가 깨져 있는 게 보였다. 아무래도 여기로 들어간 모양이다.

재언은 고개를 들어 위쪽을 살펴본 뒤 그녀가 들어갔을지도 모르는 깨진 창문 안쪽으로 들어갔다. 혹시나 올라가던 중에 괴인의 습격을 받은 건 아닐지 걱정스러웠다.

다행히 그건 아닌 듯 폭발의 저격수가 넓고 한산한 복도에 숨어 경계 중이었다. 그런 그녀의 옆으로 다가간 재언이 불만 어린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왜 여기로… 말이라도 해 주시지 그랬어요. 하마터면 놓칠 뻔했잖아요.”

진심으로 걱정스러운 마음에 건넨 말이었는데, 어떤 식으로 들은 것인지 A급 히어로의 두 눈에 공포심이 가득했다.

‘어라? 아까보다 나를 보는 시선이 더 안 좋아진 느낌인데? 에이, 설마 아니겠지.’

“…로프의 목적지가 너무 보란 듯이 있어서 함정이라고 생각했어요. 부른다고 했는데 소리를 내면 빌런 놈들에게 들킬까 봐…….”

“괜찮습니다. 제가 그래도 잘 눈치채고 쫓아왔으니까요.”

창을 깨는 게 더 소란스럽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은 곧바로 이런 상황이니 정신없어서 그런 것이라고 이해하며 넘어갔다.

지금 재언에게 가장 중요한 건 이 두 사람의 안전이었다. 본의 아니게 말려든 무고한 사람들이 마약왕에게 붙잡히는 건 두고 볼 수가 없었다.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재언은 먼저 어딘가로 향하는 폭발의 저격수의 뒤를 쫓았다.

한편으론 처음 만났을 때보다 말수가 확연히 적어진 그녀가 마음에 걸렸다. 목숨이 달린 극한의 상황에서는 시간을 끌수록 공포에 잠식되기 쉽다.

재언은 신음을 흘리며 턱을 쓰다듬었다.

‘빨리 두 사람을 보내야 할 텐데……. 어떻게 보내야 할지 도통 감이 잡히질 않네.’

혼자 그런 생각만 한 것 같은데, 자기도 모르게 입 밖으로 말이 새어 나간 모양이었다.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는지 폭발의 저격수가 뒤를 돌아봤다.

“아… 죄송합니다. 요즘 혼자 있던 시간이 많다 보니까 저도 모르게 혼잣말이 늘었나 봐요.”

“…네.”

두 사람은 그렇게 저택 내부를 말없이 살폈다.

평범한 복도처럼 보이지만, 한참을 걸어도 출구가 안 보일 정도로 비정상적으로 길고 어두웠다. 마치 어머니교 교단에 숨어들어 갔을 때만큼이나 이질적인 느낌이 강했다.

하긴, 붉고 눈이 달린 달을 좋아하는 교주의 취향이 심상치 않다는 것만은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폭발의 저격수. 이쪽으로 와 보세요.”

“이건…….”

재언이 멈춰 선 방의 문은 다른 것들보다도 넓고 화려했다. 문에 얼굴을 바짝 대고 귀를 기울이자 기계 돌아가는 소리만 들릴 뿐 사람의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폭발의 저격수도 문 쪽으로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그녀가 다가오는 걸 확인한 재언이 조심스럽게 손잡이에 손을 가져다 댔다. 잠겨 있지 않아 달칵이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안쪽이 상당히 어둡네요…….”

물소리일까. 아니, 기계 소리인 것 같았다.

재언이 문을 열고 안쪽으로 들어가자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폭발의 저격수도 그의 뒤를 쫓아 들어왔다. 굉장히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손을 더듬거리자 유리같이 매끄러운 무언가가 만져졌다.

이런 곳에 있다가 습격당하면 아무것도 못 하겠다 싶어서 다시 밖으로 나가자고 말하려 했다. 그때, 인적이 있으면 자동으로 점등되는 쓸데없는 시스템으로 만들어진 방인지 불이 연속적으로 켜지기 시작했다.

갑작스럽게 시야가 환해져 정신 차리지 못하던 재언과 폭발의 저격수는 깜짝 놀라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 이건!”

그들의 앞에 있는 것은 무수히 많은 시험관이었다. 위아래로 가득한 시험관 안에 정체 모를 용액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시험관 안에 용액만 차 있는 게 아니었다. 시험관 하나하나 비어 있지 않고 푸른 피부의 괴인이 용액 안에 담겨 있었다.

입구에서부터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푸른 피부의 괴인이 아닌 일반 사람들이 보였다. 마약왕은 정말로 일반인을 납치해 실험체로 쓰는 끔찍한 짓을 저지르고 있었다.

‘그동안 괴인을 이렇게 만들었구나.’

일반인을 납치해서 괴물로 만들었으니 괴인들이 정상적인 사고를 하지 못하고 고통에 잠식된 듯 행동했던 것일까.

실체를 알게 된 재언이 차마 끔찍한 광경을 더 바라보지 못하고 눈을 돌렸다. 자신의 원죄와 마주하는 기분이었다.

자신의 정 때문에 이렇게 많은 이들이 마약왕의 되지도 않는 목적 때문에 끔찍한 몰골로 변했다니…….

재언이 착잡한 얼굴로 고개를 떨궜을 즈음, 뒤에서 철컥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자 공포로 가득한 표정으로 재언에게 총을 겨누고 있는 폭발의 저격수가 보였다.

“무슨 짓이죠?”

“…모르는 척 시치미 떼지 마……! 당신, 빌런이지?”

“전… 그냥 평범하게 살고 싶은 사람이에요. 폭발의 저격수, 당신이 무슨 오해를 했는지 모르지만…….”

재언은 빌런이냐고 직접적으로 물어 오는 그녀의 말에 멈칫했지만, 나름대로 침착하게 대답했다. 빌런이 아니라고 확실하게 말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가 참으로 서글펐다.

“말장난하지 마! 내가 눈치 못 챘을 줄 알아? 어쩐지 이상하다고 했어. 이런 곳에… 그리도 태연한 얼굴로 돌아다니는 일반인이 있을 리 없지.”

폭발의 저격수는 신재언을 완전히 빌런이라고 생각한 듯 소리쳤다.

“그렇게 생각하는 근거는요?”

“그렇게까지 밑밥을 깔아 두고 모르기를 바라는 게 더 이상한 거 아닌가? 그리고… 나는 봤어. 당신이 저 괴물들에게 명령을 내리는걸. 나와 이 아이를 여기까지 끌고 온 이유까지 알아 버렸다고! 당신들, 일반인들을 상대로… 이런 끔찍한 실험을 하는 중이지?”

상황이 매우 곤란해졌다. 재언은 진심으로 이 일에 휘말린 두 사람에게 악감정이 전혀 없었고 무사히 바깥으로 탈출하게 도와주고 싶었다.

“하아…….”

결국, 양팔을 들어 올린 재언이 항복의 제스처를 취하며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폭발의 저격수. 잘 생각해봅시다. 당신은 내 얼굴을 봐 버렸어요. 그런데 여기서 저보고 빌런이냐고 물으면… 당신의 처지가 어떻게 되겠어요. 우리 살아서 여기를 나가야 해요. 히어로는 아니지만 적어도 여기 있는 빌런들과 한패는 아닙니다. 믿어 주세요.”

재언의 말투가 마치 폭발의 저격수를 설득하려는 듯 나긋나긋했다. 그녀마저 이런 반인륜적인 일을 겪게 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그녀가 자신을 빌런이라 생각하고 적대한다면 모든 계획이 어긋날 것이다.

제발 그녀가 유연하게 넘어가 주기만을 바랐다. 재언은 자신을 향해 정확히 겨눠진 총구를 보면서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그렇게 빌런 같나……?’

얼굴이 험상궂게 생기진 않았으니 외모적으로 빌런처럼 생긴 건 아닐 테고 그녀도 처음엔 나름 호감을 보였던 것으로 기억했다. 그러면 행동이나 말투에서 무슨 느낌을 받은 걸 텐데 재언은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나 정도면 나름 평범하지 않나?’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