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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근하는 빌런-308화 (308/324)

308화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는 묘하게 사람을 안정시키는 힘이 있었다. 손가락으로 총을 만들어 신재언에게 겨눈 폭발의 저격수가 몽롱한 표정을 지었다.

“약속해요. 우린 여길 무사히 빠져나갈 거예요.”

생각해 보면 이곳에서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다고 장담하는 것 자체가 충분히 수상했다.

그래, 이 남자는 애초에 숨길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기다랗고 화력이 강한 장총을 액세서리처럼 들고 겁에 질린 사냥감들을 덫까지 몰아가는 사냥꾼의 여유일지도 모른다.

신재언이 들었다면 억울해서 펄쩍 뛸 만한 생각을 이어 가던 폭발의 저격수는 다른 의미로 머뭇거렸다.

만약 자신 혼자 눈앞의 빌런과 대항했다면 절대로 타협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뒤에는 영문도 모른 채 두려움으로 벌벌 떠는 송은영이 뒤에 있었다.

아이만은 무사히 돌아가게 해 주고 싶어서 어떻게든 따돌려 보려고 했지만, 이 남자는 뒤처지지도 않고 끈질기게 쫓아왔다. 자신들을 쉽게 놓아주지 않으려는 셈이다.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갈등을 읽은 것일까, 신재언의 표정이 더욱 부드럽게 풀어졌다.

사실 한껏 여유로운 표정을 짓고 있지만, 그의 속은 새까맣게 타들어 가는 중이었다. 이렇게 시간을 지체해 봤자 좋을 게 없었다.

호랑이 소굴 깊숙이 들어와서 이렇게 나 잡아먹어 달라고 뻗어 있는데 어떤 호랑이가 못 본 척 지나갈까.

일단 이 결계만 빠져나가면 엔레이드맨이 곧바로 자신을 찾아낼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마약왕이 또다시 어떤 수를 쓰지 않는 이상 신재언에게는 손끝 하나 댈 수 없다.

그리고 엔레이드맨은 두 번이나 함정에 빠질 만큼 멍청하지 않았다.

“일단 여기에서 무사히 빠져나가는 것만 생각합시다. 전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나쁜 사람이 아니에요.”

신재언이 다시 한번 힘주어 말하자 폭발의 저격수가 천천히 총구를 내렸다. 하지만 그가 마음을 놓고 부드럽게 웃는 순간 그녀가 결심한 듯 굳은 얼굴로 총을 다시 올려 겨누었다.

깨달을 새도 없이 총구에 불이 붙었다. 히어로명에 걸맞게 폭발하는 듯한 소리가 방 안에 크게 울리는 것과 동시에 신재언의 미간을 향해 총알이 날아왔다.

‘아니! 내가 진짜 억울해서 못 살겠네! 여기서 이렇게 총을 쏴 버리면 나약한 시민인 나는 죽을 수밖에 없지! 낳지도 않은 못난 불효자 놈 때문에 허망하게 죽는 건가……!’

그 찰나의 시간 동안 주마등처럼 재언의 눈앞에 그동안의 삶이 펼쳐졌다.

‘자상하고 엄한 아버지, 상냥하고 내성적이지만 듬직했던 어머니. 아아, 당신들의 불효자는 이렇게 갑니다.’

재언이 기도 아닌 기도를 하고 있을 때, 무언가 터지는 소리가 연달아 들렸다. 그게 자신의 머리는 아니라는 점을 깨달은 재언이 눈을 게슴츠레하게 떴다.

푸른 피부의 괴인이 그의 앞을 막아선 채 서 있었다. 한 명이 아니었다. 다섯 명의 괴인이 신재언의 앞에 일렬로 줄을 서서 자신의 몸을 방패처럼 총탄을 막아 냈다.

폭발의 저격수가 쏜 총알은 괴인의 강철같은 피부를 뚫고도 맨 앞에 선 세 명의 괴인을 꿰뚫었다. 이윽고 구멍이 뚫린 푸른색 피부가 천천히 재생되었다.

“…하, 이러고도 누가… 편이 아니라고?”

폭발의 저격수가 창백한 얼굴로 숨을 헐떡였다. 그녀의 얼굴은 혈색이 모조리 사라져 시체처럼 파랗고, 공포심으로 숨을 제대로 쉬지 못했다. 송은영을 뒤로 숨기는 손이 불쌍할 정도로 떨렸다.

재언이 고개를 돌려 옆을 살펴보니 실험관들이 깨져서 용액이 줄줄 흘러나오고 있었다. 강하게 느껴지는 알코올 냄새에 인상이 절로 찌푸려졌다.

비어 있는 실험관은 정확히 다섯 개였다. 괴인들은 신재언의 신변에 이상이 생긴 것을 감지해 자력으로 실험관에서 튀어나와 방패를 자처한 것이다.

이걸 보고도 신재언이 그들과 무관하다는 말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재언이 난감함에 입술만 달싹이던 때, 위쪽에서 낯익은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겁이 없는 놈이구나. 감히 아버지께 그 더러운 총구를 겨누다니. 위대하신 나의 아버지께서 봐주시는 것 같기에 계속 보고 있자니……. 도를 넘어 버리는군.”

엄하게 다그치는 목소리 안에는 숨기지 않은 광기가 흘러나왔다.

재언은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자신을 납치한 첫날 빼고는 한 번도 얼굴을 비춰 주지 않았던 마약왕이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우아하게 웃고 있었다.

신재언의 연한 눈동자보다 더 짙은 푸른색 눈동자를 가진 마약왕이 재언과 눈이 마주치자 더욱 짙게 미소를 띠었다.

“알례리……?”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다급하게 총구를 겨눈 폭발의 저격수가 아연실색하며 그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히어로 협회의 후원자인 당신이 왜…….”

폭발의 저격수는 그의 얼굴을 잘 알았다. 히어로 협회의 최대 후원자, 거물 알례리. 명문 베네딕트 가문의 주인인 그가 히어로 협회에 후원한 금액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그가 실질적인 협회의 지배자라 해도 무방했다. 그런 거물이 엄한 표정으로 이런 곳에 서 있다니, 그녀의 얼굴이 이상하게 변했다.

그가 엄한 표정을 지은 대상이 오로지 자신을 향해서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알례리의 시선이 신재언을 향한 순간 그의 눈빛이 마치 선물을 숨겨 둔 개구쟁이 꼬마처럼 반짝였다. 그러고 보니 알례리가 신재언을 향해 ‘아버지’라 불렀다.

“어리석은 히어로 같으니라고.”

알례리가 폭발의 저격수를 바라보며 시리게 웃었다.

“난 너 같은 멍청한 뜨내기를 알고 있지. 혼자만의 고고한 신념에 빠진 히어로를 말이야. 자신의 정의만이 세상을 대변하는 줄 아는 착각 속에 빠진 녀석들을 잘 알아. 세상 물정 모르는 아가씨. 그대로 아버지의 손을 잡았다면 이 마약왕 또한 손을 댈 수 없었을 텐데…….”

“알례리!”

신재언이 기겁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러자 신재언을 바라보는 알례리의 얼굴이 굉장히 슬퍼하는 듯한 표정으로 변했다.

하지만 신재언이 마약왕을 올려다보고 있고 마약왕은 신재언을 내려다보는 구도는 변하지 않았다.

“마약왕……?”

신음처럼 폭발의 저격수가 중얼거렸다.

“…다크 카오스의… 여덟 자식 중 한 명인 마약왕?”

신재언은 속으로 신음을 삼킨 것과는 반대로 공포에 사로잡힌 그녀의 목소리 떨림은 더욱 심해졌다.

“그러면… 그러면… 당신이…….”

폭발의 저격수는 실성한 것처럼 몇 번이고 같은 말을 반복했다.

그리고 결국 그녀는 미쳐 버렸다. 그녀의 머릿속을 잠식한 공포가 허용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 정신을 잡아먹은 것이다.

광증에 먹혀 실성한 듯 웃음을 터트리는 그녀를 보며 재언은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말려든 것은 전적으로 자신의 잘못이었다. 아니, 근본적으로 마약왕을 각성시킨 것 자체가 단추를 잘못 낀 일이었다.

재언은 걸음을 옮겨 미쳐 버린 폭발의 저격수 뒤에 있던 송은영의 손을 꼭 잡은 뒤 작게 중얼거렸다.

“정말 미안합니다. 폭발의 저격수… 이렇게 휘말리게 해서. 계속 두려우셨군요. 당신도 히어로이기 전에 사람이니까……. 제가 할 수 있는 말은 미안하다는 말밖에 없어요. 당신은 정말 오랜만에 만난 제대로 된 히어로였는데.”

그녀는 혼자 도망치거나 숨을 수 있음에도 그러지 않았다. 신재언과 어린 소녀를 끝까지 책임질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재언의 정체를 의심하면서도 아이가 불안해할까 봐 티도 못 내고 도망치지도 못했다. 그건 그녀가 바로 히어로였기 때문이다.

그런 그녀가 재언은 미안하고 안타까웠다.

“만약 사후세계가 있다면 당신은 천국에 갈 거예요. 그리고 전 지옥에서 당신을 마주쳤을 때… 다시 사과하겠습니다.”

신재언이 말을 마친 뒤 그녀의 귓가에 무언가 귓속말을 하자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실성한 듯 웃으며 그녀는 자신이 만들어 낸 총구를 자신의 머리에 가져다 댔다.

어설프게 웃는 얼굴이 괴상했다. 그녀를 바라보는 신재언의 푸른 눈동자는 맑고 푸르른 바다를 떠올리게 했다.

아니, 바다인가? 아니면 바다를 품고 있는 세계?

“…언니 뭐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는 어린 소녀가 의문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사실 그 질문조차도 아이치고는 많이 참다가 던진 편이었다.

갑자기 폭발의 저격수와 신재언이 대치하게 되었을 때조차도 입을 꾹 다물고 있었던 아이는 더욱 이상하게 흘러가는 분위기를 감지한 듯했다.

재언은 말없이 허리를 숙여 아이를 품에 안고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아이가 뒤를 돌아보지 못하게 손바닥으로 머리를 꾹 눌렀다.

폭발의 저격수는 무리였지만, 이 아이만큼은 이곳을 무사히 나갈 때까지 책임질 생각이었다.

농락당한 히어로.

기세등등하게 신재언을 내려다보며 웃고 있는 마약왕.

그리고 그런 마약왕에게 잡힌 다크 카오스.

마약왕은 손바닥을 펼쳐 살짝 앞으로 내밀었다. 원근법 때문에 신재언이 자신의 손아귀에 있는 듯한 광경이 눈에 보였다.

이윽고 자신의 머리를 겨누고 있던 폭발의 저격수 손에서 불꽃이 터졌다.

“하… 하하…….”

마약왕은 희열에 차올라 작게 웃다가 미친 듯이 웃어 젖히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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