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9화
상상이라도 해 본 적이 있던가.
저 존재를 이 손아귀에 넣겠단 상상을 말이다.
물론 마약왕 알례리는 단 한 번도 아버지를 손에 넣으려고 한 적은 없었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불충을 저지르는 듯한 공포를 느끼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하는 일은 오로지 아버지를 위함이라고 되뇌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않는 눈앞의 신재언에게 당장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당장이라도 모든 것을 내려놓고 포기할 테니 다시 한번 더 사랑을 달라고 갈구할 것만 같았다.
그렇다. 알례리는 신재언을 너무나도 사랑했다. 성적으로 욕망하는 마음이 아닌 그야말로 티끌 한 점 없는 순수한 사랑이었다.
부모가 자식을, 자식이 부모를 사랑하는 것 이상으로 아무 조건 없이 섬기고 숭배하고 싶었다. 신을 직접 목도한 종교인처럼 말이다.
“나의 사랑하는 아버지… 위대하신 아버지께서 지금 이 모든 상황을 석연치 않아 한다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불효하는 이 마음이 찢어질 것만 같습니다. 하지만 저는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 이 모든 것은 오로지 아버지를 위한 일입니다.”
알례리는 들어 올린 손 그대로 주먹을 그러쥐었다. 그러자 손바닥 안에 서 있는 신재언의 모습이 주먹 안에 갇힌 것처럼 보였다.
“아버지를 위해서입니다. 신세계를 ‘다시’ 아버지께 돌려드린 뒤 저는 그대로 죽어도 상관없습니다.”
그러나 알례리가 천천히 손을 내리자 엄한 얼굴로, 분노를 숨기지 않은 신재언의 표정이 선명하게 보였다.
“누가 그런 걸 바란댔어? 난 신세계 따윈 원하지 않아! 그냥 평범하게 살고 싶어.”
“그러면!”
방금까지도 알례리의 얼굴에 떠 있었던 냉정하고 차가운 미소가 잔뜩 일그러졌다.
“진정으로 평범하게 살고 싶으셨다면… 왜 저희를 만들었습니까?”
그 말에 신재언의 심장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왜 저희의 힘을 각성시켜 주신 겁니까. 정말 평범하게 살고 싶으셨다면 그러지 말았어야죠. 우리를 만들지 말았어야지요, 아버지! 이 힘은 오로지 아버지만을 생각하게 만듭니다. 당신을 사랑하게 만들고 위대한 업적의 발자취를 어떻게든 따르고 싶게 만듭니다.”
알례리의 말에 신재언은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어서 입을 꾹 다물었다.
‘증오를 각성시켜 주는 능력’은 오로지 증오의 크기만으로 능력을 각성시킬 수 있다. 죽을 것처럼 강한 증오를 느낄수록 강한 능력을 손에 넣는다.
그들이 가진 힘의 원천은 결국 증오. 과연 그토록 강한 증오를 가진 자들이 힘을 손에 넣었을 때 가슴속의 증오를 풀어내고 그 힘으로 사회를 위해 움직일 수 있을까.
정답은 아니다. 그건 신재언이 가장 잘 아는 점이었다. 들끓는 분노를 해소하지 못해 절망에 빠지고 힘을 갈구하게 된다.
해소할 수 없는 증오를 힘으로 각성시켜 준 신재언에게 ‘신’, 그 이상의 감정을 느끼게 되는 건 당연했다. 결코, 평범해질 수 없다.
“…내가, 너희를 그냥 두었어야 했다고 말하고 싶은 거냐.”
알례리가 말한 것은 마치 자식이 부모에게 ‘나를 왜 낳았냐.’라고 따지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심장에 비수가 꽂히는 듯한 느낌에 재언의 표정이 희게 질렸다. 알례리는 그런 신재언의 반응에 피를 토하는 괴로움을 느꼈다.
“아버지… 아아, 나의 위대하신 아버지. 그러지 마셨어야죠…….”
알례리는 미쳤다. 정의의 집행관에 의해 제대로 정리하지 못한 남은 복수의 총알 때문일까.
오갈 곳 없는 증오의 마지막을 시원하게 해결하지 못해서? 아니, 사실 그는 본디 그런 남자였다.
지독한 열등감을 마음속에 품고 살아온 알례리는 누가 봐도 더 나은 후계자감인 형 레비아노에게 밀려 살아왔다.
레비아노가 폭력적이고 무자비하다는 알례리의 주장과는 달리 그는 인근 주민들에게 평판이 좋고 쓸데없이 살인을 저지르지 않았다. 부하들 사이에서도 인망이 두텁고 사업 수완도 좋았다.
처음부터 알례리가 낄 자리 따윈 없었다. 알례리는 폭력적이고 불법적인 일을 저지르는 마피아 가문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핑계로 집을 뛰쳐나간 것뿐이다.
“…내가 한 가지 의문이 들었는데… 마약왕, 너 정말 네 복수를 위해 그때 그 가족들을 죽인 게 맞아? 네 가족을 죽인 마약중독자는… 정말 네 형이 청부한 게 맞는 거야?”
레비아노가 알례리와 그의 가족들을 해코지하려 했던 것은 사실일까.
그가 원한다면 손짓 하나로 쥐도 새도 모르게 없애 버릴 수 있는, 보잘것없는 동생 때문에 그렇게 귀찮은 일을 꾸며 가면서?
“글쎄요… 하지만 중요한 건 제 사랑하는 아내와 첫째 아들이 비참하게 죽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직간접적으로 그 일엔 어떻게든 레비아노가 끼어 있겠지요.”
아무리 자신이 평범하게 살고 싶다고 소리쳐 왔지만, 신재언은 자식들을 각성시킨 것을 진정으로 후회한 적은 없었다.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채 피 흘리고 있던 그들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섬 노예가 되어 비참하게 살던 엔레이드맨도.
사랑하는 이를 잃고 몸담은 곳에서 배신당해 목숨을 위협받았던 타락한 추기경도.
말도 안 되는 복수에 휘말려 온몸이 난자당했던 조각난 장난감도.
온몸이 불탔던 체어맨과 코루루도.
억울하게 하나뿐인 동생을 잃었던 귀신들의 성녀와 지독한 학교 폭력에 시달려 몸과 마음이 너덜너덜해진 버드맨도.
그리고 버드맨을 위해 원한을 각성시켜 줄 때조차도 신재언은 전혀 후회하지 않았다. 하지만 신재언은 지금, 진심으로 마약왕의 각성을 후회하는 중이었다.
알례리의 욕망은 잃었던 가족을 되찾는 것. 그것은 과거를 돌릴 수 있는 능력으로 각성했다.
하지만 알례리는 정해진 운명을 바꿀 수 없었다. 그 때문에 죽을 운명이었던 그의 가족들을 살리지 못했다.
말문이 막혀 입을 꾹 닫은 신재언을 내려다보며 알례리는 손가락으로 흐르는 눈물을 찍어 내다가 손을 들어 올렸다.
이윽고 그가 손가락을 튕기자 뒤쪽에서 누군가가 걸어 나왔다. 다크 카오스를 보고 환하게 웃는 누군가는 지오반니였다.
또한, 반대편에서 무언가를 질질 끄는 소리가 들렸다.
신재언이 고개를 돌리자 익숙한 얼굴이 드러났다. 관을 등에 업고 낄낄거리며 모습을 드러낸 이는 데스 메이커였다.
그는 ‘완벽한 존재’를 만들기 위해 치료하는 상대의 육체를 탐하는 의문스러운 존재였다. 그가 인간인지조차 의문이 들 정도로 그의 행적은 신재언조차 파악할 수 없었다.
그런 이가 알례리에게 붙다니.
“크크크, 아름다운 어둠의 군주시여. 드디어 당신의 새로운 육체가 완성되었습니다. 다시 파괴를 일삼고 세상을 어둠으로 물들이고… 그리고 ‘그들’을 다시 깨어나게 하는 겁니다. 이 지구 심해에 가라앉은 당신의 존재를요.”
데스 메이커가 들고 있던 관이 서서히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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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하늘. 눈이 달린 붉은 달이 떠오르는 기묘한 공간.
그런 하늘 위에 떠 있는 저택의 가장 높은 곳. 각자의 기둥에 서서 내려다보고 있는 시선이 너무나도 서늘했다.
시선들이 한데 모인 아래쪽에는 한 사람이 고개를 숙인 채 서 있었다. 사실 한 사람이라기엔 너무나도 기묘하고 끔찍했지만, 익숙한 듯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남자와 여자의 머리가 억지로 이어 붙인 그들은 여자이기도, 남자이기도 했다.
“수치도 모르는…….”
차가운 목소리가 커다란 공간을 갈랐다. 그러자 얼굴을 포함한 전신을 모두 가린 로브를 입은 여성이 혀를 차며 비난하는 말을 덧붙였다.
“저들은 힘이 분산되어 있으니까요. 무대를 차리기엔 한참 모자랐던 것이겠죠.”
여성의 목소리를 이어 덩치가 상당하고 목소리가 큰 남자가 팔짱을 끼며 소리쳤다.
“‘위대하신 그분’을 모시기엔 한참 부족하군!”
“저들은 두 명이 하나라 힘이 분산되어 약하니까요. 그렇다고 큰 소득 없이 다쳐서 오기까지 하다니……. 역시 ‘위대하신 그분’께서 직접 고른 자들인가.”
각자 한마디씩 말을 얹을 땐 조용하던 차가운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츠유, 로에즈. 너희같이 입만 산 놈들은 허세로 약함을 포장하다가 일을 그르치기 마련이지. 보스의 명령이다. 지금부터 한동안 부르기 전까지 자숙하고 있어라. 그런 너희라도 우리의 계획엔 필요하기 때문에 처분하진 않겠다.”
으득, 입술을 짓씹는 소리가 들렸다. 넝마가 된 입술에서 피가 흐르기 시작했지만 모여 있는 이들 중 누구도 동료의 굴욕적인 표정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동료애는커녕 연대감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들이 다 같이 모여 거대한 일을 도모하는 것에는 큰 지장이 없었다.
자신들이 계획하는 무대는 워낙에 거대하고 위대했으니까.
“그러면 우리는 계속 정진하도록 합시다. 언젠간 이뤄질 팔망성, 아지엔다의 예언서대로요. ‘그분’이 부활하고 세상은 한 번 멸망한 뒤 새로운 세계가 펼쳐질 것입니다. 그때가 되면 우리는 빌런이 아닌 세계의 창시자로 불리게 될 것이며 사람들도 결국, 깨닫게 되겠죠. 새로운 신세계는 가장 아름답다는 것을요.”
“모든 것이 불타고 다시 태어난다면 세상은 리셋되고 깨끗한 자들로 남게 될 것입니다.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누구보다 공평하고 냉정하신 위대하신 그분, ‘다크 카오스’님께서 될 것이니 우리는 무대를 준비하도록 하죠. ‘그분’께서 선정한 여덟 명의 ‘팔망성’이 무대를 준비하지 못하니……, 하늘의 별들을 속일 무대를 준비하도록 합시다.”
그들은 두 손을 모아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누군가에 대한 경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