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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근하는 빌런-312화 (312/324)

312화

“이 무식한 새끼가……!”

그저 가볍게 팔을 휘둘렀을 뿐이지만, 레헬의 능력은 엔레이드맨의 둠(doom)을 가득 채우고도 모자라 버섯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오를 정도로 사나웠다. 만약 엔레이드맨의 결계가 아니었다면 이 일대가 아무것도 남지 않고 완전히 날아갔을 정도였다.

레헬이 신난 마음에 아주 ‘조금’ 실력을 제어하지 못한 것뿐이지만 엔레이드맨에게는 피를 토할 정도로 커다란 부담이었다.

“콜록, 콜록!”

“이런.”

격렬하게 기침하는 엔레이드맨의 모습에 레헬이 순한 얼굴에 빙긋 미소를 띠며 낮게 속삭였다.

“하마터면 그의 소중한 장난감을 죽일 뻔했네.”

“개새끼…….”

입 안에 고여 있는 피를 뱉어 내며 엔레이드맨이 욕설을 내뱉었다. 그는 약 올리는 것처럼 느긋하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인 뒤 등 돌려 걸음을 옮기는 레헬의 뒤통수를 이글거리는 눈으로 노려보았다.

‘다시 생각해도 무시무시한 힘이다. 차라리 지금 죽여서 화를 없애면…….’

엔레이드맨이 생각을 실행에 옮기려 한 걸음 내딛는 순간, 타락한 추기경이 지팡이로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엔레이드맨 형제님. 무엇을 생각하시는지 충분히 알겠지만, 지금은 시기가 적절하지 않습니다. 지금보다 더 우리의 힘이 완전해졌을 때 뜻을 도모하기로 하지요.”

레드-헬-파이어의 압도적인 힘에 긴장한 것은 비단 엔레이드맨 뿐만이 아니었다. 고개를 돌려 다른 형제들을 살피니 체어맨과 코루루를 포함해 막내들까지 긴장한 얼굴로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언젠간 부딪쳐야 할 히어로의 힘을 눈앞에서 확인했으니 생리현상처럼 공포심과 적대심이 차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고맙다, 타락한 추기경. 나도 아직 멀었군.”

그의 말대로 지금은 레드-헬-파이어와 적대할 때가 아니었다. 아버지를 무사히 모셔 온 뒤 온 힘을 다해도 저놈 한 명을 상대할 수 있을지도 미지수였다.

그리고 아버지의 안위가 걸려 있는 일에 감히 허튼 생각을 하다니. 아직 아버지에 대한 충의가 한참 모자란다는 느낌이 들었다.

엔레이드맨이 한 걸음 물러나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레헬이 고개를 돌리며 환하게 웃었다.

“이제 끝났어?”

“…….”

“저길 봐 봐. 저기가 입구야.”

그의 말에 주위를 두리번거렸지만, 레헬의 능력으로 주변이 완전히 녹아 없어져 초토화되어 버린 탓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엔레이드맨이 손바닥을 다시 펼쳐 둠(doom)을 축소하자 황폐해진 주변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전과 확연하게 달라진 점이 한 가지 있었다.

눈앞에 있는 건물의 입구가 기이하게 일렁이고 있다는 것이다.

엔레이드맨은 드디어 찾아낸 결계를 경계하면서도 ‘헬파이어’의 잔열이 남아 있는 것처럼 일대가 후끈거리는 것이 매우 신경 쓰였다.

둠(doom) 안에서 일어난 일은 현실에 반영되지 않는다. 그런데 레드-헬-파이어의 힘은 결계를 벗어나 현실에도 영향을 끼친 것이다.

그 기막힌 힘에 저절로 입이 벌어지려는 걸 간신히 참았다.

‘정말 이게 인간의 힘인가?’

엔레이드맨 또한 두 번이나 그의 힘을 온전히 받아 낸 유일한 능력자이지만, 레헬의 힘에는 그저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사실 억지로 결계 입구를 찢는 것도 평범한 능력자라면 엄두도 못 낼 만한, 아니 불가능한 짓이었다. 그걸 마치 어딘가 산책 다녀오는 것처럼 산뜻한 얼굴로 저지르다니.

엔레이드맨은 막연하게 저 괴물 같은 작자를 이길 수 없을 것 같다는 무력감까지 들었다.

무식하기 짝이 없는 능력으로 레헬이 열어 놓은 붉은 결계의 입구는 왠지 모르게 불길한 기운을 잔뜩 내뿜고 있었다. 하지만 거대 빌런들과 최강의 히어로에게는 그리 두려운 일이 아니다.

‘여기에… 마약왕 형님이.’

버드맨은 일행의 가장 끄트머리에 서서 따라오던 중 드러난 결계에 머뭇거리며 몸을 움찔 떨었다. 그런 그의 어깨를 원한이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진정시켰다.

버드맨을 보고 있으면 이탈리아에서 할머니가 자신을 데리러 오기 전에 신세 졌던 사촌 동생들이 떠올랐다. 그 아이들은 지금쯤 버드맨과 비슷한 또래일 것이다.

과거를 전부 버리고 엔레이드맨을 따라와 다크 카오스님께 선택받았지만, 이따금 떠오르는 예전 기억을 막을 수가 없었다.

‘도대체 이 검은 안개는 뭘까? 내 능력과 연관되어 있는 것 같긴 한데…….’

원한은 처음엔 폐기물이 섞인 것처럼 검고 끈적이는 것에서 완전하게 회색빛으로 연해진 안개를 손으로 흩트리며 생각했다.

‘처음 만났을 때보다 훨씬 나아졌지.’

정체불명의 어두운 기운이 보일 때마다 꾸준히 휘저어 없애 주어서 그런지 색이 연해지면서 사특한 기운도 사라졌다.

덩달아 창백하게 질려 위태로웠던 버드맨의 상태도 눈에 띄게 좋아졌다. 이전처럼 상태가 계속 좋지 않았다면 형제들이 버드맨을 이번 일에서 배제했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랬다면 아버지나 형제들에게 하루빨리 도움이 되고 싶어 했던 버드맨의 바람은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그에 따라 상태는 더욱더 나빠졌을 것이고 나중에는 그가 어떻게 될지 상상할 수 없었다.

레헬을 선두로 다른 형제들이 결계 안으로 줄줄이 들어가는 것을 보며 원한은 버드맨의 어깨를 감싸 안은 채 안쪽으로 함께 따라 들어갔다.

.

.

.

결계 안은 거울 속 세상에 들어온 것처럼 온통 좌우가 뒤바뀌어 있었다. 붉은 하늘에 뜬 커다란 달이 눈을 깜박이며 침입자들을 노려보았다.

결계를 억지로 찢고 들어온 침입자의 존재를 결계 주인이 눈치 못 챌 리 없었다. 그 증거로 사방에서 쏟아져 나오는 괴인들이 그들의 앞을 막았다.

푸른색 피부에 징그러운 촉수를 등에 단 괴인들의 표정에 고통 외의 감정은 느껴지지 않았다. 간혹 다크 카오스를 부르며 찬양하는 이가 있긴 하지만, 누가 봐도 자의가 아닌 세뇌에 의한 것이었다.

“여긴 제가 맡겠습니다, 형제들이여.”

타락한 추기경이 부드러운 음성으로 한 걸음 나섰고 그의 그림자에서 망자가 된 성기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물론 이깟 괴인들 몇 명쯤이야 누가 나서도 힘들지 않고 충분히 해치울 수 있었다. 아니, 레헬의 손짓 한 번이면 손쉽게 정리가 가능했다.

하지만 이곳에서 그가 섣불리 움직이는 건 위험했다.

레헬의 힘은 스스로 제어할 수 없을 만큼 강하고 잔인하다. 만에 하나라도 결계 안에 있는 신재언이 휘말릴지도 모르는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안 하느니만 못한 행동이었다.

게다가 이런 곳에서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그들이 왔다는 것을 알게 된 마약왕이 신재언을 데리고 또다시 모습을 감춘다면 그땐 정말 낭패였다.

타락한 추기경의 힘은 형제들이 가장 잘 알고 있으니 걱정할 것도 없었다. 그렇게 먼저 움직이기로 한 그들은 타락한 추기경을 두고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저들은 얼마나 불쌍한 어린양들입니까. 가시밭길에서 계속 고통받고 있겠지요. 가시밭길을 걷는 그들의 발목을 잘라 편하게 해 줍시다. 바실리오, 나만의 기사. 당신은 할 수 있지요?”

타락한 추기경이 부드럽게 웃으며 망자가 된 성기사를 축복했다. 피눈물을 흘리는 타락한 추기경과 깃털처럼 가볍게 움직이는 성기사를 뒤로하고 걷던 코루루가 문득 걸음을 멈췄다.

왠지 모르게 신경 쓰여서 견딜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이곳은 마약왕의 소굴, 조심해서 나쁠 것도 없다.

“먼저들 가세요. 저는 아무래도 영 꺼림칙해서 타락한 추기경 오빠랑 같이 갈게요.”

그렇게 한마디 남긴 그녀는 발길을 돌려 타락한 추기경 쪽으로 걸어갔다. 엔레이드맨이 저지하지 않았으니 허락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그들의 눈물겨운 형제애를 바라보며 레헬은 속으로 비웃음을 삼켰다.

서로 애지중지해 봤자 본능은 파괴와 증오를 원천으로 삼는 빌런들.

레헬은 그 사실을 아주 잘 알았다. 결국, 그들은 신재언의 손아귀에서 놀아날 뿐이었다. 자신이 그랬듯 똑같은 수순을 밟는 부나방들이었다.

그들에게 굳이 그것을 알려 줄 의리 따위 없는 데다가 이 상황을 구경하는 재미도 제법 쏠쏠해서 가만히 있는 중이었다.

각자 다른 생각을 하며 그들이 하늘 위에 떠 있는 저택을 향해 올라가던 중, 이번엔 또 다른 자가 앞을 막았다. 생각지도 못한 그의 등장에 버드맨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지오반니?”

마약왕의 둘째 아들 지오반니였다. 마약왕은 마지막 남은 피붙이인 지오반니를 무척 아끼다 못해 신재언에게 아들의 능력을 각성시켜 달라고 청하기까지 했다.

그런 지오반니가 거대 빌런들과 레헬의 앞에 겁도 없이 나섰다. 과거에 신재언과 마약왕의 소개로 친하게 지냈던 버드맨이 그의 이름을 불렀지만, 지오반니는 방긋 웃으며 태연하게 말을 걸었다.

“정말이네. 아빠가 말한 대로 내 기운이 많이 약해져 있잖아? 어떻게 한 거야, 버드맨?”

“무슨…….”

“하지만 아직 어설퍼. 고작 네까짓 것에게 큰 기대는 하지 않지만, 최대한 오래오래 버텨 주길 바라.”

지오반니가 돌연 입을 벌려 혓바닥 위에 놓인 사탕을 꺼냈다. 그것은 지오반니가 가끔 나눠 주었던 간식이었다. 입 안에 있었던 것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푸른색 사탕의 크기가 상당했다.

지오반니는 짙게 미소 띤 얼굴로 손바닥 위에 올린 구술을 깨부순 뒤 그대로 몸을 돌려 달아났다. 엔레이드맨이 손을 뻗어 지오반니를 잡으려 한 순간, 옆에서 당황해하는 체어맨의 목소리가 들렸다.

“버드맨? 왜 그러십니까?”

“아… 으…….”

버드맨이 양 날개로 머리를 감싼 채 침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이마는 식은땀으로 범벅이고 눈앞이 흐려지는지 초점이 사라졌다.

고통스러운 신음이 점점 커졌다.

“으… 악… 아아아악!”

버드맨이 날개로 자신의 온몸을 할퀴며 자해하기 시작했다. 엔레이드맨은 저 멀리 도망가는 지오반니를 노려보며 야차처럼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직접적으로 공격하지도 못하면서 저번에는 마더를, 지금은 형제인 버드맨을 이용해 앞길을 막는 마약왕의 행태에 분노가 일었다.

형제들을 위험에 빠트리는 건 자신의 신체부위를 잘라 내는 것과 같은 고통이 따를 텐데 이런 짓을 저지르다니.

결국, 엔레이드맨은 지오반니를 쫓지 않고 버드맨을 진정시키기 위해 결계를 펼쳤다. 버드맨이 죽지만 않는다면 아무리 상처를 입어도 현실에선 타격이 없을 테니 말이다.

그래, 죽지만 않는다면.

“그륵.”

버드맨의 입에서 푸른색 액체가 쏟아졌다. 동시에 그의 몸 전체가 울룩불룩 튀어나왔다가 들어가길 반복했다.

마치 피부 안쪽에 무언가가 들어가기라도 한 것처럼 피부를 뚫을 듯 움직였다. 푸른색으로 물들어 가는 피부가 저 아래쪽의 괴인을 연상케 했다.

“막내야!”

귀신들의 성녀가 버드맨의 한쪽 날개를 붙잡으며 소리쳤다. 그녀의 귀안에 버드맨이 죽음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이 보이는 모양이었다.

오랫동안 아무도 모르게 버드맨을 실험체 삼아 지금을 위해, 형제들의 발목을 잡기 위해 형제 하나를 희생시키려는 마약왕의 계획은 끈질겼다.

이대로 버드맨이 괴물이 되는 것보다 차라리 숨을 끊어 놓는 것이 형제로서 자비를 베푸는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때 원한의 목소리가 그들의 귀에 꽂혔다.

“형님, 누님들, 꽉 잡으십쇼!”

원한이 몸을 날려 버드맨의 머리를 양손으로 움켜쥐었다. 그러자 찢어지는 비명을 토해 내는 버드맨의 발버둥이 더욱 거세졌다.

원한은 버드맨의 머리에서 무언가를 끌어내는 것처럼 힘주어 잡아당겼다. 다른 이들에게 보이지 않는, 어떤 것을 뜯어내는 것처럼.

“으아아악!”

원한이 재차 기합을 내지르며 다시 버드맨을 끌어안는 순간 갑자기 그의 몸에서 눈 부신 빛이 터져 나왔다. 이윽고 검은색 안개가 아른거리다가 빛의 결정에 휘감겨 사라지고 버드맨의 일그러졌던 얼굴이 점차 원래대로 돌아왔다.

공기 중에 떠다니는 반짝이는 빛의 결정들을 보며 원한은 드디어 제 능력을 알아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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