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근하는 빌런-313화 (313/324)

313화

원한은 눈으로는 버드맨을 살피며 그동안 있었던 일을 형제들에게 설명했다. 가끔 버드맨의 머리에서 매우 불길한 느낌이 드는 검은색 안개가 피어올랐으며 그게 보일 때마다 자신이 잡아 없앴다는 내용을 간단하게 이야기했다.

그의 말을 듣던 다른 형제들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실제로 버드맨의 상태가 원한이 온 뒤로 급격하게 호전되긴 했다.

그러니 눈으로 보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의 말은 충분히 신빙성이 있었다. 조금 전에 일어났던 상황을 떠올린다면 더더욱 믿을 수밖에 없다.

원한은 지오반니가 입에서 꺼낸 푸른색 구슬이 깨지자마자 그야말로 폐수 덩어리라 해도 믿을 만큼 엄청나게 커다랗고 탁한, 검은 안개 같은 것이 생겨나 버드맨의 몸을 감싸는 것을 목격했다.

그것은 입과 귀, 심지어 코와 눈을 파고들며 버드맨의 몸 안으로 악착같이 들어가려 했다.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불길한 기운에 원한이 다급하게 검은 기운을 손으로 잡아 뜯는 것처럼 당겼다.

강제로 꺼내어진 그것은 버드맨의 몸에 들어가지 못해 화가 났는지 분풀이하듯 곧바로 원한에게 달려들었다. 깜짝 놀라 저도 모르게 손을 휘저은 원한의 몸에서 새하얀 빛이 터져 나와 검은 기운을 집어삼켰다.

그리고 잠시 후, 그것은 다른 이들의 눈에도 보이는 새하얀 빛의 가루가 되어 원한의 몸속으로 사라졌다.

“…정화 능력이군요.”

기절한 버드맨을 조심스럽게 등에 업으며 체어맨이 한마디 내뱉었다. 형제 중에서도 가장 묘한 표정을 짓고 있던 엔레이드맨이 체어맨에게 질문을 던졌다.

“…마지막으로 정화 능력을 가졌던 자가 죽은 게 언제였지?”

“대략 9년 전입니다.”

역시나.

체어맨의 대답에 엔레이드맨이 침음을 삼켰다. 신재언에 의해 각성한 원한의 능력은 어떤 종류의 부정을 정화할 수 있는 특수 능력 계열인 듯했다.

설명만으로는 간단하고 별것 아닌 능력일 수도 있겠지만, 정화 능력은 세계에서 가장 희귀한 능력 중 하나였다.

인류 역사상 정화 능력을 가졌던 능력자는 단 세 명뿐으로, 그마저도 9년 전 유일한 정화 능력자가 120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면서 완전히 사라졌었다.

전 세계 히어로 협회뿐만 아니라 관련된 모든 이들이 눈에 불을 켜고 찾고 있으나 발현 자체가 매우 어려운 능력.

만약 이 사실이 알려진다면?

빌런들의 합동 테러에도 힘을 합치지 않았던 각국의 히어로 협회가 원한을 손에 넣기 위해서라면 태도를 완전히 바꿀 수도 있었다.

게다가 이제 보니 원한의 능력은 단지 정화뿐만이 아니었다. 원한이 하얗게 빛나는 왼쪽 손을 내리고 오른쪽 손을 들어 올리자 그의 손바닥 위에 검고 탁한 무언가가 일렁거리는 게 보였다.

“방금 버드맨 형님에게 들러붙으려 했던 것을 막고 흡수한 기운입니다.”

부정을 흡수해 제 것처럼 사용할 수도 있다. 아주 희귀한 능력을 눈앞에서 본 형제들의 표정이 점점 더 복잡하게 변했다.

그러한 사실을 잘 모르는 원한은 그들의 표정에 자신이 무언가 잘못한 줄 알고 쭈뼛거리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왜들 그러십니까, 형님, 누님들… 제가 혹시 무슨 실수라도 했습니까?”

“아니다. 막내야.”

엔레이드맨이 표정을 고치며 걱정하지 말라는 듯 원한의 어깨를 토닥였다.

지금이야 원한이 능력을 각성한 직후에 신재언이 납치당하는 바람에 그가 빌런으로서 이름을 알릴 기회가 전혀 없었다.

물론 히어로 협회의 정보망을 통해 다크 카오스에게 또 하나의 별이 태어났다는 것 정도는 대충 눈치채고 있을 것이다. 그래도 아직 그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알려지지 않았다.

훗날 원한에게 빌런 명이 생기고 그가 이름을 알리게 될 때쯤엔 모든 상황이 바뀌어 있을 것이다.

더군다나 빌런인 그를 붙잡기만 하면 어떤 식으로 착취해도 인권 논란이 일어나지 않을 터였다. 그러니 돼지처럼 이득을 탐하는 권력자들이 얼마나 탐낼지 눈에 선했다.

엔레이드맨이 그를 눈여겨보고 이쪽으로 데려온 것이 과연 잘한 일인지 고민할 만큼 희귀한 능력이었다. 방어와 공격적인 면에서 뒤떨어지는 그를 형제들이 최선을 다해 지켜 내야 할지도 모른다.

“…막내의 능력을 상의하는 건 다음에 하자. 일단 아버지를 모시고 데려오는 게 우선이니.”

엔레이드맨의 말에 나머지 형제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이 모든 상황을 옆에서 보고 듣는 히어로 레헬의 존재가 신경이 쓰이긴 했다.

하지만 그는 전혀 관심 없다는 듯 저택 안으로 앞장서 들어가 여기저기 쑤시고 다니는 중이었다.

부랴부랴 레헬의 뒤를 따라간 엔레이드맨에게 그가 복도 창문 너머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저길 봐. 녀석들이 꽁지가 빠져라 도망가고 있는 모양이야.”

레헬이 팔짱을 낀 채 환하게 웃었다.

그의 미소를 엔레이드맨은 어떤 것으로도 형언할 수 없이 싫어했지만, 그의 빛나는 외모만큼은 인정해야만 했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외모로 아버지를 꼬여 낸 불한당 같은 놈이었다.

“여기도 정말 재미없는 놈들뿐이네.”

재미없다는 듯 권태롭게 중얼거리는 레헬의 태도와는 달리 엔레이드맨은 창밖에서 일어나는 광경에 눈살을 잔뜩 찌푸렸다.

붉은 하늘에 점차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이다. 결계가 무너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아무래도 마약왕이 형제들, 아니 레헬의 침입을 눈치챈 듯했다.

하긴, 마약왕도 아직까진 레헬을 상대하기엔 벅찰 것이다. 아무리 정교하고 비열한 계획을 세웠다 할지라도 그것을 전부 무시할 수 있는 규격 외의 힘이라는 게 있다.

레헬은 누군가가 100개의 수를 생각해 덫을 놓아도 모두 순식간에 때려 부순 뒤 101번째에 이르렀을 때 재미없다며 덫의 주인을 죽일 놈이었다. 그런 뒤에 아침 운동이라도 한 것처럼 산뜻한 마음으로 돌아 나오겠지.

덧붙여 엔레이드맨은 이렇게까지 레헬에 대해 잘 알고 싶지 않았다.

“오라버니. 마약왕 오라버니가 아버지를 데리고 몸을 숨긴 게 아닐까요?”

귀신들의 성녀가 어두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레헬을 제외한 모두가 아버지를 찾을 기회를 날려 버렸다며 안절부절못했다.

그와 반대로 레헬은 이 모든 상황에서 태연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고개를 들어 위쪽을 바라보며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한 걸음 걸을 때마다 붉은 하늘이 무너지는 광경은 세계가 멸망하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복도를 걸어가다가 문득 열려 있는 방으로 들어간 엔레이드맨은 온통 비어 있는 실험관으로 가득한 곳에서 머리가 날아간 여성의 시신을 발견했다. 실험관이 깨진 지 얼마 안 된 듯 알코올 냄새가 진동하는 용액이 바닥에 흥건했다.

바닥에 누워 있는 여성의 시신은 얼굴을 확인할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되어 신원을 확인할 수 없었다. 하지만 히어로 협회 마크가 찍힌 옷을 보아하니 이 부근에서 실종되었다던 히어로가 분명했다.

사건에 휘말려 죽은 듯한 시신은 사후 경직이 시작되고 있었다. 거기다가 흘러나온 피가 아직 완전히 굳지 않은 걸로 보아 숨이 멎은 지 얼마 안 되었다는 걸 보여 주었다.

“이 여자. 자살귀가 됐어요.”

귀신들의 성녀가 영을 부리며 중얼거렸다. 영혼과 소통해 보려는 듯 가지 방울을 흔들었지만, 그녀는 이내 우울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미쳐 죽어서 광귀가 됐네요. 미친 자들은 도통 쓸모가 없어요. 말귀도 못 알아듣고 힘을 쓰지도 못하거든요.”

말을 마치고 입을 다문 그녀가 잠시 고민하더니 푸른 귀기가 어린 귀안을 개안해 저승문을 열었다. 딱한 사정이 있는 자살귀들은 저승 시왕의 동정을 얻으면 가끔 환생할 수 있는 판결이 나오기도 한다.

이 여자가 얼마나 딱한 사정이 있어서 자살을 선택했는진 모른다. 하지만 어차피 주변에 있어 봤자 쓸모도 없고 신경 쓰이기만 하니 저승으로 보내 주려는 셈이었다. 이윽고 저승문이 활짝 열리고 죽은 히어로의 영혼이 저승으로 향했다.

그때 엔레이드맨의 허리춤에 달려 있던 주머니에서 눈알이 하나 튀어나왔다. 원래는 신재언이 가지고 다니던 조각난 장난감의 눈알 한쪽이지만, 마약왕 때문에 따라가지 못했었다.

조각난 장난감이 둥둥 떠다니며 주변을 스윽 훑더니 엔레이드맨에게 다가와 꿀벌처럼 팔자를 그리더니 어느 한 곳으로 허겁지겁 날아갔다.

“조각난 장난감이 아버지의 흔적을 찾은 것 같다.”

다급하게 조각난 장난감을 따라 도착한 곳은 그들이 있던 곳의 옆방이었다. 불빛 한점 들어오지 않는 그곳에는 아버지의 흔적이 아닌, 신재언 본인이 있었다.

새하얀 관에 가득 담긴 정체 모를 꽃들, 그리고 꽃 더미 한가운데에 파묻힌 신재언이 죽은 것처럼 눈을 감은 채 누워 있었다.

엔레이드맨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듯한 가슴을 부여잡고 신재언에게 비틀거리며 다가가려 했다. 그런데 그런 엔레이드맨의 어깨를 잡고 레헬이 뒤로 밀었다.

평소였다면 그 힘에 밀릴 엔레이드맨이 아니지만, 관 안에 누워 있는 신재언을 보고 충격을 받은 마음에 버틸 새도 없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쿵, 하고 엔레이드맨이 쓰러지고 그를 뒤쫓아 온 다른 형제들 또한 신재언을 보고 충격에 빠져 입을 막았다.

레헬이 신재언에게 다가가 그의 손을 잡고 흔드는 걸 자식들은 그저 멍하니 지켜보기만 했다.

“아버지께서……?”

“마약왕이, 아버지를? 그럴 리 없는데 어떻게!?”

마약왕이 아버지를 납치하거나 거역해도 절대 의심하지 않았던 것이 한 가지 있었다. 그가 결코 아버지께 손댈 수 없다는 믿음이었다.

그런데 신재언이 죽은 것처럼 관 속에 누워 있는 것을 보자 단체로 패닉에 빠졌다. 자식들이 일제히 비명을 지르기 시작한 그때, 신재언이 벌떡 몸을 일으켜 인상을 찌푸리고 소리쳤다.

“머리 아파! 골이 울리니까 잠깐 조용히 해 봐! 머리가 깨질 것 같아!”

머리를 움켜잡고 끙끙 앓던 신재언은 눈을 떠 새하얀 꽃들 사이에 파묻혀 있는 자신의 몰골을 드디어 확인했다.

“이건 또 뭐야?!”

질색하는 표정으로 꽃들을 확인하는 사랑스러운 연인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레헬이 미소 지었다.

“잠자는 숲속의 공주 같았어요, 재언 씨.”

‘뭐라는 거야, 미친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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