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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근하는 빌런-314화 (314/324)

314화

재언은 저도 모르게 튀어나올 뻔한 본심을 가까스로 삼키며 고개를 털었다. 머리카락에 붙어 있던 꽃잎이 팔랑팔랑 흩날리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런 몰골로 누워 있는 자신더러 잠자는 숲속의 공주 같다는 소리를 내뱉다니. 낯짝도 두꺼운 차민재의 뻔뻔함에 절로 감탄이 나왔다.

재언이 눈을 뜨자마자 들은 정신 나간 소리에 여기가 어딘지도 잊고 황당한 얼굴로 멍하니 있으니 바닥에 주저앉아 바들바들 떨던 엔레이드맨이 일어나 달려왔다.

“아버지!”

엔레이드맨은 평소에 첫째로서 형제들을 보살피고 이끌어야 한다는 막중한 책임감을 가지고 행동했다. 그래서 신재언과 단둘이 있을 때만 처음 만났을 때처럼 어리광을 부리거나 풀어지는 모습을 보였다.

그런데 지금 그는 모두가 보고 있는 가운데 신재언의 허리춤을 꼬옥 껴안았다. 근엄한 분위기를 유지하려 애써 온 그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는 마약왕이 신재언에게 해를 가할 리 없다고 형제들 앞에서 애써 침착한 태도를 유지했다. 하지만 머릿속에 만에 하나라는 상황이 자꾸 맴돌아 초조함이 극에 달아 있었다.

온몸을 부딪쳐 온 엔레이드맨의 무게와 체온을 느끼니 드디어 재언도 정신을 차리고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 깨달았다.

하지만 그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나머지 자식들이 허겁지겁 다가와 근처에 앉거나 껴안는 등 그를 둘러쌌다.

“아버지. 대체 무슨 일이 있으셨던 겁니까? 어디 다치신 곳은 없으십니까? 마약왕 그놈이 허튼짓하진 않았나요?”

자식 중 누군가의 물음에 재언은 한숨을 크게 쉬었다.

그 때문에 여러 의미로 머리가 아팠다. 지금은 도끼로 뇌를 내려찍는 것처럼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서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으… 기억이 없어. 마약왕을 만난 것 같긴 한데……. 도통 무슨 짓을 했는지 모르겠단 말이야. 아마 무슨 짓을 저지른 뒤에 수를 쓴 거겠지.”

자식들의 부축을 받고 관에서 나온 재언은 자신 같은 시꺼먼 사내를 잘도 이런 식으로 처박아 꾸며 놓았다고 생각하며 이를 벅벅 갈았다.

너무나도 고약한 악취미가 아닌가.

재언과 자식들이 감격의 재회를 나누는 동안 차민재는 한 달 만에 만난 애인의 손을 겨우 한 번밖에 잡지 못한 자신의 손을 빤히 내려다봤다.

그것뿐이면 다행일까. 열심히 움직여서 기껏 구해 냈건만 애인은 눈을 뜨자마자 ‘별 미친놈을 다 보겠네.’ 같은 표정을 짓기까지 했다.

물론 자신이 헛소리했다는 인식이 있긴 하지만, 하얀 꽃들 사이에 파묻힌 신재언이 잠자는 숲속의 공주처럼 보인 건 진심이었다.

이대로 뻔뻔해지기로 한 차민재는 신재언을 둘러싸고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자식들을 헤치고 다가가 그의 머리카락에 붙은 꽃잎 한 장을 손수 떼어 주었다.

“의료진을 대기해 뒀습니다. 결계를 빠져나가면 바로 검진받아 볼 수 있어요.”

“아… 네. 감사합니다.”

“협회에도 최첨단 기계들이 많으니까 세뇌 능력에 걸렸다고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욱신.

히어로 협회라는 말에 두통이 더 심해지는 느낌이 들어 재언의 눈이 저절로 가늘어졌다. 턱을 쓰다듬는 재언의 머릿속에 누군가의 말소리가 재생되었다.

“오오, 이분이 바로… …언제 내 능력을 각성시켜 줄 수 있는가? 나 역시 이분께 선택받을 수 있는 거겠지?”

기절하기 직전에 괴상한 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잘 모르겠다. 어차피 마약왕이 이중삼중으로 수를 써 놓았을 게 분명하니 머리가 쪼개질 것 같은 고통에 생각하길 포기했다.

나중에라도 알 만한 사실은 알게 될 것이고 기억나지 않으면 그건 그대로 신경 쓰지 않으면 되지 않을까 싶었다.

억지로 무언가를 생각하는 걸 관둔 재언은 차민재의 어깨에 기댄 채 걸음을 옮겼다. 덩치도 있고 무게도 상당할 텐데 차민재는 가뿐하게 재언을 부축했다.

레헬에게 밀려 눈살을 잔뜩 찌푸렸던 엔레이드맨은 창백하게 질린 신재언의 안색을 보고 이곳에서 소란을 피워 봤자 좋을 게 없다는 걸 알아차리고 한 걸음 물러났다.

“아버지. 괜찮으십니까?”

“머리가 아픈 것 빼곤 괜찮아.”

재언은 걱정스럽게 자신을 쳐다보는 엔레이드맨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자식들을 돌아봤다. 하도 정신이 없어서 전부 모여 있는 줄 알았는데 두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타락한 추기경하고 코루루는?”

“아, 그 둘은…….”

엔레이드맨이 대답을 머뭇거리고 있을 때 신재언의 품 안으로 무언가가 빠르게 달려와 안겼다.

푸른색 머리카락이 넘실거렸다. 재언은 제 가슴을 들이박은 황소 같은 힘에 버티지 못하고 기침을 터트리며 뒤로 나뒹굴었다.

최근에 이런 식으로 나뒹군 적이 있는 거 같은데…….

거센 기시감을 느끼는 신재언의 위로 코루루가 올라탔다. 그녀는 눈물을 펑펑 흘리며 재언을 껴안고 소리쳤다.

“아버지! 아버지! 저 코루루는 아버지가 정말 보고 싶었어요!”

“아야야… 코루루…….”

“코루루. 이게 무슨 짓이냐. 아버지께선!”

“괜찮아, 괜찮아. 오죽했으면 이러겠어…….”

재언은 엄하게 다그치며 코루루를 떼어 놓으려는 엔레이드맨을 말리고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다급한 걸음으로 뒤늦게 도착한 타락한 추기경이 재언의 창백한 안색을 보고 두 손을 모아 축복했다. 그 덕분에 깨질 것같이 아팠던 머리가 조금은 나아졌다.

“전지전능한 아버지께서 무사하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타락한 추기경의 새하얀 사제복에 푸른색 피가 찐득하게 묻어 있었다. 코루루의 드레스에도 같은 색의 액체가 묻은 걸 보니 제법 거센 전투를 치른 모양이었다.

“재언 씨, 이제 나가야 합니다.”

그 모습을 못마땅하게 쳐다보던 차민재가 다가와 코루루의 뒷덜미를 잡고 던져 버렸다. 방구석으로 우아하게 착지한 코루루가 상당히 거친 손길에 고양이처럼 으르렁거렸지만, 차민재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그의 말대로 이곳에서 노닥거릴 시간이 없었다. 창문 너머의 붉은 하늘이 점차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제야 바깥 상황이 눈에 들어온 재언이 경악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느긋하게 재회의 감격을 나눌 때가 아니었다.

그런데 피눈물을 쏟으며 축복을 걸던 타락한 추기경이 조심스럽게 신재언의 손을 잡고 머뭇거렸다. 그의 행동에서 재언은 자식들이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는지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이야 납치당해도 극진한 대우를 받아왔지만, 자식들은 하루도 제대로 쉬지 못한 듯했다.

“아버지. 밖으로 나가면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저와 냉기와 제안의 마녀가 본 것이 있습니다.”

진지한 표정으로 건네는 타락한 추기경의 말에 재언은 자신의 주변으로 결계를 치던 엔레이드맨을 힐끔 쳐다본 뒤 고개를 돌렸다.

타락한 추기경의 아름다운 얼굴에 늘 온화하고 인품이 가득한 표정이 아닌 창백하고 어두운 인상이 드리워진 걸 보니 아무래도 좋은 이야기는 아닌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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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약왕. 이대로 꽁지 빠져라 도망가는 건 너무 꼴사납지 않나요?”

불요족인 분홍색 머리의 사내가 웃으며 농담처럼 말을 건넸다. 지나치게 끈적이는 것만 같은 말투였다.

“별을 읽을 줄 아는 넌 다 알 텐데. 저 남자는 우리가 어떻게 처리할 수 없다는걸.”

불요족의 특징인 광안(光眼)이 번뜩였다.

“후훗♡ 그대로 덤볐다면 전부 죽었겠지. 꺼지지 않는 영원한 불꽃에 평생 고통의 춤을 추는 거야.”

예언은 아니다. 하지만 불요족의 사내가 읽은 하늘의 해답은 ‘그’의 위험성을 충분히 알려 주었다.

마약왕은 제 무릎을 베고 잠든 지오반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지오반니의 눈가가 붉게 짓물러 있는 것으로 보아 펑펑 울다가 잠이 든 것 같았다.

마약왕은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을 멈추지 않으며 말했다.

“내 소중한 아들이 시간을 벌어 주지 않았다면 정말 큰일 날 뻔했지.”

“하지만 하늘의 별은 정말 재미있지 않습니까? 아니면 ‘그분’께서 대단하신 걸까요? 거기서 우리의 계획을 방해하는 제3의 인물이 튀어나올 줄이야!”

원한. 이글거리는 증오를 품고 마약왕을 노려보던, 건방지기 짝이 없는 새로운 형제.

그놈만 나타나지 않았다면 버드맨을 손에 넣는 게 가능했을 것이다. 지금껏 노력했던 일이 전부 허사로 돌아갔다.

버드맨을 대신할 대용품을 찾는 건 아무리 마약왕이어도 힘든 일이었고 그나마 급하게 구할 수 있는 녀석은 미덥지 못한 장기 말이었다.

‘이 또한 운명이겠지…….’

마약왕은 무료한 표정을 지었다. 어차피 제3의 이레이저가 등장한다고 할지라도 상관없었다.

“하지만 수확이 있었습니다. 우호호.”

마약왕의 옆에 서 있던 등이 곱은 사내가 신이 난 투로 입을 열었다. 데스 메이커가 한쪽 눈을 크게 뜨면서 뒤에 세워 놓은 관을 힐끔 쳐다봤다.

“이렇게 도망가는 것도 지금이 마지막일 테지요. 다음에 만나면 많은 것이 바뀌어 있을 겁니다. 이 도박은 우리의 승리입니다.”

말하는 그의 입가에서 침이 줄줄 흘러내렸다.

“자아… 이제 별들의 움직임은 막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좋은 꿈 꾸십시오.”

데스메이커의 관에서 무언가가 움직이듯 덜컹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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