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5화
드디어 밖으로 나온 신재언은 아무도 없는 텅 빈 거리를 보며 감회에 젖어 들었다.
“와… 진짜 밖이네.”
납치당한 기간 내내 방 안에 죄수처럼 구금되었던 탓에 거의 한 달이 넘도록 바깥공기를 마시지 못했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공기를 느끼던 재언은 주머니 안 깊숙이 넣어 둔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결계 안에서는 어차피 전파가 터지지 않았기 때문에 배터리라도 아껴 두자는 심산으로 핸드폰 전원을 꺼 놓았었다.
핸드폰의 전원을 켜고 조금 기다리자 알람이 쉴 새 없이 쏟아졌다. 일단 부모님에게 온 부재중 전화가 300통이 넘었고, 그 외 다른 친인척이나 지인들에게도 연락이 와 있었다.
재언은 회사에서도 연락이 왔다는 것까지 확인한 뒤 가장 먼저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아버지. 어머니는 괜찮으세요?”
- 재언아!
다행히 신호음이 얼마 가지 않아 전화를 받았고, 재언은 무엇보다도 유약한 성격인 어머니의 안부를 가장 먼저 물었다. 하지만 그런 걱정이 무색할 정도로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핸드폰 너머로 터져 나왔다.
저 정도면 큰 걱정은 없겠다며 안심한 재언은 여태까지 제대로 된 연락을 취하지 못해 부모님을 걱정시킨 죄인의 마음으로 납작 엎드려 사죄했다.
빌런들의 왕 다크 카오스는 효심 가득한 효자였다.
“죄송해요. 도저히 연락할 수 있었던 상황이 아니었어요… 네네, 이번 사건에 휘말리는 바람에…….”
- 어디 다친 곳은 없고? 그동안 얼마나 걱정했는데…….
그래도 무사해 보여서 다행이라는 듯 눈물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재언은 갇혀 있을 때 회사에 연락할 게 아니라 부모님께 먼저 연락을 드렸어야 했다고 생각하며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아들이 한 달 넘게 연락 두절되었는데 걱정하지 않을 부모가 어디 있을까. 그게 아무리 독립해 사는 다 큰 아들이라도 부모와 자식 간의 연이 끊어진 게 아니니 더욱더.
물론 고등학생 때 여러 일이 있어 부모님 속을 좀 썩이긴 했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자신의 어머니는 아들에 관해서는 과보호가 매우 심했다. 언제 어디서든 아들이 납치라도 당할지도 모른다고 여기는 것처럼 굴었다.
일단 부모님도 마을에서 떨어진 대피소로 몸을 옮겼다는 소식에 안심했다. 그리곤 조만간 다시 연락하겠다는 말로 전화를 끊은 재언은 나머지 지인들에게도 짧게 연락을 돌렸다.
그러고 나니 차민재가 인근에 주차해 놓은 차를 끌고 와 앞에 섰다. 재언은 차에 올라타며 그나마 마약왕이 때마침 대한민국을 지나고 있어서 진심으로 다행이었다.
외국이었다면 한국까지 넘어오는 데 몇 시간, 혹은 한나절이 걸렸을지도 모른다. 타락한 추기경 덕분에 두통이 나아졌다 해도 이 상태에서 비행기를 몇 시간도 넘게 탄다면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피곤한 얼굴로 푹신한 시트에 몸을 기대앉은 재언에게 차민재가 말을 걸었다.
“재언 씨, 피곤해 보이는데 바로 들어가서 쉬실 겁니까?”
“서울은 봉쇄령이 내려졌다죠? 제 생각인데 이제 더 이상 필요 없을 겁니다. 당분간 마약왕 녀석도 몸을 사리겠죠.”
예쁘게 미소 지은 얼굴로 차민재는 크게 숨을 내쉬며 눈을 감은 재언의 상태를 힐끔 살폈다.
그는 정말 피곤하고 지친 것 같았다. 게다가 기억상실 증세가 간간이 보이기 때문에 의료진에게 데려가는 것도 고려해야 할 문제였다.
“…다 좋은데요. 민재 씨, 부탁 하나만 좀 합시다.”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 중인 차민재를 향해 신재언이 힘없이 중얼거렸다.
“일단 밥부터 먹어요. 매콤하게 끓인 찌개로요.”
한 달 동안 치즈만 먹었더니 입 안에 꼬릿꼬릿한 냄새가 머물러 있는 것만 같았다.
@
통통통-.
단정하고 깔끔한 부엌에서 훤칠하게 생긴 근사한 미인이 대파 써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렸다.
그 소리를 배경음 삼아 재언은 거실에 들어오자마자 소파에 늘어지게 누웠다. 그러자 이레일의 집에 피신해 있었던 배추가 꼬리를 잔뜩 부풀린 채 이동장에서 나왔다.
무엇에 그리 놀란 건지 검은 고양이는 소파 위로 날렵하게 올라오더니 신재언의 탄탄한 복근을 앞발로 꾹꾹 누르며 한참 동안 울어댔다.
“야옹. 야오오오옹.”
한 달 가까이 얼굴도 비추지 않았던 거대 고양이에 대한 불만인 걸까.
매우 소란스러웠던 바깥세상에 비해 배추는 이레일의 집에서 잘 먹고 자고 놀고 쉬었는지 털이 반짝반짝 빛이 났다.
이레일의 성격이 요즘 좀 이상해지긴 했어도 동물을 좋아하는 것까진 바뀌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그런데 알아본 바로 고양이는 영역 동물이라 살던 곳에서 벗어나면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했었던 것 같다.
혹시 배추는 이레일의 집도 제 영역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잠시 후, 고양이의 꾹꾹이를 안마 삼아 소파에 누워 쉬던 재언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베란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베란다로 나가 난간에 기대어 섰다.
바깥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 아파트에 거주하는 사람들도 모두 대피했는지 레헬의 아파트에 올라오는 동안 마주치는 이가 한 명도 없었다.
평소였다면 지금쯤 저쪽 도로에 차가 빽빽했을 테고 길가에 지나가는 사람들이 제법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개미 새끼 지나가는 소리마저 들릴 정도로 적막했다.
마약왕 녀석이 거하게 쳐 놓은 사고에 신재언은 뒷주머니를 더듬어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귓속을 파고드는 마약왕의 목소리가 아직도 그의 심장을 서늘하게 했다.
“신세계의 시작입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군림하시는, 새로운 세계를 열어드리겠습니다!”
“진정으로 평범하게 살고 싶으셨다면… 왜 저희를 만들었습니까, 아버지?”
“그러게.”
그들이 피눈물을 흘리든 말든 그냥 무시할 걸 그랬나 보다. 인권을 유린당한 채 아무 상관없는 타인이 들어도 분노할 만한 그들의 슬픔과 증오를 무시했다면 자신은 지금쯤 저기 평범한 사람들과 같이 대피소에 있지 않았을까.
아니면 세계 최강의 히어로 애인 덕을 봤다던가. 아무튼 언제 일이 터질까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사는 것보단 더 편하게 살아갈 수 있었을 텐데.
거기까지 생각한 재언은 그런 자기 자신에게 어이없어져 바람 빠진 웃음소리를 흘렸다.
‘무시 못 했겠지.’
과연 10년 전으로 돌아가 박주현이 피눈물을 쏟으며 제발 구해 달라고, 이 비참한 곳에서 제발 도망치게 해 달라고 빌었던 광경을 보고도 매정하게 등을 돌려 무시할 수 있었을까.
본의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자신 때문에 일어난 지금의 상황들을 피부로 느끼며 씁쓸한 얼굴로 담배를 피웠다.
그런 재언을 차민재가 부른 건 그로부터 약 몇십 분이 지난 후였다. 베란다로 들어온 차민재는 재언이 재떨이랍시고 만든 종이컵에 수북하게 담긴 꽁초들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저 꼴을 보자니 담배를 태우지 않고는 버틸 수가 있어야죠.”
재언이 적막하고 한산한 거리를 손가락질하면서 어깨를 으쓱였다. 차민재의 뒤를 따라 집 안으로 들어가니 그렇게나 그리워했던 된장찌개 냄새가 솔솔 풍겼다.
구수한 된장찌개를 끓이는 레드-헬-파이어라니…….
아주 진귀한 풍경이다.
차민재가 팔을 뻗어 신재언의 어깨를 감싸고 부엌까지 데려와 식탁 의자에 앉혔다.
마트고 편의점이고 주변의 모든 것이 문을 닫은 상황이라 대충 집에 있는 음식들로만 만들었다고 했다. 그런데 군침이 도는 냄새가 풍기는 찌개는 물론 푸짐한 반찬들로 식탁 위가 진수성찬으로 차려져 있었다.
한 달 내내 아침에는 빵과 치즈, 햄, 샌드위치, 홍차와 우유 등을 먹고 저녁에는 스파게티나 스테이크, 그것도 아니면 엄청 느끼하고 달콤한 양식만 먹었다.
오죽하면 가출까지 했을까. 재언은 진심으로 마약왕이 눈앞의 진수성찬만큼 챙겨 줬다면 버틸만 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떨리는 손으로 수저를 들어 된장찌개를 한입 먹은 재언은 어느 만화에 나온 등장인물처럼 자신의 등 뒤로 새하얀 벼락이 내리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오… 오오?
이 맛은?
다시 손을 움직여 된장찌개를 한입 더 먹었다. 입 안에 매콤하고 짭짤한 찌개의 맛이 가득 스며들었다.
저도 모르게 눈을 감은 재언의 머릿속에 푸근하게 웃고 있는 할머니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물론 그 할머니는 재언의 친할머니가 아니다.
정겨운 시골집. 대문이 열리고 마당으로 들어오는 할머니의 품에 덩치 큰 개가 한 마리 달려와 안겼다.
할머니는 마당에 개를 풀어 두고 제 자식처럼 키웠다. 그런데 어느 날 할머니의 건강에 이상이 생겨 큰 병원에 입원해야 하는 일이 생겼다.
기르던 개가 걱정되었던 할머니는 마을 사람들에게 개를 부탁했다. 마을 사람들은 개가 굶지 않도록 물과 밥을 챙겨 주었지만, 산책하거나 놀아 주는 등의 보살핌은 전혀 해 주지 않았다.
하루, 이틀, 사흘이 지나고 마을 사람들이 준 밥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개집에 들어가 몸을 말고 있던 개는 익숙한 발걸음 소리에 얼른 고개를 들었다.
할머니가 드디어 퇴원해 집으로 돌아온 것이다. 구부정한 자세로 집에 돌아온 할머니는 밥그릇 안에 수북이 쌓여 있는 사료를 보며 눈물을 훔쳤다.
‘왜 밥도 안 처묵고 있었나.’
할머니의 타박에도 개는 활짝 웃으며 꼬리를 흔들었다.
…그런 시골의 풍경이 재언의 머릿속을 휘저었다가 사라졌다.
차민재는 지그시 눈을 감고 쓸데없는 명상에 빠진 재언의 모습에 떨떠름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렇게 맛있어요?”
“네… 정말 감동스러웠어요.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날 정도로…….”
말뿐이 아니라 진짜로 재언의 눈에서 눈물이 또르륵 흘러나오고 있었다.
- 멍돌아. 할머니랑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살아야 한다.
어디에선가 익숙한 내레이션이 들리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