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근하는 빌런-316화 (316/324)

316화

밥과 찌개, 그리고 밑반찬까지 모조리 깨끗하게 비운 재언은 거실 소파에 앉아 차민재가 타 준 커피를 한 모금 홀짝였다.

“아… 이런 게 극락이지.”

물론 이것은 고급스러운 원두로 내린 커피가 아니라 한 개에 500원도 안 되는 스틱형 인스턴트커피였다. 하지만 스틱을 2개나 넣어 더욱 진하고 달콤한 커피가 그동안 식도까지 쌓였던 기름을 깔끔하게 내려 주는 기분이었다.

재언은 기다란 다리를 쭉 뻗어 반 정도 남아 있는 커피를 쳐다보면서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진짜 돌아오긴 했구나…….’

솔직히 마약왕에게 납치당했을 땐 기죽은 티를 내지 않고 멀쩡한 척하려 애썼다. 하지만 그런 무서운 상황에서 어떻게 온전히 마음 놓고 쉴 수 있겠는가.

하루하루가 긴장과 불안의 연속이었다. 외줄 타기를 하는 것 같은 긴장감 속에서 지내려니 편하게 잠이 들지도 못했다.

그래서일까. 열심히 음식을 만든 것도 모자라 정리와 설거지까지 끝낸 차민재가 거실로 돌아왔을 땐 신재언은 이미 곤히 잠든 뒤였다.

그동안 아무리 풀어져 지내긴 했어도 재언이 밥을 먹자마자 뒤처리도 돕지 않고 소파 위에 널브러진 모습을 보인 적은 처음이다. 아마 감금 생활이 그만큼 힘들었던 모양이다.

소파에 누워 새근새근 잠든 재언의 고개가 살짝 옆으로 돌아가자 화보처럼 근사한 옆태가 보였다.

차민재는 살짝 미묘한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갸우뚱거리다가 허리 숙여 재언의 턱선을 한 손으로 잡고 이리저리 살폈다.

부드럽게 얼굴을 돌리며 살펴보는 모습은 다른 사람이 봤다면 납치당했던 연인이 다친 곳은 없는지 확인하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 차민재의 눈빛과 표정은 물건을 감정하는 것처럼 서늘하기만 했다.

1년 넘게 한 번만 만나 보자고 기회를 달라고 애걸복걸했으며 사귀는 내내 부드럽고 이상적인 모습만 보여 주었던 사람과 동일 인물이 맞을까 싶을 정도였다.

그가 손을 올려 재언의 얼굴 위에 내려앉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다가 천천히 목덜미로 옮겨간 순간 그의 눈앞으로 날카로운 얼음송곳이 들이 밀어졌다.

“거기까지. 아버지께 더 이상 손대지 마.”

코루루의 얼음송곳을 든 엔레이드맨이 위협적으로 으르렁거렸다. 하지만 차민재는 작은 동물이 아르렁거리며 화내는 것을 인자하게 구경하는 사람처럼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내 애인을 만지겠다는데 너에게 허락을 받아야 해?”

레헬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엔레이드맨은 방금 자신이 느꼈던 오싹한 위화감을 믿었다. 그건 위대하신 아버지의 안전을 위한 본능적인 직감이었다.

그렇게 두 사람이 대치하는 사이 소파에서 자고 있던 신재언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가 느리게 눈을 끔벅이며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봤다.

“…꿈인가?”

하지만 곧이어 눈앞의 상황이 꿈이 아님을 깨달은 그가 벌떡 일어나 두 사람 사이에 섰다.

“잠깐… 왜 싸우는 거야? 둘 다 진정 좀 해 봐요.”

일단 차민재를 등지고 서서 엔레이드맨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원래 사이가 좋지 않은 두 사람이었으니 자신이 잠든 틈을 타 시비가 걸렸을 것이다. 이렇게나 사이가 나쁜데 힘을 합쳐 움직인 이유가 자신이라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닫고 조금 감동적인 기분까지 들었다.

점점 어색해지는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재언은 뒤돌아서 차민재에게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밥까지 차려 주고 뒤처리도 도와주지 못했는데 잠들어서 미안해요. 저도 뭔가 거들었어야 했는데.”

“신경 쓰지 말아요.”

“엔레이드맨 너도 그 위험한 것 그만 내려놔. 왜 계속 그를 자극하는 거니?”

“…….”

재언이 눈을 뜨자마자 표정을 싹 바꾸고 이상적인 연인으로서 행동하는 레헬의 가증스러운 모습을 눈앞에서 목격한 엔레이드맨이 눈을 가늘게 떴다.

엔레이드맨이 종종 녀석은 위험한 놈이라고 재언에게 충언했다. 하지만 재언은 미묘한 표정으로 중얼거릴 뿐이었다.

“아무래도 빌런에겐 위험한 사람이 맞지…….”

그런 식으로 다정하게 웃으며 넘어가는 아버지를 볼 때마다 엔레이드맨은 속이 답답했다. 위대하신 아버지는 모든 것이 완벽하지만 딱 한 가지, 눈치가 없는 게 단점이었다.

“뉴스나 좀 봅시다. 대충 듣기는 했지만,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확인하고 싶군요.”

두 사람을 양쪽에 끼고 소파에 앉은 재언은 리모컨을 들어 TV 화면을 켰다.

이런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뉴스는 제대로 돌아갔다. 영상이 끊기거나 불규칙적으로 나오고 라디오처럼 음성만 나오기도 하지만, 세상 돌아가는 일을 확인하기엔 큰 무리는 없었다.

며칠 전 서울 강남역뿐만 아나리 충북, 경남지역에 출현한 빌런들로 인해 발생한 실종자가 백 명 단위를 기록했다는 소식이 가장 먼저 들렸다.

저 실종자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잘 아는 재언은 잠시 어지럼증이 일어나는 듯해 눈을 질끈 감았다. 무수히 많은 실험관 속에 푸른 피부를 가진 괴인으로 변했던 실종자들 말이다.

침울해진 표정으로 30분간 이어지는 뉴스를 듣던 재언은 기다리던 소식이 들리지 않자 고개를 들었다. 곧이어 그의 얼굴에 황당함이 어렸다.

“히어로 협회에서 아무 움직임이 없어요?”

“네. 아직 대기명령이 떨어진 이후에 별다른 말은 없네요.”

차민재가 히어로 업무용 핸드폰을 확인하며 대답했다.

“에스트리아가 S급 히어로들을 모아 거리를 통제하고 빌런들에게 대응하고 있는데 그게 협회의 공식적인 움직임은 아닙니다. 그 때문에 그 자식도 지금 골머리를 썩는 것 같지만…….”

에스트리아의 정의로운 움직임이야 워낙 잘 알고 있으니 그가 이런 시기에 구심점이 되어 뛰어다닌단 사실은 전혀 놀랍지 않았다.

오히려 신재언이 황당해하는 건 다른 쪽이었다. 대기명령만 내리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그 양반은 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가? 그러니까 대한민국 히어로 협회의 최고 책임자 말이다.

“협회장은요?”

“그게 말이에요, 재언 씨.”

그때 레헬의 말을 끊고 타락한 추기경이 옆에 서서 말을 걸었다.

“아버지. 그 건에 대해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타락한 추기경은 그때만 생각하면 아직도 어이가 없는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그때를 회상하며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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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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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인들을 상대하는 건 어렵지 않았기 때문에 시간을 허투루 쓰고 싶지 않았던 타락한 추기경은 자신 혼자 괴인들을 처리하기로 하고 형제들을 먼저 보냈다.

중간에 코루루가 다시 돌아온 건 예상외였지만, 그는 그녀의 불안해하는 직감도 충분히 이해했다.

타락한 추기경에게 돌진하는 괴인의 머리를 발로 차 수박 터트리듯 부순 코루루가 머리를 쓸어 넘기며 입을 열었다.

“오빠. 아무래도 이 녀석들… 그런 것 같죠?”

신재언처럼 괴인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직접 보진 않았어도 그것들을 상대하다 보면 어느 정도 추측할 수는 있었다.

그들의 고통과 절망에 빠진 눈이 모든 것을 말해 주었다. 푸른 피부의 괴인들은 하나같이 맑고 투명한 눈물을 흘리며 두 사람을 공격했다.

가끔 괴인화가 덜되었는지 평범한 인간과 똑같은 눈과 머리카락이 드러나도 그들의 상대는 연민의 감정을 가진 히어로들이 아니었다.

만약 그들의 정체를 짐작한 이가 히어로였다면 괴인들을 죽이지 않고 되돌릴 방법을 모색하려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동정심이라는 인간적인 감정을 가지기엔 마음이 증오에 먹힌 두 사람에게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누군가에게는 타락한 추기경이 가련하고 불쌍한 어린양을 보듯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하지만 그는 망자로 만들 수 없는 시체는 이용 가치가 없다며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았다.

그의 옆에서 괴인들을 공격하는 코루루도 별다른 바 없었다. 아니 오히려 약이 바짝 올라 있던 탓에 더욱 잔혹하게 괴인들을 부수었다.

많은 수의 괴인이 하나둘씩 쓰러져갔다. 망자가 된 성기사의 신성한 백금색의 검에 마지막 괴인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여기까지는 충분히 예상한 일들이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괴인들을 모두 쓰러트린 타락한 추기경과 코루루가 형제들의 뒤를 쫓기 위해 걸음을 옮기려던 때였다.

하늘 저편으로 작은 마차가 날아가는 게 눈에 띄었다. 그와 동시에 붉은색 하늘이 점차 무너지고 있었다.

“저기에 마약왕 형제가 있는 모양입니다.”

“저걸 쫓아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결계가 무너지고 있어요.”

“형제들을 찾는 게 우선이겠군요.”

여기서 뭉그적거리다간 무너진 결계의 틈에 평생을 갇혀 지낼 수도 있었다. 그렇기에 마차를 뒤쫓는 것보단 형제들과 합류해 이곳을 빠져나가는 게 더 시급했다.

그런데 타락한 추기경의 시선이 마차에서 떨어지지 못했다. 자세히 보니 저건 데스 메이커가 타고 다니는 수상한 작은 마차였다.

그런 자가 이곳에 마약왕과 함께 있다는 건 결코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게다가 그들이 결계를 무너뜨리고 이곳을 떠난단 것은 결국 형제들이 마약왕을 잡는 데 실패했다는 소리였다.

타락한 추기경은 속으로 기도문을 읊으며 마음의 평정을 되찾으려 애썼다. 중요한 건 아버지의 안위뿐이었다.

형제들이 마차를 쫓고 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저 마차에는 아버지가 없을 터였다. 또한 저들은 레드-헬-파이어와의 전투를 피하고자 도망가는 게 분명했다.

나름대로 계산을 끝낸 타락한 추기경이 코루루와 다시 걸음을 옮기려던 순간, 마차에 타고 있던 이의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희미하지만 보이는 얼굴은 ‘그 남자’가 분명했다.

“그곳에 타고 있던 건 김의장이었습니다. 히어로 협회의 책임자. 그가 마약왕과 함께 움직이고 있더군요.”

데스 메이커뿐만아니라 히어로 협회의 회장, 그것도 본사의 최고 권위자가 빌런인 마약왕과 뜻을 같이했다는 소리였다.

재언은 타락한 추기경의 말이 끝나자마자 저도 모르게 차민재를 돌아봤다. 레드-헬-파이어의 표정에 재언은 더욱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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