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7화
평온하다.
그것도 지나치게 평온한 얼굴이다.
자신의 상관이나 마찬가지인 사람이 빌런과 손을 잡았다는 소식에 분노하던가 조금이라도 흥미로운 표정을 짓거나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차민재의 얼굴에는 일말의 흥미도 떠올라 있지 않았다.
그저 무료하다는 표정으로 소파 위에 폴짝 올라온 배추의 등을 손등으로 쓰다듬기만 할 뿐이었다. 그는 김의장의 배신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했다.
아니, 어쩌면…….
재언이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물었다.
“민재 씨는 다 알고 계셨던 겁니까? 김의장 협회장이 마약왕과 손을 잡았다는 사실을요.”
“아뇨, 몰랐어요.”
히어로 협회장이 뒤에서 빌런과 손을 잡았는데 세계 최강의 히어로라고 안심할 수 있을까. 차민재의 말을 완전히 믿기 힘들다고 생각하던 재언은 문득 깨달은 사실에 헛웃음을 지었다.
일반 시민들은 히어로 협회장의 배신과 레드-헬-파이어가 다크 카오스와 사귀고 있는 것 중에 뭐가 더 충격일까 하는 사실 말이다.
그렇게 따지면 협회장이 마약왕과 손을 잡은 게 그리 대단해 보이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차민재는 에스트리아마저 협회를 나가게 했던 김의장의 열등감을 떠올렸다. 그 정도면 빌런의 손을 망설임 없이 잡을 인물이었다.
“아닌 척하고 있었지만, 힘을 얻기 위해선 누구의 뒤통수든 아무렇지도 않게 칠 녀석이니까요.”
히어로 협회의 회장이라는 명예로운 자리에 앉아 있으면서 힘을 얹는다고 뭐가 더 달라질까. 재언의 얼굴에 떠오른 의문을 알아차린 차민재가 설명을 덧붙였다.
“김의장은 비각성자입니다. 그런 그의 주변에는 각성자들로 가득하죠.”
열등감이 김의장의 머릿속을 모조리 차지한 모양이었다. 김의장은 세간에 B급 능력자로 알려져 있는데, 그 또한 거짓이었다.
히어로 협회장이 비각성자라는 사실이 알려지면 대중들의 신뢰를 받을 수 없어 곤란할 테니 숨기고 싶어 하는 이유는 이해할 수 있었다.
비슷한 이유로 빌런 조직 검은 태양의 보스인 원한도 자신이 위험 등급의 능력자라는 거짓 소문을 퍼트렸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히어로들의 대표를 맡은 이가 빌런과 손을 잡으면 그 자리를 어떻게 유지하려고 그런 짓을 했을까 궁금했다.
“김의장은 대체 어떻게 협회장이 됐던 겁니까? 낙하산이라는 말은 알고 있긴 합니다.”
이왕 이렇게 된 것, 재언은 얼굴에 철판을 깔고 히어로에게 히어로 협회의 비밀을 캐고자 물었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번 싸워 백 번 이긴다는 말도 있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고 했어. …물론 나는 빌런이 아니고 히어로를 적으로 두고 싶지 않지만 어쨌든… 마약왕 편에 붙은 놈과는 언젠간 맞붙어야 할지도 모르잖아?’
거기까지 생각이 든 재언은 꼬일 대로 꼬인 자신의 팔자에 우울해졌다.
“광안의 성녀 덕분입니다.”
“아야!”
차민재의 입에서 의외의 히어로 명이 나온 동시에 뒤쪽에서 날카로운 비명이 들렸다.
재언이 뒤를 돌아보니 반대쪽 소파에 앉아 있는 코루루와 뒤에서 그녀의 머리를 땋고 있는 귀신들의 성녀가 보였다. 자신을 향해 몰리는 눈동자들에 코루루가 황당한 얼굴로 제 머리를 쓰다듬었다.
“왜 갑자기 머리를 당기고 그래?”
“아. 미안해요, 언니.”
별것 아닌 작은 소란이란 걸 확인한 재언은 다시 고개를 원래대로 돌렸다.
“광안의 성녀요?”
협회에서 그녀에게 잔인한 짓을 저지르고 이용하는 건 알고 있지만, 그게 김의장이 협회장이 된 것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
“정확히 광안의 성녀는 김의장의 집안 노예입니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설명하자면, 대한민국 히어로 협회의 장은 예로부터 김의장이 속한 가문이 세습해 왔습니다.”
“…협회장이 세습할 수 있는 직위였습니까?”
“공식적으로는 선출직이긴 한데, 공공연하게는요.”
공권력보다도 더 강한 권위를 가진, 협회의 이름을 가진 단체가 우두머리를 선출하는 방식이 세습이라니 그건 조금 충격이었다. 역시 세상은 비리와 권모술수로 가득했다.
차민재가 해 준 이야기를 요약하자면 이랬다.
아주 오랜 옛날부터 명문 세도가였던 김의장의 조상은 많은 재산과 노비를 가진 양반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가문에 속한 노비 중 한 명이 능력을 각성했다. 그것도 굉장한 능력을 가지게 되었으니 그 노비가 바로 초대 광안의 성녀였다.
원래였다면 한순간에 강한 능력을 갖게 된 노비에게 신분을 사면해 주어야 했다. 그리고 관직을 준 뒤 왕을 모시게 해야 하건만, 가주였던 김 씨는 욕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어째서 능력을 가지고도 김 씨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했는지 어느 누구도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거기까지 듣고 있던 재언은 뒤쪽에서 한기가 느껴져 뒤를 힐끔 살폈다.
“깜짝이야!”
귀신들의 성녀가 재언이 앉은 소파 뒤에 바짝 붙어 이야기를 엿듣고 있었다. 차민재의 목소리가 작은 편도 아니고 자식들의 청력이라면 저 멀리서도 충분히 들을 수 있는데 왜 이런 자세로 듣고 있는지 모르겠다.
덥수룩하게 얼굴을 가린 머리카락 사이에서 섬뜩하게 반짝이는 눈동자가 보여서 저절로 소름이 돋았다.
광안의 성녀 이야기만 나오면 워낙 예민하게 반응하는 그녀임을 알기에 재언은 벌렁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다시 고개를 돌렸다.
“김씨 가문과 협회가 손을 잡고 광안의 성녀의 귀속을 더 강하게 만들어 낸 겁니다. 쓰기 편리한 노예를 탐욕스러운 인간들이 놔줄 리 없을 테니까요.”
그렇다면 김의장이 마약왕과 손을 잡고 히어로 협회를 박차고 나간 지금, 광안의 성녀는 어떻게 되었을까.
신재언의 생각을 정확하게 알아차린 차민재가 어깨를 으쓱이며 덧붙였다.
“어차피 지금쯤 폐기처분 됐을 겁니다.”
“네?”
“그게 무슨 소리야!”
귀신들의 성녀가 고개를 번쩍 치켜들며 소리쳤다. 날카로운 목소리에 차민재의 눈썹이 위로 까딱였다.
재언은 갑자기 끼어든 그녀를 진정시키기 위해 머리를 쓰다듬으며 계속 설명해 달라는 듯 차민재에게 눈짓했다.
“광안의 성녀는 나이가 들수록 영혼에 상처를 입습니다. 계속 육체를 옮기는 것도 부담이겠지만 중요한 건 능력 때문에 마음이 버티지 못하는 겁니다. 오히려 지금의 그녀는 제법 오래 버틴 케이스입니다. 원래는 스무 살 언저리에 폐기되거든요.”
제법 상냥한 축에 속하는 그녀의 성격과 그녀가 가진 잔혹한 능력을 생각하면 그럴 수 있는 이야기였다.
사람의 영혼을 흡수해 힘을 쓸 수 있는 능력은 그녀가 버티기에는 무자비한 능력이었다. 날이 갈수록 힘을 쓰는 데 망설임과 회의감이 들 것이다.
그러다 결국 능력을 사용하길 주저하는 광안의 성녀를 폐기하고 영혼을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몸에 넣는다.
어찌 이리 비정할까. 하지만 그들에겐 그녀를 계속해서 이용할 아주 편한 방법이었을 것이다.
재언은 쓴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이거 누가 빌런인지 모르겠네요. 히어로 협회가 지금까지 그녀에게 해 온 짓이 다른 빌런들이 저지른 것보다 지독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영혼도 노예 생활에 익숙해졌는지 광안의 성녀도 별다른 반항이 없으니까요. 지금쯤 이미 몸을 옮겼을 수도 있습니다.”
영생 같지 않은 영생이 과연 옳은 것인가. 재언이 말없이 생각에 잠겨 있자 그의 품에 가만히 안겨 있던 귀신들의 성녀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 미친 여자! 자기 앞길도 못 비추면서 건방지게 내게 입에 바른 소리나 해대더니 꼴좋네요! 제가 다시 찾아내서 죽여 버릴 거예요! 귀신으로 만들어서 영원히 부려 먹겠어요! 건방지게 입만 놀리더니 그런 꼴이나 당해? 꼴좋다, 멍청한 여자!”
날카롭고 호기 있게 소리치던 귀신들의 성녀는 벌떡 일어났다가 다시 신재언의 발치에 주저앉았다.
그녀의 갑작스러운 격한 반응에 재언은 영문도 모르면서 자신의 무릎에 기대 오는 머리를 살살 토닥였다. 왜 이러는지 모르겠지만, 그저 귀신들의 성녀가 광안의 성녀를 싫어해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다.
재언의 달래 주는 손길에도 도저히 분을 참지 못했는지 귀신들의 성녀가 그의 허벅지에 얼굴을 비비며 흐느꼈다.
“아아, 너무 분해요.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어요. 나한텐 그렇게 입에 발린 말 따위를 하더니 정작 본인이 그런 취급받는 걸 아무렇지 않게 여기다니요. 그 위선에 헛구역질이 나올 것만 같아요. 그 미친 여자! 위선자!”
그녀의 흐느낌이 짙어질수록 주변에 귀신들이 점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잔뜩 겁에 질린 재언이 어떻게든 그녀를 위로하려 애썼다.
“…그렇게 분하다면 한번 만나서 속 시원하게 푸는 건 어떻겠니?”
그의 말에 귀신들의 성녀가 잔뜩 눈물 젖은 얼굴을 들어 올렸다.
“그래도 될까요?”
울고 있는 그녀가 딱해진 재언은 허벅지가 축축한 것도 신경 쓰지 않고 더욱 부드럽게 타이르듯 말했다.
“안 될 건 없지. 난 너희의 앞을 막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단다.”
거기까지 말한 재언은 빠르게 뒷말을 덧붙였다.
“아니지. 사고 칠 땐 막긴 했지만.”
아버지의 허락이 떨어졌음에도 귀신들의 성녀는 고개를 들어 올린 채 한참 동안 미동도 없이 허공만 쳐다보았다. 덥수룩하고 지저분해 보이는 머리카락이 얼굴을 가리고 있어서 표정이 보이진 않았지만, 고민하는 듯했다.
이윽고 비척비척 몸을 일으킨 귀신들의 성녀는 재언에게 고개를 끄덕인 뒤 어디론가 사라졌다. 귀신처럼 스르륵 사라지는 그녀의 모습을 보니 신재언의 말대로 광안의 성녀와 담판을 지으러 간 듯했다.
“…아버지.”
엔레이드맨이 옆에서 못마땅한 목소리로 재언을 불렀다. 그게 마치 ‘왜 여동생을 그런 놈팡이에 가는 걸 허락한 것입니까…….’라고 탄식하는 것처럼 들렸다.
하지만 재언은 그것을 착각이라 여기고 혀만 쯧쯧 찼다.
“광안의 성녀 얘기는 내가 들어도 불쌍할 정도인데. 대체 얼마나 싫어하면 그 얘기를 듣고도 저렇게 담판을 지으러 가는 걸까? 어지간히 싫어하는 모양이야.”
광안의 성녀를 동정하는 듯한 말에 재언을 바라보는 눈들이 전부 가늘게 변했다.
‘…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