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8화
- 세상의 모든 악을 물리칠 때까지 마법 소녀 라라가 정의의 이름으로 용서하지 않겠다!
발랄한 소녀의 목소리가 TV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왔다. 거실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아 멍하니 TV를 시청하고 있는 어린 여자아이의 곁으로 광안의 성녀가 다가갔다.
아이는 인기척이 느껴지는데도 고개도 돌리지 않고 TV 화면에만 시선을 집중하고 있었다. 아이의 시선을 따라 마법의 힘으로 악당을 물리치는 3D 애니메이션에 고개를 돌린 광안의 성녀의 얼굴엔 난감함이 띄워졌다.
‘밥을… 먹으라고 해야 하는데.’
이게 자신이 차려 준 마지막 식사일 테니까.
이제 곧 자신의 영혼은 텅 비어 있는 어린 수양딸에게 넘어갈 것이다. 그러면 자신은 폐기 처분이 되고, 아이는 그때부터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된다.
자신 역시 열 살 때 양어머니였던 전대 광안의 성녀의 영혼을 받아 태어났다. 영혼을 옮기는 과정에서 생기는 영향 때문인지 광안의 성녀들은 영혼이 없었던 시절을 기억하지 못한다.
실제로 자신도 양어머니의 죽음에 그렇게 큰 슬픔을 느끼지 못했다.
‘다행이지.’
영혼을 받아 처음 눈을 뜬 순간 자신을 보던 양어머니의 눈동자에 어째서 안도의 빛이 서렸던 것인지 지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광안의 성녀는 딸에게, 아니 클론인 이 아이에게 훗날 제 죽음이 그리 큰 의미를 가지지 않게 된다는 것에 안도했다.
- 세상에는 내가 물리쳐야 할 많은 빌런이 있어. 하지만 난 네 목숨을 위해서라면 모든 걸 걸 수 있어.
히어로는 히어로답게, 빌런은 빌런답게 살아가는 TV 화면 속 세상은 찬란하고 정의감으로 넘쳐흘렀다. 하지만 광안의 성녀는 실제 세상이 그리 아름답지 않다는 걸 잘 알게 되었다.
지금도 어딘가에선 그녀의 세포를 배양해 많은 클론을 만들어 내고 있다. 그중에서 가장 우수한 신체만을 남긴 뒤 모두 폐기한다.
광안의 성녀들은 선택받은 어린 클론을 키우고 영혼의 비율을 맞춘 뒤 본인 역시 폐기된다. 그것이 영생을 살면서도 짧은 생을 마감하게 되는 그녀들에게 씌워진 굴레였다.
“라라. 이제 그만 밥 먹어요. 저녁 식사를…….”
도무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 자신의 클론이자 딸인 아이 쪽으로 고개를 돌려 리모컨이 있어야 할 자리로 손을 더듬었다. 하지만 있어야 할 곳엔 리모컨이 없었다.
아무리 클론이라 할지라도 맨눈으로 쳐다보면 생명을 빼앗을 수도 있었기에 집 안에서도 눈에 흰 천을 두르고 지내야 했다. 능력 덕분에 사람의 생명력에 깃든 정해진 색깔을 구별할 수 있어서 상관없지만, 그 외에 다른 사물은 평범하게 보이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집 안에 있는 물건들 대부분이 자리가 정해져 있고 함부로 바꾸지 않았다. 그런데 아무리 손을 더듬어 봐도 자신이 움직이면서 어딘가로 굴러가기라도 했는지 리모컨이 잡히지 않았다.
라라가 치웠을 리는 없었다. 라라는 영혼이 없는 육체라 가만히 놔두면 그 자리에서 몇 시간이고 움직이지 않는다.
광안의 성녀가 하는 명령을 듣긴 하지만, 자아가 없기 때문에 스스로 무언가를 하지 않는다.
광안의 성녀가 한참 동안 바닥을 더듬거리고 있으니 바닥에 앉아 멍하니 TV를 시청하던 라라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곤란해하는 그녀를 쳐다보다가 거실 구석 한편으로 밀려 나간 리모컨을 잡고 돌아와 그녀의 손에 올려 주었다.
“…라라. 어떻게 이걸…….”
어린 딸이 곤란해하는 엄마를 도와주는 광경 자체는 평범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라라는 일반적인 아이들과는 달랐다.
의지도 없고, 자신 스스로 생각하거나 누군가를 위해 움직이지 않는다. 명령에 의해 움직이고, 먹는다. 단지 그것뿐이었다.
“…오랜만에 밖에 나갈까요? 밖에 빌런들이 나타날지도 모르지만… 엄마가 지켜 줄게요.”
광안의 성녀는 기껏 솜씨를 부려 만들어 놓은 저녁 식사를 그대로 둔 채 라라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섰다.
빌런들의 습격을 받은 도시는 이곳저곳 부서지고 무너져 있었다. 그래도 텅 비어 있는 거리는 두 사람이 걷기에 나쁘지 않았다.
이제 곧 광안의 성녀는 자신의 영혼이 담긴 구슬을 딸에게 물려주는 것으로 텅 비어 있는 어린 육체에 영혼을 채워 넣을 수 있게 된다. 그러면 라라는 전대 광안의 성녀가 걸었던 발자취들을 따라 똑같이 걷게 될 것이 분명했다.
히어로 협회, 아니 자신이 모시는 김 씨 가문에 속박되어 그들이 원하는 대로 능력을 사용하게 된다. 다른 이의 생명력을 빼앗아 사회를 위해 헌신하다가 지금처럼 어디 한군데가 망가지면 다시 그녀를 대체할 클론으로 옮겨 갈 것이다.
대를 거듭하며 영혼에 각인된 굴복과 복종은 그녀를 얽매는 족쇄의 역할을 했다. 그녀들에겐 이제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졌다.
라라 역시 처음에는 텅 비어 있는 자신을 이해하지 못해 괴로워하더라도 차차 나아질 것이다. 지금의 자신이 그랬듯이.
“라라. 저는 후회를 남기고 싶지 않았어요. 언젠간 당신에게 온전한 영혼을 넘기고 싶어서.”
라라는 어차피 자신이 하는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할 테지만 광안의 성녀는 개의치 않았다.
딸의 손을 꼬옥 잡으며 그녀는 구슬을 꺼내 천천히 하늘로 떠오르게 했다. 밝은 빛이 터져야 할 구슬이 깜박거리며 점점 흐려져 갔다.
구슬을 통해 이용하는 힘의 원천은 사람의 생명력이다. 다른 인간의 생명을 빨아들여 힘으로 만들어 내는 이 능력을, 그녀는 더 이상 쓸 수 없어졌다.
생명력을 빨아들여야 하는 사람들의 절망에 빠진 눈을 똑바로 바라볼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제발 살려 달라고 비탄의 눈빛을 보내오는 이들을 대함에 있어 머뭇거림이 생기고 말았다.
그것이 그녀가 폐기 처분당하는 이유였다.
“하지만…, …라라, 당신도 제게서 영혼을 받는다면 언젠간 깨닫게 될 거예요. 내 어머니, 아니 이전에 있었던 그녀들이 그랬듯……. 당신에게 물려주는 건 영혼만이 아닙니다.”
왜 이름을 지어 주었을까.
“13호, 이제 네가 광안의 성녀다.”
영혼이 이동되고, 깨어난 자신이 처음 들은 말이었다. 그전까지 자신에게는 따로 이름이 없었고 어머니조차 자신을 13호로 불렀던 것 같았다.
어머니를 통해 영혼이 계승되자마자 어머니의 이름은 4호가 되었고 그녀가 광안의 성녀가 되었다.
그리고 4호는 그대로 폐기 처분이 되어 혹시라도 세상에 알려지게 될까 봐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지하 감옥에 감금되어 굶어 죽었다. 먹을 의지도 없고 굶주림이나 죽음의 괴로움도 모르는 빈껍데기 인형의 마지막은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라라. 다음 당신의 딸에게 이름을 지어 주도록 하세요.”
“…….”
자신이 광안의 성녀가 될 딸에게 ‘라라’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듯이 말이다.
“다음 대에도, 그다음에도… 그다음에도 이름을 지어 주세요.”
광안의 성녀는 라라의 눈높이에 맞춰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천에 가려져 완전히 보이진 않았지만, 딸의 얼굴이 눈앞에 조금씩 그려졌다.
클론인 딸은 자신과 똑같이 생겼을 것이다. 그 어느 것 하나 다를 것 없이.
“이 영혼이 이 몸에 들어간다고 해도 라라, 당신은 제가 아니에요. 당신은 그냥… 라라일 테니까요.”
지금은 이해할 수 없을 테지만 상관없었다.
빌런들을 죽이고 김 씨 가문을 위해 일해라.
히어로 협회에 복종해라.
단지 이 두 문장만이 그녀가 세상에 살아 있을 수 있는 원동력이고 이유였다. 영혼에 새겨진 복종은 재가 되어 없어진 노비 문서보다도 더욱더 강하게 작용했다.
빌런들의 생명을 빼앗아 힘의 원천으로 삼는 것에 죄책감이 느껴지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럭저럭 버텨 왔다. 영혼이 삐거덕거리는 소리가 들려도 참을 만했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에 딱 한 가지 걸리는 게 있었다.
“나보고 아름답다느니 살아가라느니 하더니 빌런이라니까 바로 태세를 바꾼 것 봐! 이 위선자! 너 같은 위선자가 제일 싫어. 증오스럽다고!”
찢어지는 비명과 귀신들의 비웃음 속에서 증오를 가득 담은 목소리로 절규하는 한 사람이 떠올랐다.
그렇게 괴롭고 비통해할 거면… 빌런이 되지 않았다면 좋았을 것을. 세상의 혼란을 일으키는 빌런을 조용히 보낼 수 없었다.
히스테릭하게 외치는 목소리는 불길을 담은 것처럼 한껏 노기가 담겨 있었지만, 광안의 성녀의 귀에 그녀는 슬퍼하고 있는 것처럼 들렸다.
‘왜…….’
빌런이라서, 빌런은 모두 처단해야 하는 악당들이다. 그러니 우리는 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어째서 슬퍼했던 것일까. 가시 달린 고슴도치가 자신의 치부를 들키지 않으려 잔뜩 가시를 세우고 공격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삶에는 아무 미련이 없지만, 마음 한쪽에 남아 있는 후회 한 가지가 걸렸다.
“그 사람에게 묻고 싶었어요. 왜 그렇게 슬퍼했던 거냐고. 당신은 빌런이고 난 히어로인데……. 내가 당신을 상처 입힌 게 무엇이냐고.”
광안의 성녀는 자신의 구슬을 라라의 조그만 고사리 같은 손에 쥐여 주었다. 이 구슬을 넘긴다면 새로운 광안의 성녀가 태어날 것이다.
“…어.”
작은 목소리. 여리디여린 목소리가 들렸다.
“싫어.”
“…라라?”
의지를 가진, 또렷한 음성.
“싫어, 엄마.”
그리고 어디선가 방울 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