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근하는 빌런-319화 (319/324)

319화

라라가… 처음으로 자신에게 말을 건넸다.

명령이 아닌, 스스로의 의지로…….

광안의 성녀는 자신이 헛것을 들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런 그녀의 마음을 읽은 듯 라라는 또다시 맑고 또렷하게, 하지만 조금은 서툴게 한마디씩 끊어 말했다.

“싫어 엄마.”

“…아.”

그녀는 라라의 어깨를 잡은 손에서 힘을 빼며 신음을 삼켰다. 그저 단순히 TV에서 본 대사를 따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결단코 라라가 자신의 의지를 표출할 수 있을 리 없었다. 하지만 너무나도 타이밍 좋게 당신의 영혼을 내게 주지 말라고, 죽지 말라고 말해 주는 것 같아서 잠깐 침묵했다.

언제부터 이렇게 감상적으로 되었을까. 그럴 리 없을 텐데도 제멋대로 해석해 희망을 품기까지 하고.

광안의 성녀가 마음을 다잡고 자리에서 일어나 라라에게 손을 뻗는 순간, 저 멀리서 방울 소리가 들렸다. 여러 개의 작은 방울을 엮어 만들어 내는 청량한 소리, 하지만 그 소리의 끝엔 우울하고 기괴한 울음소리가 함께했다.

광안의 성녀는 곧장 라라를 뒤로 숨긴 뒤 청각을 예민하게 곤두세웠다.

그녀가 잔뜩 경계하는 것이 무색하게도 상대는 자신을 숨기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우울한 귀곡 소리가 정적이었던 공원에 울려 퍼졌다.

다른 평범한 이였다면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이기지 못하고 기절하거나 비명을 지르며 내달렸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사악한 기운이었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세상에서 가장 사특한 색을 가져야 할 지금 상황의 주동자는 매우 따뜻하고 상냥한 색을 가지고 있었다. 대부분의 인간은 매우 탁하고 빈말로도 좋다고 할 수 없는 색을 가졌다.

빌런들은 말할 것도 없다. 그들은 탁한 걸로도 모자라 시꺼멓게 물들어 있었다.

물론 아주 가끔 맑고 투명한 색을 가진 상냥하고 따뜻한 사람이 있긴 했다. 점점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사람이 가진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광안의 성녀는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 그녀가 빌런이라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흥.”

날카로운 코웃음 소리에 광안의 성녀는 라라를 등 뒤로 숨기며 긴장하는 와중에도 쓰게 웃었다.

앙칼지게 코를 울리는 소리는 귀신들의 성녀가 말로 시비를 걸기 직전에 내는 것이었다. 그녀의 시비에 익숙해진 자신이 어이없기도 했다.

“또 시비를 걸러 오셨나요?”

귀신들의 성녀가 입을 열기 전에 먼저 광안의 성녀가 말문을 꺼냈다. 그에 귀신들의 성녀가 눈을 가늘게 뜨며 입을 다물었다.

광안의 성녀를 찾아오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귀신들에게 대략적인 위치만 듣고 와도 저 멀리서부터 하얗게 발광하는 두 모녀가 맨눈으로도 보였다.

“오늘은 그만 돌아가세요. 여기엔 제가 지켜야 할 시민들이 없으니까요. 그리고 딸과의 마지막 인사를 하고 싶어요. 귀신들의 성녀, 당신이 아무리 비정한 빌런이라도… 마지막으로 나를 동정해 주길 바랄게요.”

“…미친 눈깔, 너… 정말 웃기는 소리를 하네. 나한텐 세상이 아무리 괴로워도 살라고 주절거리더니 본인이 죽는 건 아무렇지도 않아? 그럴 거면 나한테 왜 그런 말을 했어? 표정도 단번에 바꾸더니 자기가 한 말까지 바꿔?!”

귀신들의 성녀가 히스테릭하게 비명을 지르며 가지 방울을 휘둘렀다. 그러자 이미 공원 여기저기에 모여 있던 악귀들이 고막을 찌르는 듯한 소리를 내며 달려들었다.

살기가 없는 것이 죽일 목적은 아닌 듯하지만, 왜인지 모르게 귀신들의 성녀는 오늘도 잔뜩 화가 나 있었다.

빌런과 히어로라는 대립 관계 속에서 서로에게 분노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왠지 모르게 그녀가 화를 내는 게 자신 때문인 듯한 기분이 들었다.

자신 쪽으로 달려오는 귀신들에 잠시 고민하던 광안의 성녀는 눈을 가린 안대를 풀어 귀신들의 혼을 흡수하며 달려갔다. 생명력이 없는 귀신들의 영혼으로는 힘을 얻을 수 없지만, 귀신들의 성녀를 당황하게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자신의 앞을 막은 귀신들을 물리치고 다시 눈을 감은 그녀는 팔을 뻗어 귀신들의 성녀를 뒤로 넘어뜨리며 함께 넘어졌다.

“!!”

귀신들의 성녀가 가지 방울을 흔들기 전에 그녀의 양 손목을 붙잡고 바닥에 고정한 뒤 몸을 살짝 일으켜 얼굴을 마주 보았다. 그 와중에도 광안의 성녀는 눈을 굳게 감고 있었다.

어차피 저쪽도 전력을 다할 생각이 없어 보였으니 자신도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귀신들의 성녀… 당신은 늘 내게 화가 나 있군요. 언제나 사사건건 시비를 걸기 바빠요.”

“그건 네가!”

“그 말은 당신이 빌런 ‘귀신들의 성녀’인걸 몰랐을 때 했던 말들이에요. 왜냐면… 나는 히어로고 당신은 빌런이니까요. 저는 당신을 잡아야 하는 히어로예요. 그게 그리도 화가 났나요? 지금까지도 계속 이를 갈 정도로…….”

강제로 바닥에 눕혀진 탓에 귀신들의 성녀의 덥수룩한 머리카락이 옆으로 흘러내려 얼굴이 훤히 드러났다. 하지만 광안의 성녀의 감은 눈은 절대 뜨이지 않았다.

“딸에게 마지막 인사를 나누지 못하게 할 정도로 화나고 분했나요? 그러면 사과할게요. 미안해요, 귀신들의 성녀. 당신을 상처 입히려고 한 말은 아니었어요. 당신이 빌런인 줄 알았다면 그런 말은 하지 않았을 텐데.”

“마지막 인사? 그래, 차라리 내가 보여 줄게. 지옥을.”

그러자 광안의 성녀가 무언가를 확인하려는 듯 퍼뜩 고개를 들어 올렸다.

‘눈도 안 보이는 주제에 뭘 확인하려고?’

광안의 성녀의 손에서 힘이 살짝 빠진 사이에 귀신들의 성녀가 스산한 미소를 지으며 재빠르게 가지 방울을 휘둘렀다. 곧이어 바닥에 누워 있는 그녀들의 아래로 거대한 지옥문이 생겨나 끼익 소리를 내며 열렸다.

귀신들의 창백한 손들이 이승에 닿기 위해 위로 뻗었다가 두 사람을 붙잡아 아래로 끌어 내리기 시작했다.

잠시 후, 두 사람을 완전히 집어삼킨 저승의 문이 끼익 소리를 내며 닫히고 공원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정적에 휩싸였다.

그 모습을 무표정한 얼굴로 멍하니 지켜보던 라라가 고개를 돌려 위를 쳐다보았다.

어느새 라라의 곁으로 다가온 피에로 가면의 남자가 한숨을 푹 쉬었다.

“귀신들의 성녀가 또 사고를 쳤어……. 그렇게 광안의 성녀가 싫으면 처리하면 될 걸 왜 같이 저승으로 가 버린 거야?”

“…아버지께서 걱정하시던 일은 벌이지 않았으니 그건 칭찬할 만하지요.”

“아무리 사람들이 모두 대피해 없다고 해도 히어로들은 여전히 주변을 순찰하는 중이잖아? 이런 곳에서 귀곡성 가마가 나타나는 것만큼 큰일도 없을 거라고.”

신재언이 어깨를 으쓱이면서 평평한 땅을 발로 몇 번 내리쳤다. 이승에서 일어나는 일은 어떻게든 지켜보거나 말려 볼 수 있겠지만, 저승의 일은 재언이 끼어들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저승을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 귀신들의 성녀는 걱정이 없지만, 끌려간 광안의 성녀가 문제였다.

재언이 봤을 때도 귀신들의 성녀는 광안의 성녀에게만큼은 지나치게 예민하게 굴었다. 히어로들이 그들을 향해 저주의 말을 퍼부었던 적이 한두 번도 아니고, 입에 담지 못할 말들도 많이 들었다.

히어로뿐만 아니라 평범한 일반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솔직히 광안의 성녀가 내보이는 반응은 양반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도 유독 귀신들의 성녀는 광안의 성녀가 하는 말에 상처를 입고 사사건건 끼어들어 일을 크게 만들었다.

‘이거 참. 좋아하는 사람 괴롭히는 어린애도 아니고.’

사실 신재언도 다른 사람이었다면 지금 좋아하는 사람 괴롭히는 성격 나쁜 어린애냐고 어르고 달랬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귀신들의 성녀와 광안의 성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상극인 데다 그런 분위기도 전혀 없었다.

눈만 마주치면 서로 죽이지 못해 안달이었던 게 엊그제인데 갑자기?

신재언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제법 일리 있긴 하지만, 세상만사가 그의 뜻대로 흘러갔다면 마약왕은 착하게 말을 듣는 자식이었을 것이다.

“안녕, 라라. 우리 구면이지?”

쓸데없는 생각을 털어 낸 신재언이 무표정으로 자신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는 라라에게 인사하며 가면을 벗었다.

차민재가 말해 주기로는 영혼이 옮겨지며 새로 태어나는 광안의 성녀들은 이전의 기억이 없다고 했다. 그러니 라라에게는 얼굴을 보여 줘도 상관없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었다.

“…….”

그런데 재언의 인사에 라라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엥?”

재언은 작은 소녀의 정수리를 쳐다보며 크게 당황하는 표정을 지었다.

영혼이 없어서 인형이나 마찬가지라고 하지 않았던가. 세상에 어느 인형이 자기 의지를 갖고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겠는가.

@

광안의 성녀가 천천히 눈을 떴다. 자신이 있는 곳은 작고 허름한 주택 안이었다.

환하게 보이는 시야에 안대가 풀어져 있다는 것을 깨달은 그녀가 허겁지겁 눈을 감았다. 그때, 옆에서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여긴 저승이야. 네 눈 따위는 통하지 않으니까 떠도 돼. 하지만 내 얼굴은 보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네가 말했던 것과 달리 난 추악하니까.”

“…….”

“내 말을 못 믿겠어? 여긴 이승이 아니라니까!”

높고 날카로운 목소리에 귀에서 피가 흘러나올 것만 같았다. 광안의 성녀는 자신이 눈을 뜰 때까지 옆에서 귀신들의 성녀가 소리 지를 것 같다는 생각에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그리고 못마땅한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새파랗게 질린 얼굴을 덥수룩한 머리카락이 덮고 있었는데, 그 사이로 보이는 지나치게 빨간 입술이 눈에 띄었다.

생각보다 어려 보이는 얼굴을 마주하며 광안의 성녀는 난생처음으로 생명을 빼앗기 위해서가 아닌 그저 단순히 상대를 바라보기 위해 눈동자를 들어 올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