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0화
눈이 마주치자마자 귀신들의 성녀가 눈을 가늘게 뜨고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뭘 봐?!”
“…….”
어쩌라는 걸까.
눈을 뜨라고 재촉할 땐 언제고 눈을 바라보니 불같이 화를 내며 패악을 부렸다. 하지만 광안의 성녀는 귀신들의 성녀와 알게 된 날부터 항상 걸려 왔던 시비였기에 익숙하게 넘길 수 있었다.
게다가 따지고 보면 그녀는 자신이 눈을 감고 기절해 있는 동안 처리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 있었음에도 깰 때까지 곁에서 지켜봐 주었다.
그것만으로도…….
“여기가… 저승이라고요? 그런 것치곤…….”
“그러면 우리가 뭐, 저승 시왕들에게 재판이라도 받을 줄 알았어? 영혼이 아닌 육체가 온 것이니 당신은 이 광경을 못 봐.”
살아 있는 채로 저승에 올 일이 없는 게 분명할 텐데도 귀신들의 성녀는 의문스러운 표정을 짓는 광안의 성녀를 한껏 비웃었다. 그러면서 습관적으로 눈을 감으려는 그녀를 용케도 알아차리고 험악한 표정으로 으르렁거리기도 했다.
한평생 눈을 감고 살아온 광안의 성녀는 오히려 눈을 뜬 쪽이 신경 쓰이고 불편하지만, 의식적으로 눈을 뜨고 있으려 애썼다.
“내 눈에는 잔뜩 보이거든. 제발 이승으로 돌려보내 달라고 울부짖는 죄가 많은 귀신이.”
산 사람의 냄새에 망령들이 집 주변으로 모여 있었다. 덥수룩한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눈동자에 창문 너머로 집 안쪽을 향해 손을 뻗는 흉악하게 생긴 귀신들이 들끓는 게 비치니 말이다.
저런 아비규환의 수라도를 그녀가 직접 보지 못하는 것을 다행이라 해야 할지, 아니면 저런 걸 보는 자신을 동정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 주택 밖으로 나가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제아무리 날고 기는 히어로들도 여기선 힘을 쓸 수 없으니까. 나가는 순간 육체는 악귀들에게 붙잡힐 테고 악귀들은 네 망가진 영혼을 비집고 들어가 몸을 차지할 정도로 집념이 강해.”
귀신들의 성녀가 손바닥을 펼쳐 그 위에 후, 하고 입김을 불자 작은 꽃 한 송이가 나타났다. 어디서든 볼 수 있는 들꽃이었다.
그런데 광안의 성녀에게는 저 꽃이 그저 흔한 들꽃이라기엔 왠지 모르게 익숙한 기분이 들었다. 곰곰이 생각에 잠긴 그녀를 쳐다보는 귀신들의 성녀의 눈이 가늘어졌다.
“몸을 빼앗긴 순간부터 영원히 저승의 강을 정처 없이 떠돌게 될 거야. 지금은 내 덕에 살아 있는 육체를 가지고 저승에 있을 수 있게 된 것이지만, 악귀들에게 빼앗긴 육체는 이승으로 올라가지도 못해. 이 검은 강을 악귀들에게 빙의된 채 평생 떠돌아야 한다니……. 네게 딱 걸맞지 않아?”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귀신들의 성녀가 낡은 주택 안으로 악귀들이 들어올 수 없게 막고 있다는 건 누구라도 알 것이다. 만약 악귀들이 주택 안으로 들어온다면 귀신들의 성녀에게는 다가갈 수 없을 테니 광안의 성녀는 독 안에 든 쥐 꼴이었다.
저승의 성녀라고도 불리는 그녀와 이승이 아닌 저승에서 싸워야 한다면 꼼짝없이 목을 내놔야 할 판이었다.
“저를 왜… 이곳에 데려온 거죠? 어차피 죽일 거라면……. 당신의 손을 더럽히지 않을 방법이 있었을 텐데요.”
“네가 너무 싫어서. 당연하잖아. 네가 원하는 일을 하는 걸 내가 왜 그냥 두고 봐야 해?!”
침착하게 묻는 광안의 성녀를 한껏 비웃으며 귀신들의 성녀는 주먹을 쥐었다. 그런데 저도 모르게 부들부들 떨 정도로 강하게 쥔 힘에 뾰족하고 검은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어 조금씩 피가 흘러나왔다.
문득 시선을 내려 그 모습을 본 광안의 성녀가 그런 그녀의 손을 잡고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이렇게 손을 잡으면 기분 나쁘게 무슨 짓이냐고 소리를 지를 거라 예상했다. 그런데 귀신들의 성녀는 입을 꾹 다문 채 징그러울 만큼 창백한 제 손등을 쳐다볼 뿐이었다.
아니, 그녀의 시선은 손 아래에 놓인 혈기가 도는 분홍빛 손바닥과 손끝에 향해 있었다.
움켜쥔 손가락을 살살 펴 상처가 난 손바닥을 살피던 광안의 성녀가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구슬을 꺼내려 했다. 하지만 그녀에게 구슬은 없었다.
이미 라라의 손에 구슬을 쥐여 줬기 때문이다.
‘…왜 나는 지금 살아 있는 거지?’
구슬은 광안의 성녀의 영혼을 담을 수 있는 매개체. 그것이 없으면 힘을 쓸 수도 없는 건 당연하고 살아 움직일 수도 없어야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왜 자신은 아직 살아서 육체에 귀속되어 있는 것일까. 이곳이 저승이라서……?
저승에 끌려온 것보다도 더 혼란스러운 사실에 광안의 성녀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이 작고 여린 손바닥에 생긴 손톱자국 하나도 지우지 못하는 자신에 무력감을 느꼈다.
안타까운 마음에 엄지로 손바닥을 쓸어 넘기자 귀신들의 성녀가 간지러웠는지 손가락을 옹송그리며 웃었다.
기분이 나빴다가 좋아지기까지 1초도 안 걸리는 까다로운 고양이를 보는 것 같은 느낌에 광안의 성녀는 웃고 있는 귀신들의 성녀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생명을 빼앗기기 직전의 공포심 가득한 눈동자가 아닌, 패악을 부리고 시비를 걸며 똑바로 바라보다가도 지금은 상황에 맞지 않게 웃는 얼굴을 말이다. 도통 그녀의 감정을 파악할 수가 없었다.
늘 자신의 앞에선 불구대천지원수를 보는 것 같이 화만 내다가 단둘이 되니 웃어 준다. 꼭 처음 만났을 때, 자신이 그녀가 ‘귀신들의 성녀’인 걸 알게 되어 공격하기 전에 지었던 따뜻한 분위기와 같았다.
생경한 느낌에 귀신들의 성녀를 뚫어지게 쳐다보자 그녀는 또다시 웃는 얼굴을 지우고 음울하고 어두운 표정으로 기분 나쁜 표정을 지었다.
“날… 쳐다보지 말라고 했지?”
“어째서죠?”
“기분 나쁘니까!”
그러면서 아래쪽을 한 번 쳐다본 귀신들의 성녀가 광안의 성녀를 거칠게 밀어냈다. 우울한 낯빛으로 주택을 쭉 돌아보더니 입을 열었다.
“여긴 저승과 이승을 이어 주는 유일한 곳이야. 좋은 말로 할 때 여기 얌전히 있는 게 좋아.”
“언제까지요?”
“흥.”
그렇게 저승에서의 기묘한 생활이 시작되었다.
한참이 지나도 바깥 풍경이 변하지 않으니 몇 시간, 혹은 며칠이 지났는지 전혀 모르겠다. 먹지도 싸지도 않아도 되니 아무것도 없는 낡은 저택에서 지내는 것에는 큰 무리가 없었다.
거기다가 자신을 볼 때마다 항상 털을 바짝 세우고 경계하며 기분 나빠하는 귀신들의 성녀를 보고 있자면 그리 심심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녀에게 더 불편한 생활은 아닐까 고민이 들 정도였다.
시간이 흘러 눈을 뜨고 다니는 것이 익숙해질 즈음이었다. 간혹 낡은 저택에서 희미한 환상 같은 게 보이기 시작했다.
어느 날은 어떤 부부가 목을 매고 있는 환상이 언뜻 보였다가 사라졌다.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던 광안의 성녀는 문 앞에서 들리는 어린아이들의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였다.
‘기분 나빠!’
‘와아, 귀신이다. 기분 나쁘게 여기 쳐다보지 마!’
귀신들의 성녀는 어째서 자신을 이곳에 두고 아무 짓도 하지 않고 경계하기만 할까. 이해할 수 없었다.
정말로 기분 나쁘고 싫었다면 그녀 또한 이곳에서 함께 지내며 불편함을 참아야 할 이유가 있을까. 광안의 성녀는 눈을 살짝 감으며 한숨을 쉬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궁금해 여기 온 지 얼마나 지났냐고 물자 간단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대답이 돌아왔다.
“저승에서 10년은 이승에서 1년이니까.”
…얼마나 있었는지 묻고 싶었던 것뿐인데.
시간이 좀 더 흘러, 광안의 성녀는 귀신들의 성녀에게 한마디씩 말을 건넸다.
“여기선 환각이 보이던데요. 괜찮으신가요?”
“어. 신경 쓰지 마. 여긴 내가 저승과 이승 사이에 만든 곳이니까.”
“여긴 정말 저승이 맞는 건가요?”
“정확히 말하면 천국도 지옥이 아닌 곳이지. 내가 죽으면 이곳에서 불자를 깨달을 때까지 영원히 수행해야 할 곳일지도 몰라.”
기분 나빠하는 티를 다 내면서도 질문에는 꼬박꼬박 대답해 준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오지는 않고 거리를 둔 채 지켜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렇다고 더 멀어지지도 않았다.
곁에는 귀신들의 성녀밖에 없는 저승에서 광안의 성녀는 그녀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가장 궁금했다.
처음엔 무릎을 꿇은 자세로 꼿꼿하게 앉아 있던 광안의 성녀는 이젠 아무것도 없는 바깥을 구경하며 명상에 잠길 수 있는 지경에 이르렀다.
광안의 성녀는 의자에 앉아 의도를 알 수 없는 귀신들의 성녀의 행동에 대해 생각하던 중 꾸벅꾸벅 잠에 빠졌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진 모르지만, 저승에서는 먹지 않아도 상관없었던 육체가 잠은 필요했던지 점점 피곤함을 알려 왔다. 어떻게든 버텨 오던 광안의 성녀는 결국 얕은 잠에 빠져들었다.
잠결에 꿈을 꾸었다. 귀신들의 성녀와 처음 만났을 때였다.
라라에게 영혼을 주기 직전, 저도 모르게 떠올린 사람, 내가 당신에게 무슨 상처를 주었느냐 묻고 싶었던 그 사람.
히어로와 빌런인 우리 사이에서 대체 그렇게까지 분노하고 상처 입었던 이유가 무엇이냐고 묻고 싶었다.
그 기억 속 한편에서 귀신들의 성녀가 말했다.
“귀신들이 인간들보다 훨씬 낫지. 귀신들은 원과 한을 가지고 있지만, 사람은 악의를 가지고 있잖아!”
“죽을 만큼 힘들었지.”
무엇에 그렇게 죽을 만큼 힘들었냐고 묻는 것 대신 광안의 성녀는 조잘거리는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그래도 당신이 살아 있어서 다행이에요.”
“…….”
눈을 감고 있어서 희미하게 색으로만 구별하고 있었던 그때와는 다르게 귀신들의 성녀의 얼굴이 훤히 보였다.
살아 있어서 다행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는지 얼굴을 잔뜩 붉게 물들인 채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지 모르는 어린 소녀가 입만 벙긋거리는 게 보였다.
그때, 둘 사이로 악령이 나타났다. 광안의 성녀를 돕기 위해 가지 방울을 흔들어 귀신을 물리친 그녀가 기대 어린 눈동자로 고개를 들었다.
칭찬을 바라는 눈동자에 자신은…….
“당신, 빌런이었군요. 당신이 바로 그 귀신들의 성녀?”
자신은 서늘하고 경멸 어린 목소리로 물으며 한 걸음 물러난 뒤 귀신들의 성녀를 공격했다. 처음엔 어리둥절해하던 그녀는 뒤로 물러났다가 곧이어 휘몰아치는 듯한 배신감에 몸을 떨었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이 지금까지 당했던 수많은 배신을 새삼스럽게 느끼도록 했고, 그것은 씻을 수 없는 거대한 상처로 남았다.
어째서 계속 당신이 생각났던 것인지, 마지막 남은 후회의 감정을 드디어 깨달았다.
천천히 잠에서 깨어난 광안의 성녀는 자신을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그녀에게 입을 열었다.
“귀신들의 성녀… 내가… 당신을 상처 주었군요.”
그리고 그 상처는 부메랑이 되어 자신에게로 돌아왔다. 귀신들의 성녀와 만난 뒤로 계속 버텨 왔던 영혼에 상처를 입었고, 결국 폐기 처분될 정도로 망가졌다.
손을 뻗어 얼굴을 가린 덥수룩한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그리고 한참 동안 귀신들의 성녀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기분 나쁘니까… 쳐다보지 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