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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근하는 빌런-321화 (321/324)

321화

‘절 언제까지 이곳에 가둘 생각인가요? 당신이 원하는 게 대체 뭡니까?’

광안의 성녀는 그렇게 묻는 대신 다른 것을 물었다.

“귀신들의 성녀. 당신의 이름은 무엇인가요?”

“뭐? 내가 그런 걸 알려 줄 것 같아?!”

역시 이번에도 좋은 반응은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광안의 성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귀신들의 성녀, 당신이 이름을 알려 주지 않으면 곤란해요.”

“왜?”

“당신과 나의 칭호가 비슷하지 않나요. 이렇게 계속 함께 있을 거면 이름으로 부르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제가 당신을 광안의 성녀라고 잘못 부르면 어떻게 하죠?”

“뭐? 싫어!”

귀신들의 성녀는 신경질적으로 소리를 지르더니 곰곰이 생각하는 듯 입을 꾹 다물었다.

그녀는 지금 낡은 주택의 복층 난간에 걸터앉아 귀신처럼 광안의 성녀가 있는 아래층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광안의 성녀를 감시하는 동시에 악귀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꼼꼼하게 살피기 위함이었다.

핏기 하나 없이 창백한 자신의 발끝을 내려다보던 귀신들의 성녀가 타박했다.

“그러면 네 이름부터 먼저 알려 줘야 할 거 아니야!”

알려 줘도 미친 눈깔이라고 부를 거면서, 이름을 알려 주면 그렇게 불러 줄 것처럼 말은 잘한다.

하지만 그것보다는 다른 이유로 광안의 성녀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눈은 또 하나의 표정이라고 하더니, 눈을 가릴 수 없게 된 그녀는 이전보다 얼굴에 감정 표현이 좀 더 잘 드러나곤 했다.

“제게 이름은 없어요. 단지 ‘광안의 성녀’일뿐이에요. 영혼을 받고 나서 히어로 협회 관계자에게 들었던 이름은 ‘13호’였고요. 저를 설명할 수 있는 건 그것뿐이네요.”

그마저도 그녀의 진짜 이름은 아니었다. 무수히 많은 클론 사이에서 그나마 가장 쓸모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숫자일 뿐이었다.

귀신들의 성녀가 코웃음 치는 소리가 위쪽에서 들렸다.

“진짜 멋대가리 없는 이름이네. 그러니까 너를 ‘13호’라고 부르라는 말이야? 웃기지도 않아! 내가 왜 네 이름을 그렇게 친근하게 불러야 하는데? 넌 내 적이야. 난 널 죽어도 용서하지 않을 거라고, 이 위선자!”

“…….”

광안의 성녀는 식은땀을 흘리며 습관적으로 눈을 감고 위쪽을 올려다봤다. 13호라는 명칭도 이름이라고 소개하기 애매하다고 했는데도 귀신들의 성녀는 어쩐지 신난 목소리로 한껏 비웃으며 소리쳤다.

그건 그저 편하게 구분하기 위해 지칭해 놓은 번호였다고 덧붙여 말해 보았지만, 그녀의 귀에는 들어가지 않는 듯했다.

“어쨌든 널 가리켜서 13호라고 불렀다며. 그러면 그게 이름이지 별거겠어?”

“…그 명칭을 가졌을 때의 기억은 가지고 있지 않아요. 그냥 저를 그렇게 불렀다는 것만 알고 있을 뿐이지…….”

구구절절 덧붙이는 설명에도 귀신들의 성녀는 그저 웃고만 있을 뿐이었다.

그녀가 웃을 때마다 주택 밖에서 안을 구경하던 귀신들이 덩달아 깔깔 웃었다. 그런 그들을 본 귀신들의 성녀가 건방지게 뭘 따라 웃느냐며 가지 방울을 휘둘러 보이지 않는 무형의 힘으로 귀신들을 흠씬 두들겨 팼다.

자신의 말을 전혀 듣지 않는 모양새에 광안의 성녀는 결국 더 설명하기를 포기했다.

“…그래요. 당신 말이 옳아요, 귀신들의 성녀. 그러면 제가 이름을 알려 주었으니 이젠 당신의 차례예요. 당신의 이름은 무엇인가요?”

그러자 귀신들의 성녀는 덥수룩한 머리카락 사이에 숨어 있는 빨간 입술에서 웃음기를 싹 지우고 일자로 굳게 다물었다.

그렇게 한참이 지난 후, 침묵하던 그녀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마리암.”

“마리암…….”

“그래. 엄마가 필리핀 사람이었어.”

“좋은 이름이에요.”

하지만 귀신들의 성녀는 그녀의 따뜻한 말에 더 이상 속지 않으려 했다. 저랬다가 저번처럼 다시 돌변해서 그때처럼 죽어라 덤벼들지도 모른다.

귀신들의 성녀에게 광안의 성녀는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 노는 악독한 마녀였다.

.

.

.

서로의 이름을 교환하고 시간이 흘러 또 어느 날이었다. 해가 없어서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진 알 수 없지만, 적어도 하루 정도는 지났을 것이라 예상되었다.

퍽!

갑자기 밖에서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둔탁한 무언가, 그래 마치 인간이 바닥에 추락하는 듯한 소리였다.

의자에 앉아 사색에 잠겨 있던 광안의 성녀는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귀신들의 성녀가 만든 저택은 이따금 그녀에게 환상을 보여 주거나 환청을 들려주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이 뜻하는 바를 도저히 알 수가 없어서 그 소리를 무시하고 있었다. 그것도 잠시, 집 전체를 울리는 소리에 광안의 성녀가 그쪽으로 다가가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그때 서늘한 손이 그녀의 옷깃을 잡아 걸음을 멈추게 했다.

고개를 돌려 뒤를 확인하니 어느새 위쪽에서 내려왔는지 귀신들의 성녀가 창백한 얼굴로 광안의 성녀의 옷소매를 꼭 쥐고 있었다. 소매를 쥔 손가락에 힘이 얼마나 들어가 있는지 마디가 부르르 떨렸다.

“귀신들의 성녀?”

“가지 마. 진짜로 거긴 가면 안 돼. 그쪽을 봤다간 결계가 깨질지도 몰라. 여기는 저승에서 내가 만들어 낸 가상의 공간이야. 위대하신 아버지께서 만들어 주신 별장이었다면 좋았겠지만, 이곳은 내 힘의 원천이라 불안정해…….”

점점 더 작아지는 그녀의 말에 광안의 성녀는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았다. 손을 뻗어 귀신들의 성녀의 얼굴을 덮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자 이마에 식은땀이 배어 있는 게 느껴졌다.

아무래도 바깥에서 들린 저 소리가 그녀에게 싫은 기억이라도 떠올리게 한 모양이었다.

사실 광안의 성녀는 이곳에서 들리거나 보여 주는 환청, 환각이 어쩌면 ‘마리암’과 연관되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짐작했다.

바깥에서 안쪽을 향해 외치는 듯한 환청은 대부분 어떤 한 사람을 매우 경멸하고 헐뜯는 내용이었다. 또한, 집 안에서는 부부로 보이는 사람들이 천장에 목을 매달아 종일 흔들거리기도 했다.

“귀신들의 성녀… 여기에서 일어나는 환각들은 전부 당신과 관련이 있는 것들인가요?”

“흥. 대충 짐작하고 있었으면서 천연덕스럽게 묻기는. 호호호… 네가 말한 대로야.”

그런데 날카롭게 웃던 귀신들의 성녀가 돌연 기침하며 비틀거렸다. 그런 그녀의 어깨를 잡고 부축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이곳은 사람이 편하게 누울 수 있는 적당한 공간이 없었다.

결국, 어쩔 수 없이 그녀를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광안의 성녀는 고분고분하게 제 어깨에 이마를 기대는 마리암을 내려다봤다.

“필리핀에서 만난 엄마를 임신시키고 아빠는 가족들의 허락을 받아 온다며 아빠는 가 버렸어. 엄마는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 아빠를 수소문해서 찾아갔지만, 아빠는 이미 다른 여자와 결혼해서 남동생을 낳은 다음이었어.”

거기까지 말하고 입을 꾹 다문 귀신들의 성녀의 눈동자에 불쾌한 빛이 감돌았다. 어찌나 형형하게 빛나던지 악귀들의 원한 어린 눈동자와는 차원이 달랐다.

“이혼하고 울며 겨자 먹기로 엄마와 결혼한 아빠는 쓰레기였어. 엄마를 목 졸라 죽이고 자기도 목매달아 자살해 버렸으니까. 옛날부터 귀신을 볼 줄 알았던 나는 엄마 아빠가 귀신이 된 것도 몰랐어. 그저 상냥해진 엄마 아빠가 좋았을 뿐이었어. 시체에 구더기가 들끓어도 아빠가 상냥하게 웃어 주는 게 너무 기뻤거든.”

천장에서 계속 흔들거렸던 두 구의 시신은 마리암의 부모였던 것일까.

광안의 성녀는 자신이 누군가를 동정할 처지가 아니라는 것쯤은 잘 알았다. 하지만 어쩐지 그때의 상황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당신도 참으로 기구한 삶을 살았구나.’

“마리암. 대체 왜 저를 이곳에 데려온 건가요? …저를 정말 죽이고 싶었다면 이곳에서 나를 내쫓기만 하면 되잖아요. 차라리 저를…….”

“…위대하신 우리의 아버지께서는 너와 담판을 지어도 좋다고 허락해 주셨어. 하지만 정작 너는… 다른 사람에게 영혼을 넘기려고 했잖아. 누구의 방해도 없는 곳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했을 뿐이었어. 여긴 현실 세계와는 시간도 느리게 흐르니까 느긋하게 담판 지으려고. 어떻게 해야 네게 가장 잔인할까 고민 중이었던 것뿐이니까 오해는 하지 마.”

귀신들의 성녀가 잔뜩 짜증을 부리며 안 그래도 날카로운 눈매를 더욱 부릅떴다. 그런데 이번엔 밖에서부터 소란스러운 환청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놈 죽은 건가?’

‘젠장. 그러니까 위험하다고 내가 하지 말자고 했잖아.’

‘몰라. 우리가 등 떠밀었어? 지가 누나한테 꽃 따다 주겠다고 올라간 걸 왜 내 책임으로 돌려?!’

환청 속 대화가 계속될수록 마리암의 눈에 가득 찬 증오가 점점 검은빛으로 바뀌었다.

‘기분 나쁜 년.’

‘귀신 쓰인 게 분명하다니까.’

‘얼굴만 봐도 불쾌해. 아우, 귀신처럼 생겨선…….’

광안의 성녀는 마리암을 내려다봤다. 식은땀을 흘리며 숨을 고르는 모습에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 주자 그녀가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털었다.

“얼굴 보지 마! 불쾌하니까!”

그녀가 줄곧 했던 말의 이유를 드디어 깨달았다. 자신이 쳐다보는 게 불쾌하다는 말이 아니라, 불쾌하게 생긴 얼굴이라고 생각했기에 쳐다보지 말라고 한 것이었다.

“왜? 우스워? 내가 그런 꼴을 당했던 게 우습겠지. 흥… 네 기를 살려 주려고 여기 온 건 아니었는데……. 동생이 멍청하게 꽃을 따 주겠다고 나서지만 않았어도 그렇게 떨어져 죽진 않았을 텐데.”

“동생이 죽었나요?”

“중요한 건 아니야. 그냥 과거 얘기일 뿐이야.”

마리암의 시선 끝을 따라가자 이 낡은 주택을 악귀와 저승으로부터 지켜 주고 있는 꽃 한 송이가 보였다. 꽃에도 영혼이 있다면 저렇게 불투명한 색일까 싶은 정도로 희미했다.

그리고 광안의 성녀는 또 다른 기억이 떠올랐다. 자신이 귀신들의 성녀를 공격했을 때 그녀의 품에서 저것과 똑같이 생긴 말라비틀어진 꽃이 공격을 막고 지켜 주었다가 재가 되어 사라졌었다.

그때부터였다. 귀신들의 성녀가 비통한 울음소리를 내지르며 자신을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

어째서 그녀가 저리도 구슬프게 울부짖고 폭주하는 것인지 지금까지도 의문이었는데…….

“죄송합니다, 마리암. 내가 당신에게 정말…….”

광안의 성녀는 자신이 더 상처받은 표정으로 마리암의 손을 꼭 붙잡았다. 어깨에 이마를 묻고 있는 마리암을 끌어안으며 자신이 저지른 행동을 사과했다.

두 성녀의 깍지 낀 손은 오랫동안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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